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문.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주고 있습니까?답.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위격, 그의 작정과 그 작정의 시행을 알려 줍니다 (히11:6, 요4:24, 요일5:7, 고후13:13, 행15:14-15, 18, 행4:27-28).제7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답. 하나님은 영이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광과 복되심, 그리고 완전함에 있어서 영원하시며, 완전히 충족하며 영원하고 불변하며 이해를 초월하고 편재하고 전능하십니다. 그는 또한 모든 것을 아시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며, 공의롭고, 긍휼하며 은혜
칼빈의 칭의 개념“사람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구원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깨닫고 소유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면 두 가지 은혜를 받게 된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마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재판관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신다. 그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 흠이 없고 순결한 삶을 배양하는 것이다”.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또한 사람이 믿음으로 혹은 행위로 의롭다
제5문. 성경은 주로 무엇을 가르칩니까?답. 성경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딤후1:13, 신10:12-13, 요20:31, 딤후3:15-17). 성경의 기록목적.우리가 보통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전해주려고 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제3문.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답. 거룩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앙과 순종(믿음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딤후3:16, 벧후 1:19-21, 엡2:20, 계22:18-19, 사8:20, 눅16:29-31, 갈1:8-9, 딤후3:15-17).제4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어떻게 나타납니까?답.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자체로 그 장엄함과 순수함, 모든 부분의 일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전체의 의도에 의해서, 죄인들을 깨닫게 하여 회개케
제2문.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답. 인간 안에 있는 본성의 참된 빛과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명백하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씀과 성령만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충족하고 효과 있게 계시합니다 (롬1:19-20, 시19:1-3, 행17:28, 고전2:9-10, 딤후3:15-17, 사50:21). 죄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한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을
(임진남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해설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시간입니다. 임진남 목사의 수고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큰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__________________제1문.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답.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롬11:36, 고전10:31, 시73:24-28, 요17-21-23).__________________ 목적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용도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요즘 현대인들은 성도의 견인을 마치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끌어 주시는 기관차의 머리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신다고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일부 대학선교 단체들의 간편한 복음전도식의 가르침이다. 복음의 내용은 없고 그저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팽배하다. 믿음의 조상들이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가르칠 때 그 속에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삶에 대한 강조가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일지라도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복음을 통해 부르신다. 하나님은 택자들이 회개하고 믿도록 복음으로 진지하게 부르신다. 하지만 이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이 다 구원에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자들은 철저하게 이성주의를 따른다.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항하여 거부할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실 때 그 부름에 순종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그 일의 권한은 결국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 자들의 주장은 “인
제한 속죄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택하신 자들만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의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제한 속죄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진 자들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있다. 아르메니우스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개혁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일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고 개혁교회가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주신 이름이다. 성자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실 때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의 이름을 취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름을 취하셨다고 해서 성자의 능력과 권능이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니다. 단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진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 속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는 제한된 개념이 이미 존재한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신의 백성
우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불리는 교리적 메시지를 통해 현대교회가 어떤 신앙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먼저 거의 모든 교회지도자들이 알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사실 개혁교회자체에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아르미니우스(1560-1609)라는 교회 장로가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한 다섯 가지 주장에 항론하여 만들어진 변증서라고 할 수 있다.사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칼빈이 만든 것이 아니라 1618-1619년에 네덜란드 도르트에서 개혁교회가 아르미니우스의 반기독교적인 주장에 대하여 거짓이라고 만장일치로 결
우리는 행위언약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반성을 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개혁신학자들의 반성 없는 신학 개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위언약이 웨민신앙고백서에서 나온다고 하여, 그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고백서가 성경처럼 무오하다고 하는 어리석은 교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고백서에 대해 어떤 흠을 찾아 신앙고백서 전체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이 글과 문서는 로버트 레담이 지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기술한 자료이므로 사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버트 레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P&R)1643년 9월 6일 제47차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칭의에 대한 부분에서 능동순종을 제기한 것 때문에 1643년 9월 6일 (수) 47차 회기부터 1643년 9월 12일 (화) 제52차 회기끼지 총대들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웨민의 원래 11조는 다음과 같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나 공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우리의 주되시며
능동순종은 장로교 신앙고백의 가르침이 아니다. 웨민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라고 가르치는데 능동순종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사실이다. 만약 누가 이것을 주장하는지 말하라고 하면 그 교수들의 실명을 들어 주겠다. 완전한 순종과 모든 순종은 분명히 다르다.장로교 목사, 또는 신학교에서 청교도 회중파의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어떻게 장로교 목사들이 회중파의 능동순종을 주장하고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능동순종을 주장하려고 한다면 장로교단을 떠나든지 아
신복음주의 풀러신학교가 개교한 지 2년 정도 지날 때 1949년 30대의 빌리그래엄이 복음 전도 집회를 캘리포나아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1950년 1월 16일 오켄카의 초대로 빌리그래이엄이 보스턴에서 집회를 열었다. 1950년 오켄카는 빌리그래이엄의 전도협회 설립의 도움을 주었다. 이때 오켄카는 빌리그래엄 전도협의 이사가 되었고, 빌리는 플러신학교의 이사가 되었다.빌리그래엄은 사실 처음부터 자유주의 신학과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빌리그래엄이 전도집회를 하면서부터 돈과 조직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자유주의와 기타 비복음주의 단
1525년 윌리엄 딘테일을 비롯한 종교개혁주의 자들은 복음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할 필요가 없을 만큼 복음주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년이 지난 이후 교회는 복음에 대한 신앙이 왜곡되고 급기야는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정통신앙에 대한 바른 신앙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런 교회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 때문에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일으키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복음주의자”이다.19세기 영국 성공회에서 정식으로 복음주
임진남 목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요즘 우리는 알든지 모르든지 ‘다수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정의가 되어 버린 세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세상에서 아주 빠르게 나타나는 사상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사회 법규에 대한 이해도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교회 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규율들이 다 사라지고 있고 교단 헌법과 예배모범은 이미 상실되었다. 특히 예배 가운데 이러한 모습들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우리 교단의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WEA에 대하여 별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 104회 합동 교단 총회에서 WEA와 교류를 금하는 헌의안이 상정되었을 때 교류금지 찬성이 아닌 반대 결의가 되었다. 사실 2020년 총회 당시 대다수의 총대들은 WEA가 어떤 단체인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거의 전혀 없는 상태에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총신의 일부 교수들이 2016년부터 총신 신학대학원에서 발간하는 신학지남에 WEA에 대한 교류를 긍정적으로 해야 한다는 소논문을 기재하고 있었고 이것을 찬성하는 일부 목사들의 주장대로 총회결의가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의 사변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동적 순종을 통해 율법의 의를 획득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율법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을 받는 방법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이 증거하기 때문이다.이것에 대하여 칼빈도 갈라디아 강해설교에서 자세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약속은 적절하지 않으며 구원을 받는데 부분적인 도움밖에 주지 못한다고 잘못 생각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