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방언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예언은 영분별 은사로 분별 한다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이 본문을 29절의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와 연결시켜서 보면, 두 본문이 서로 같은 구조로 된 같은 성격의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언하는 자들이 둘이나 셋이 말할 때 다른 이들이 이 예언을 분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 예언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27절에서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방언을 말하고 한 사람은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거짓 방언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이제 문제의 본문인
"리피야 라샤카파테 라시야다 로야로 바칸나기 리키키고 나카치 라시카파타리 니미카니야 아파타카카야 시키키코 바야"위의 방언은 몇 문장 정도인데 통역은 엄청나게 길다. 실제 지구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데, 언어로서의 구조가 없고 일관성도 찾아 볼 수가 없다.'리피야' : 내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는 내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느냐'라샤카파테' : 내가 구만리 장천 멀리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라시야다' : 땅 끝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땅을 파야 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로야로' :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너희 속에 들어와 있고'바칸나기' : 너희 숨과 함께 있고 너희 생명 속에 함께 있도다'리키키고' : 내가 너
고린도교회에는 왜 방언과 통역의 은사가 있었을까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의 은사 목록에는 “방언 말함”의 은사와 함께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가 나온다. 통역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가 시행되었을 때 필요한 보조적인 은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언의 은사가 있는 곳에 꼭 통역의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을 보면 오순절 날 예루살렘, 고넬료의 집, 에베소 지역에서 방언이 있었지만, 그 방언들이 통역된 적은 없었다. 만약 이 경우에 고린도전서 14장 28절의 바울의 가르침, 즉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사람들 앞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서 하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한 사도행전의 방언들은 통역이 없었으므로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은사 목록에 나오는 은사의 순서를 놓고 방언 폐기론자들은 그 순서가 은사의 우열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사 목록의 맨 나중에 위치한 방언은, 방언 통역을 포함해서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열등한 은사라는 것이다.1) 그러나 반대로 오순절주의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2)어느 편의 주장이 옳을까? 불행하게도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장 8-10절과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 전후에서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들은 모두 귀중한 은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틀림없는 사실 한 가지는 은사 목록 맨 나중에 있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열등한 은사라는 방언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로 설명했듯이, 몸에 붙어 있는 지체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한 의도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면서 무엇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앗수르 방언인가? 아니다. 바울의 관심은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예언으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앗수르를 보내어 심판하실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예언)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앗수르 방언1)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앗수르 방언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지라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선지자의 예언(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들어가는 말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악’으로 규정하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엄한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21-25절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사야 당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섰던 이스라엘을 보여주면서, 고린도 교회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빠져있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21절에서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까닭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정황이 이사야 당시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정황과 흡사하기 때문이다.본문 해석의 난제와 오석"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바울은 방언기도를 한 적이 없다. 위 본문에서 바울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방언을 더 많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1)하듯이 방언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고린도교회의 방언기도와 전혀 다른 것임을 선언하기 위함이다.바울이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방언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방언(외국어)이다. 본문에서 “방언을 더 말하므로”는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 부딪히면서 이들에게 방언으로 복음을 전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영과 마음과 육체를 다 동원하는 전인격적인 기도(기도하는 자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하는 바른 기도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상적으로 기도할 때,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라는 수식어는 더러 쓰지만(엡6:18; 유20절) “영으로”라는 수식어는 굳이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음과 육체와 함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이제라도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기도가 무슨 특별한 기도라도 되는 것처럼 “영으로 기도한다.”는 거짓말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가를 깨닫고, 영과
글을 열며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4-15).위의 본문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바울을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변호하는데 쾌재를 부르며 사용하는 본문이다. 반면에 은사중지론자들에게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오순절주의자들의 유력한 증인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순절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당혹스러운 악재로 작용한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차라리 이 본문은 없었으면 좋을 텐데........’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그러나 이 본문은 오히려 방언의 불편한 진실을 밝히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지난 겨울 휴가를 지나며 동료 선교사들과 이러저런 대화 끝에 “현대 방언이 비성경적, 비진리” 라는 이야기를 하자 한 선교사님은 대뜸, “선교사님은 어떤 영적인 체험이 있으신가요?”라고 질문을 하였다.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는 식의 논지였었다. 사실 예수를 믿고 체험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여기 질문의 요지는 방언같은 영적 카리스마틱 직접 체험을 묻는 것이었다. 소위 옹알이 기도방언을 한다는 분들은 이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면, 대부분 뭔가 다른 의견에 대해 배우려는 것 보다는 “체험도 없고, 신앙도 없이 머리로만 판단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 마귀의 도구, 너나 잘 믿어라! 빨리 성령님께 회개 해라!” 라고 단죄하고 역공하기에 급급함을 본다. 새로운
