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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이란 곡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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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운
등록일
2016-02-03 00:57:46
조회수
565

 CCM에 대한 신학적 비판 글은 많아도 CCM곡의 가사를 중심으로 분석한 글이 보이지 않아서 감히 글을 올려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CCM과 신사도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얼마나 CCM을 좋아했던지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친다는 총신신대원 시절 찬양리더로 활동할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 부교역자로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 와서 담임목사님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접하고 배우면서 CCM과 신사도운동, 기복주의가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신학적 깊이는 없지만 CCM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으로서 CCM의 해악성을 알지 못하는 한국교회 교인들을 바라보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려봅니다. 이 게시판의 취지와 맞지 않다면 지우셔도 됩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애창하는 CCM 중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이란 곡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곡이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다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익숙하기에 내면에 숨겨진 위험성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짧은 글을 통하여 이 노래에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과연 이런 노래를 우리가 계속 불러야할지 여러분 스스로의 결단을 내려 보길 바랍니다. 우선 이 노래의 위험성을 지적하기에 앞서 제가 왜 이렇게 ‘은혜로운 찬양(?)’에 딴죽을 거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한 노래가 정말 하나님을 높일만한 것이고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널리 불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이는 마땅히 경고해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소개 된 베뢰아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자세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들은 말씀이 과연 성경적인지 진단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자세를 소개함으로, 우리가 이들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는 강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범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도 들은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특정한 신앙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CCM 가사들도 성경으로 진단해 봐야 합니다. 무조건 은혜롭다는 이유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정말 성경적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무조건 은혜롭다고 부르는 노래들이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객관적인 자세로 이 노래의 가사를 한 번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이런 가사가 어떻게 성경적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노래가 어떤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 하실 일이 없는데, 그 전능하심은 우리의 모든 간구와 우리의 모든 생각과 우리의 꿈과 소망도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의 모든 괴로움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아무도 그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주의 말씀을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잡았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합시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꿈과 소망, 모든 괴로움이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눅5장의 기사는 결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데 핵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베드로를 부르심에 핵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기 위하여 주님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표적이었지 주의 말씀을 의지하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점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주의 말씀을 의지한다는 것은 성경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교훈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의지한다고 해서 무조건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형통의 비결이지만, 그 형통은 세속적 형통이 아닌 주님 안에서 주의 뜻을 이루는 형통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통은 베드로나 바울처럼 주의 영광을 위한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순교를 통한 주의 복음의 확산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의 뜻을 이루는 형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적인 생각들을 내려놓고 그분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지하고 순종하면 모든 꿈과 소망을 이루며 괴로움이 일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거짓 메시지를 전함으로 결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의 전능과 신실하심을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결코 우리의 모든 생각, 간구와 소원을 만족시키는 데 활용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괴로운 일을 일소하는 수단도 결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시는데 충분한 능력에만 적용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 간구와 소원, 괴로운 일을 해결해 주실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많은 본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본문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계획의 성취를 이루시는데 부족함이 없는 주의 능력의 충분함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우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생각해봅시다. 출애굽기 2:24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역에 시달리는 모습과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그동안 잊고 계셨던 언약을 기억하신 것일까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그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계획하셨음을 모세의 출생 사건이 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지도자인 모세의 출생을 막기 위하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일 것을 법으로 공포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히브리 산파들의 목숨을 건 믿음의 행위로 모세는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그를 더 이상 숨어서 키울 수 없게 되자,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법을 공포했던 바로의 딸에 의해서 바로의 궁전에서 양육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없이 가능한 일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셨던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후 광야 40년을 지나게 하시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으니 이스라엘은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주셨던 언약의 최종 목적인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 당신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으로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혼합되고 열방의 우상들을 섬기자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가, 바벨론의 포로 된 가운데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혜미야를 통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하만의 간계로 모든 유대인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하여 그 위기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언뜻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소원과 간구와 괴로움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해결된 것 같아 보이지만 아니요. 그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존케 하심으로 그들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성취과정이었습니다.

 

만일 이 노래가 암시하는 대로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간구와 소원과 괴로운 일이 그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당신은 아래의 질문들에 대답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그의 간구와 소원과 괴로움은 해결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거절하셨다. 바울은 왜 간구하지 않았을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간구,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기도하셨지만 그의 간구도 거절되었다.

-디모데도 고질병을 갖고 있어서, 바울은 그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주를 마시라는 권면을 주었다. 왜 그랬을까? 간구하면 되는데?

-무엇보다 히브리서11장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 그들이 당했던 궁핍과 조롱과 환난과 괴로움, 톱으로 켜는 것과 돌에 맞아 죽음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쓰고 유리함, 광야와 산중과 토굴과 동굴에서 유리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이 간구나 믿음이 부족한 것이었을까?

-특별히 말세에는 짐승에게 경배함으로 666이라는 표를 받은 사람만이 매매를 하게 되어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되며, 이 표를 받지 못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든가 아주 비참하고 궁핍한 삶을 살게 될 것인데....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들을 그냥 이 비참함 가운데 인내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의 뜻을 이루는 데 충분한 능력에 적용되는 것이고, 신실하심은 그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해야 될 주의 말씀은 우리를 지키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과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우리의 소원과 마음의 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실 부패한 우리의 마음이 원하고 소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보다 더 더럽고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한 것들일 것이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원수 앞에 서게 되며, 믿음을 지키다가 우리를 7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 들어가게 하며, 사자 굴에 던져져도, 스데반을 돌에 맞아 죽게 한 그 자리에 서게 될지라도 마지막 날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은 결코 우리의 현실문제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용도로 쓰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처럼 우리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용도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이지, 그분이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라고 해서 자녀들이 모든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 간구하는 것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어려움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들을 통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흠도 없이 점도 없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어려움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우리 자신을 성숙시키며 성화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은 강화시키고 덜 깎인 부분들은 고통스럽더라도 온전히 깎여지도록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작성일:2016-02-03 00:57:46 125.130.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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