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그리스도인들의 바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어 원문을 읽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바르게 번역된 성경의 중요성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예배에 사용하며, 또 가장 많이 읽고 있는 한글 개역 성경이나 개역 개정 성경의 번역은 부분적이기는 하나 원문과 거리가 먼 엉터리 번역들이 꽤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물론 번역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얼토당토 않는 오역(誤譯)이나 거의 복음의 진리를 부정하는 수준의 악역(惡譯)은 지향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면에서 새 번역,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이 한글 개역 성경이나 개역 개정 성경보다는
글을 시작하며필자의 이전 글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에 넘쳐나는 유해물질들(1)”에서 살펴 본대로 유석근 목사는 [알이랑 민족]에 영적 유해 물질들을 도배해 놓았다. 다시 한 번 아래 글에서 그가 얼마나 황당한 주장들을 하면서 유해한 쓰레기들을 만들고 도배했는지 잠깐 감상해 보고, 본 이야기로 들어가자."욕단의 가계는 에벨의 혈통으로서 셈족 중에서도 특별 선택을 받은 셈족의 종가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백성이었고, ‘알이랑 정신’ 곧 ‘하느님 중심 사상-신본주의 정신’이 가장 확고한 족속이었다! 따라서 욕단 족속은 셈족의 정통성을 승계한 백성답게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즉 ‘알이랑(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찬송하면서 동방으로 이동했던 것
글을 시작하며103회 합동 총회에서 ‘이대위’(위원장: 김영남 목사)는 정이철 목사에게 이단성이 없다고 보고했다(제103회 총회 보고서, p.575).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정이철 목사에게 이단성이 없다는 점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모든 글들을 살펴보면, 정이철 목사는 한국교회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목회자이며, 특히 합동 교단을 사랑하는, 그래서 합동 교단이 지향하는 개혁주의의 신학이 변질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몇 안 되는 목회자들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열정이 남달라서 때로 실수도 하지만 말이다).작년 102회 총회에서 김성로 목사와 이인규 권사에 대한 교류 금지 결정도 정이철 목사에 의해 에 개제된 글들이 결정적인
시작하며필자는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에서 매월 시행하는 7월 세미나의 강의를 위해, 유석근 목사의 (이후 ‘알이랑 민족’)을 또 다시 뒤적였다. 그러나 이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다른 강의에서 준비해 왔던 ppt 작업이 이번에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유석근 목사의 은 페이지마다 문장마다 예외 없이 헛소리들로 넘쳐난다. 또 그 헛소리들마저도 갈지(之)자여서, 서로 최소한의 논리적인 연결도 없이, 또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 이 책에서 유석근 목사는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불쑥 어떤 것을 정의해 놓고, 그 정의를 바탕으로 쓴 소설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헛소리를 해대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능력
글을 시작하며영적인 유해물질로 가득 찬 유석근 목사의 (이하 ‘알이랑 민족’)이라는 책은 2001년에 초판을 시작으로, 2005년 개정판 1쇄에서 2015년 개정판 15쇄까지 찍으면서 불황으로 허덕이던 기독교 출판계에서 기염을 토했다. 또 2009년에 출판한 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2013년에 4쇄를 찍으며 나름대로 승승장구했다. 아마도 유석근 목사는 2001년 이래로 지금까지 영적 쓰레기통인 이 주는 명예와 부를 상당히 누렸으리라 짐작된다.그러나 이런 유석근 목사의 쓰레기통 호황은 이제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이번 10월에 있을 장로교 합동 총회에서 유석근 목사를
글을 시작하며[지렁이의 기도]는 김요한 목사의 자괴(열등)감에서 비롯된 恨이 만들어낸 비극적인 괴물이다. 그러므로 영적 자괴(열등)감에서 오는 김요한 목사의 恨이 [지렁이의 기도] 여러 곳에 여과 없이 투영되어 있음이 발견된다.“나는 약 2개월간 50차례가 넘는 이런 일들을 반복해서 겪으면서도 여전히 목사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 남은 인생의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예수님은 좋지만 기독교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목사들은 싫었다. 교회를 생각하면 연민의 마음이 물밀 듯이 몰려왔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 위선과 허영심에 치가 떨렸다. 나는 더 이상 기독교인들과 엮여 살고 싶지 않았다.”(지렁이의 기도, p
시작하며[지렁이의 기도]는 시작(프롤로그)에서 부터, 성령이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면서 “아들이다. 됐냐?”라고 했다든지, 영혼이 내 몸 밖을 빠져나가 하늘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든지, 성령의 불이 너무 강렬해서 집에 불이 난 줄 착각하고 “불이야!”라고 정신없이 외쳤다든지, 군목 시절에 군부대 낡은 건물에서 전기 스위치를 작동하지도 않았는데,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에 맞춰서 전기불이 들어왔다든지, 어느 것 하나 상식적이 않은, 아니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이런 까닭에 정상적인 신앙의 소유자라면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거의 예외 없이 ‘어, 무언가 좀 이상한데!’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이내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상하다는 의심을 접고 계속 책을 읽게
