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과 현대교회는 성도의 성화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진다. 물론 정통교회와 개혁신학도 성도의 성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아주 적극적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성도에게 성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정작 성화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성도가 자신의 삶 속에서 성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거의 없다.현대교회가 성도의 성화를 이루기 위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신앙의 방법들이다. 오순절계통의 교회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도가 거룩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성령을 받으면 능력이 생겨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성령을 받기 위해 금식도 하고 기도원에서 철야를 하면서 몇 날 며칠을 기도한다.성도가 성령을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해 자신이 설득되지 않는' 한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루터의 이 유명한 말은 자신의 신앙이 무엇으로 인해 결정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배도한 로마 카톨릭의 거짓 신앙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성경의 말씀과 분명한 이성에 의해 자신의 양심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한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로마 교회는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지만 하나님은 성경으로 로마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신 것을 우리는 믿는다.로마 교회와 개신교의 차이 가운데 하나는 특별계시에 대한 무오성의 기준이었다. 로마 교회와 개신교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로마 교회는 성경과
유일한 기독교의 신앙이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니 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죽은 자의 무덤에서 기도하고 귀신과 신접하여 능력을 얻은 사람이다. 귀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여 준다고 해서 마치 그 사람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일부 목사들이 추앙하여 따른다.이러한 현상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마치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여겨 많은 성도들을 거짓 신앙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직도 일어난다고 하는 것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작금 한국교회에 타락의 한 부분을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목회 세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목회자가 자신의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시키는 것을 타락한 것으로 보는가? 먼저 세습이란 단어의 의미는 돈(재산), 권력, 지위, 신분을 자손 대대로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목사가 자신의 목회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사실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목사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부와 권력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탐심이고 죄악이다.목회를 물려준다고 하는 것과 부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를 물려준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현대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마치 자신이 섬겼던 교회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목회를 이어가게 하는 헌신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목사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 현대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명예와 인기를 위해 성경을 쪼개고 나누고 말았다.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세분화시키고 있다.우리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과정을 보면 그것들이 세분화 되어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약신학, 신약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조직신학 등 다양한 신학들이 가르쳐 진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 나가서 구역신학이라고 하면서 또 나눈다. 모세오경, 소선지서, 대선지서, 시가서, 역사서 등등. 계속해서 이렇게 신학들이 세분화되고 나눠지면서 마치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게 알고 성도들에게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여긴다. 하지만 결국
성도들은 성경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성경 공부를 하다보면 많은 질문을 받는다. 때론 호기심 때문에 성경을 사변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목사)들은 모든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간혹 어떤 교사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성도들에게 믿음을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의심하는 성도들 보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믿음으로 믿는 성도가 더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기독교를 아주 미신적이고 비도덕적인 종교로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사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은 아주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이성적이다. 또한 논리적이다. 쉐런 키에로
현대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어리석게도 파괴시키고 있다. 특히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킴으로 인해 중보자이시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끝난 것으로 가르친다. 이러한 과오는 이미 로마카톨릭과 이슬람에서 시작한 악의적인 가르침이었다.그런데 현대교회가 어느 순간부터 성령께서 오늘날 교회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며 성도들을 이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뒤로 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영광을 확증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고백해야 한다.특히 오순절주의 교회나 성령운동을 하는 일부 아주 미련한 자들은 로마카톨릭과 마호메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교회에 그대
독일의 신학자 칼 발트는 목회자들에게 “한손에 성경 다른 한손에 신문”이라는 개념을 통해 목사가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마치 목사가 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칼 발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칼 발트의 신학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해도 필자는 그의 신학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가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이야기 하지만 정통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 발트의 이 말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있는지 목사들은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물론 목사는 사회의 일부분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2000년 전 유대사회에서 태어나셨다. 이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성경을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또는 유대사회에 대한 문화적 배경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에는 아주 심각한 독소가 숨어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으로 오셨고 그 나라와 그 사회속에서 사역을 하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대사회를 근거로 해서 사셨던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를 매개체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한 바른 인식이 어느 정도 가르쳐지느냐에 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유대사회를 근거로 해서 사역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성경의 계시는
현대교회에서 가장 크게 왜곡되어 가르쳐 지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방언에 대한 은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과 성도들이 기도의 은사로 알고 방언 받기를 위해 얼마나 사모하는지 그 열풍은 지금도 대단하다. 그렇다면 과연 방언이 기도의 은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여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방언이 기도의 은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목사들과 성도들은 방언이 기도의 은사인 것처럼 그렇게 알고 있는가?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순복음교회의 어리석은 가르침이 마치 성경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방언에 대한 말씀이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누구하나 방언이 기도의 은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