고린도전서 14장 2절, 4a절을 특징으로 하는 방언은 왜 하면 안 되는가? 고린도전서 14장 2, 4a절로 설명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통역할 수 없는 불소통의 방언이다. 그러므로 이 방언은 교회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짓 방언이다.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고 말함으로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4a절에서도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고 말함으로, 이들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과는 무관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고린도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이 심각한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5절을 근거로, 바울은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만큼은 너무 귀중한 은사이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다 말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1)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마추어적인 성경 해석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2)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전후 문맥도 고려하지 않은 채 본문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정말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했는지 전후 문맥을 통해 살펴보자.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5).여기서 먼저 살필 것은, 본문에 언급된 ‘
질문>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성령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령의 사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특히 요즘 위험한 길로 치닫는 유명한 교회들을 생각하면 성령에 대한 이해가 더욱 더 중요하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성령에 대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일까요?답변> 질문은 주신지 약 5개월이 지난 것 같은데, 그 동안 미루기만하고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질문을 주시던 바로 무렵에 또 다른 분이 춘천한마음침례교회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에 대해 질문을 주셨었습니다. 그 분의 질문에 대해 먼저 부족한 답변을 작성하여 의 지면을 통해 나누었는데, 그 일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지금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 문제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만큼은 개인의 덕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가?"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오순절주의자들은 위의 본문을 근거로 방언기도는 ‘개인의 덕을 세우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다른 모든 성령의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의 은사만큼은 통역하면 교회를 위하는 은사가 되고, 통역 없이 개인적으로 기도하면 개인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익한 은사라는 것이다.1)과연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외국어)과 함께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영음)도 있는가? 아니면 한 가지 방언(영음)으로 통역자가 있을 때는 교회의 덕을 세울
들어가는 말거짓방언자들은 고전14:2을 근거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이 고전14:2에서 방언기도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면, 방언기도야말로 최고의 은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갓 피조물이며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히 비밀을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한갓 피조물이며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방언의 은사만 받는다면, 방언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거짓방언자들은 방언기도를 하면서 정말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어떤 경우에도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없다. 고린도
오순절 방언은 일차적으로 바벨탑 사건을 인한 저주를 푸는, 그 저주를 풀고 대신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었다.[11]창조 이후 인간은 동일한 구어를 사용하였음이 틀림 없다(에덴 동산의 언어). 그러던 인간이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을 통해 그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언어의 혼잡과 그로 인한 분리, 분열, 다툼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한 분리, 분열, 다툼은 불순종이란 죄의 결과였다. 높은 탑을 쌓아 스스로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쌓은 바벨탑 사건은, 온 땅에 충만하기 까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창 1:26-28)에 대한 불순종이었고 더 적극적으로는 도전과 반역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2]오순절 방언 사건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거짓방언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자신들이 하는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도 이들처럼 방언기도를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썼다면, 방언하는 자야말로 놀라운 경지의 영적 고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다니 말이다.그렇다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교회는 방언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고수였을까? 고린도교회는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고수인가?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그것도 인간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로, 그것도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질문> 안녕하세요? 오늘날 기도 중에 환상을 보는 것이 성경적인가요? 기도 중이나 아니면 그 사람을 볼 때, 순간 그림같은 장면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변에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합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답변>기도 중에 환상이 보이거나,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에 대한 예언적 의미가 담긴 그림같은 장면이 스쳐간다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고 답변해 보게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 그런 일이 없었는데 스스로 착각을 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영적으로 대단하고 영험한 사람인 것처럼 과장하고 꾸미는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사람이 무엇을 본다는 것은 먼저 눈으로 그 실체를 보았고, 그 다음에는
성령의 첫 강림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모인 다양한 문화권 출신의 people group에 이해되어 지게 하기 위해 당시 사용되고 있던 다양한 언어들로, 더 정확히 말해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의 언어들로 복음이 통역되었다는 사실에 오순절 방언의 선교적, 선교역사적 의의가 있다.오순절 성령 강림시 나타난 방언의 기적은 바벨탑 사건시 있었던 언어를 혼잡케 한 하나님의 심판의 영향력을 뒤집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는 각 복음서 후반부에 다양한 형태로 기록된 지상명령과, 사도행전 1:8에 예수님의 의해 전망된 것처럼, 장차 복음이 모든 언어적, 민족적(혈통적), 종교적, 문화적 경계선을 뛰어 넘어 전파될 것이라는, 즉 모든 언어로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
고린도전서 14장 1-3절을 전후 문맥을 통해 분석해 보면, 2절의 방언 이야기는 바울의 의견이 아님을 알 수 있다.전후 문맥을 통한 분석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명령한다. 그러고 나서 2-3절에서는 1절에서 예언하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4절에서는 2-3절에서 말한 이유를 요약해서 다시 말한다.헬라어 원문에서 2절은 접속사 ‘가르’(‘ga.r’, 왜냐하면-안타깝게도 한글 성경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로 시작하고, 3절은 접속사 ‘데’(‘de.’, 그러나-다행스럽게도 이것은 한글 성경에 반영되었다)로 시작한다. 그래서 2-3절은, 1절의 이유로 제시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원문의 접속사를 살려서 1절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