글을 시작하며지렁이 잡기(2)에서 지적했듯이 “불의 체험”은 성령이 아닌 다른 영, 즉 사단이 주는 미혹의 체험이다. 따라서 “무릎을 꿇자마자 기세등등한 산불처럼 어떤 뜨거운 불이” 김요한 목사를 사로잡은 뒤, 김요한 목사에게 “아들이다. 됐냐? 뭐 하루 종일 화를 내고 그러냐?”라고 속삭인 맑고 분명한 음성은(지렁이의 기도, p.32) 성령이 음성이 아니라 사단의 음성이다.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비록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만큼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삶이나 말(특히 하나님의 진리에 관해서)은 비교적 정직하고 모순 없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반면에 거짓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생각 없이 보면 참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의 삶이나 말(특히 하나님의 진리에 관해
시작하며[지렁이의 기도]에서 김요한 목사는 파스칼의 이야기로 ‘프롤로그’의 문을 연다. 파스칼은 수학, 물리학 등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기적인 천재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과 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위대한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요한 목사가 [지렁이의 기도] 서두에 이렇게 ‘파스칼’을 들고 나온 까닭은 아마도 독자들에게 자신의 ‘불 체험’으로 시작된 예언, 방언 등을, 위대한 ‘파스칼’의 신앙 색깔과 같은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 때문인 것 같다. 그는 파스칼의 어떤 경험을 이야기하고 난 뒤에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말로, 자신의 체험이 파스칼의 체험과 같은 종류인 것처럼 말한다."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날은 1999년 6월 8일 저녁
들어가며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지난해에 한국교회가 보여준 가장 치욕적인 민낯은, JTBC 방송의 메인 뉴스 시간에 연속적으로 보도되었던 김삼환 목사의 ‘명성교회’ 부자 세습 사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야말로 한국교회의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 다른 타락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앞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부자세습이 교회마다 줄을 이을 것이며 이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실족하게 될 것이다. 벌써 명성교회 안에서는 피를 토하며 실족하는 영혼들이 양산되고 있다.어쩌다 한국교회는, 김일성이나 할 수 있는 치졸한 부자세습의 짓을 백주대낮에 공공연하게 자행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부자세습이 처음 있었을 때, 한국교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그는 개정판에 새로 더한 것들 중, 첫 Chapter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십자가를 인정하는 것처럼 액션을 취한다."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십자가’이다. ‘대속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이 정하신 도(道)이다(고전1:18).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죽음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속죄의 유일한 근거는 ‘피’다(레 17:11). 히브리서 9장 22절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십자
오순절주의의 방언 통역이 성령의 은사가 아닌 이유통역은 양자 모두가 서로의 언어를 모를 때, 양자의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 양자의 언어를 모두 알고 있다면, 소통 가능한 언어를 쓰면 되므로 통역은 따로 필요 없다. 그래서 앞 장에서 예로 든,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예배하는 현장에서, 조용기 목사의 방언-통역은 그가 꾸며낸 종교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가 서로의 언어를 모를 때 통역이 필요한 법인데,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를 주실 때 회중이 아는 언어로 은사자에게 말하게 하실 것이다. 이 은사가 바로 예언의 은사다. 물론 고린도 교회의 예배 현장에서는 예언뿐 아니라 방언도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방언을
김성로는 최근 모 일간지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국민일보/2017. 7. 10). 이것은 그의 책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제1판에서 “사도행전에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제1판, p. 16)라고 주장한 것과 사실상 같은 맥락이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 “지금”이라는 수식어를 씀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키고, 독자들로 하여금 부활해서 지금까지 살아계신 예수님만 의식하도록 하는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다.김성로가 이렇게 살아계신 예수님, 즉 부활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믿음 안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들어가며오순절주의의 방언은 고린도교회의 방언과 맥을 같이 하는 거짓 방언이다. 이 거짓 방언은 소통이 불가능한 그저 꽹과리 같은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의 거짓 방언은 당연히 통역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오순절주의의 거짓 방언을 통역한다면, 그 통역 역시 가증스러운 거짓 통역일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통역이 가장 난처한 문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통역에서 거짓이 들통나버리면, 그 동안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둔갑시킨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순절주의자들 중에는 방언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많은데, 통역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오순절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통역을 해야 진정한 고수로 인정받는다).그
방언기도는 강한 중독성이 있다피방언자(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하는 자)가 처음 방언을 했을 때,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황홀경을 경험하게 된다. 이 황홀경이 피방언자가 방언에 중독되는 일차적인 원인이 되는데, 처음 방언을 했을 때 피방언자가 경험하는 황홀경의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방언에 중독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피방언자의 뇌는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그 자극으로 인한 황홀경을 더욱 또렷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인간의 뇌가 황홀경을 기억하는 이유는 황홀경에 빠졌을 때 뇌에서 ‘도파민’이라고 하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도파민은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많이 분비되는데 도파민이 분비되면 될수록 황홀경의 쾌감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도파민의 분비를
김성로 목사가 왜곡하는 성경 구절들김성로 목사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에서 그 핵심인 십자가를 밀어내고, ‘부활을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김성로 목사는 시종일관 성경을 교묘하게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부활복음’이 마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인 것처럼 위장한다. 이를 위해 김성로 목사가 이용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1)사도행전 전반부에서김성로 목사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을 외치는 증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이 부활을 외치고 믿었기 때문에 기적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었으며, 그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해석을 근거로 자신의 교회에서도 부활을 외쳤더
이 밖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의 능력과 유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 중 일반적이면서도 대단히 위험한 것들 몇 가지만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방언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오순절주의자는 방언기도를 하다가 공중으로 부양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우리 사모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하고 인간적인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저자 삽입)기도를 중단했습니다.”1) 그러면 바울은 방언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삼층 천까지 올라간 것일까? 아무튼 이 정도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수준인 것 같다.2)손기철 장로는 귀신은 방언기도를 가장 무서워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어느
글을 시작하며김성로 목사는 ‘십자가를 쓸데없이 강조한다’, ‘죽은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는 등의 주장으로 기성교회가 선포하고 믿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폄훼함으로써, 자신이 고안한 ‘부활복음’을 히트 상품으로 부상시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이하 ‘기진협’으로 표기)의 림헌원 목사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이단성을 간파하고, 그에게 진심어린 권고를 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부터 ‘기진협’과 (대표 정이철 목사)은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의 문제점을 신학적으로 집요하게 비판함으로, 전국 교회들이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이 위험한 ‘거짓복음’임을 인지하도록 노력했다.이에 대해 김성로 목사는 ‘기이협’의 이인규 씨를 등에 업
오순절주의자들의 변태적인 ‘방언기도’가 거짓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메시지가 없는 영음(잡음)이다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나 고린도 교회에서나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인간의 언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음(잡음) 방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의 영음(잡음) 방언은 성령이 초대 교회에 주셨던 방언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 목록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가 있다는 것은, 방언이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1)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27절에서 방언을 말하고 그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닌 영음 방언이다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며, 다른 종류의 방언(영음, 하늘 언어)은 없다. 성령이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주신 방언도 언어였고, 고린도교회에 주신 방언도 언어였다. 그리고 1901년 로버트 파함이 운영했던 벧엘 신학교의 오즈만 여학생이 한 방언도 언어(중국어)였다고 한다.1) 로버트 파함은 그의 제자 아그네스 오즈만의 중국어 방언을 보고 방언이 외국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방언의 은사가 상시적인 능력으로 착각하여 언어 훈련 없이 선교사를 선교지에 파송해도 된다고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을 따랐던 선교사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그런데 오즈만의 방언이 중국어가 사실이었다면, 성령이 오즈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