보통 우리는 “성령 충만하라” 하신 그 말씀 때문에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늘 충만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 충만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렇지 않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은 유일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그런데 우리들에게 성령 충만 하라고 하신 것은 성도가 혼자 충만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성도 각 사람에게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성령의 은혜를 주신다. 우리는 형제로서 교제를 갖는다. 다시 말해, 교회를 이루고 그 이룬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한다. 그것은 아무도 스스로 혼자 성령 충만하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다.그 이유는 성도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나누고, 협력하게 하는 존재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현대교회의 모습 가운데 그야말로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모습들이 상당이 많다. 일일이 다 예를 들 수 없지만 가장 세속적인 한 가지를 든다면 그것은 바로 신학교의 교육이다. 오늘날 신학교 교육은 그야말로 세속적이다. 너무나 세상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신학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신학교에 왔다고 한다.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다름 아닌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하게 성립되는 것이다.그런데 이들이 신학교에 와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그 광경을 보면 아마도 성도들이 실망할 것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자신들이 목회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는 “돈”은 사람들에도 유혹을 가져다 준다. 때문에 가짜 “돈”이라는 위폐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위폐를 감별하는 전문가들이 각 나라마다 있다. 그런데 이들이 시대마다 아주 정교하게 발전하는 위폐들을 구별하기 위해 하는 훈련이 따로 있다. 그것은 단지 진짜 돈, 진폐를 항상 만지고, 또 만지고 늘 진폐만을 가지고 훈련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항상 변하는 위폐를 쉽게 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 기독교가 항상 성도들에게 증거해야 하는 복음은 섞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다른 것을 섞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사람들은 순수한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현대교회에서 간혹 오해하는 것이 있다.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개신교의 산물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것인가? 예를 들어 죄인이 의롭게 되는 (칭의)것은 믿음으로 된다고 하는 것을 루터와 칼빈, 그리고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이신칭의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거룩한 삶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배웠다면 잘못된 지식과 무지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개혁교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거룩하게 된다”고 하는 이 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신앙만을 주장하고 가르쳤는가? 전혀 아니다. 종교개혁시대와 이후 시대에 등장한 믿음의 선진들은 한 결 같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후 유월절을 제정하시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날을 기념하면서 그들의 자손들에게 유월절의 의미를 가르쳐 대대로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이 유월절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 있을까? 어쩌면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가 기존의 교회성도들을 미혹하여 자신들의 모임에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 유월절과 성찬에 대한 바른 신앙교육을 시키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단들의 왜곡된 교리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고 본다.개혁파 교회는 성도가 은혜 받는 방편을 합당한 말씀의 선포와 세례와 성찬, 그리고 기도로 규정하고 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교회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이나 가르침을 종종 배우게 된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성도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그렇게 많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흐르고 있다.대부분의 교회에서 부흥회나 유명한 강사를 모시고 집회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거나 집회를 하는 이유는 어떤 목적을 두고 있다. 그 목적이란 거의 돈과 관련이 있다.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교육관을 세우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넓히거나 아니면 교회 빚을 갚아 나가기 위해서 자주 외부 강사들을 모신다. 아니면 선교지에 보내는 돈을 모으기 위해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이단들이 상당히 많이 있고, 그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단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요한계시록을 자의적으로 해석이다. 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통일된 해석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상징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를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오류에서 이단들이 계시록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 왜 통일성을 가지고 해석되지 못한 것일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기록 시점에 대한 차이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언제 이 계시록을 기록하였는지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기록시점과 이단들의 발생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시
개혁교회가 목사, 장로, 집사를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목사만 교회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위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의 말 한마디에 성도들은 그저 순종하면 복을 받는 다는 기복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위해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세우셨다. 이것은 목사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는 장로와 집사라는 말씀이 아니다. 교회를 위해 목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장로와 집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간혹 교회가 갈등이 있을 때, 거기에는 자신
우리는 칼빈의 나 그의 주석을 읽으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미친 개' '협잡꾼' 이라고 하는 말들이다. 칼빈은 이런 과격한 말을 (사실 칼빈에게 있어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왜곡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한정지어 사용한다.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동정녀 탄생을 거부하고 성경 66권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아주 단호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칼빈은 진리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성경해석을 완고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성경의 난해한 부분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우리는 주변에서 다양한 교파와 교단을 통해 세우진 교회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교파와 교단은 신학과 정치에 의해 규정된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가장 많은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파가 장로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장로교의 정치에 대한 목회적 측면에서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 장로교가 장로교의 독특성을 잘 발휘하고 있는지 언급하고자 한다.세계 교회에서 가장 큰 교회와 큰 교단이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이런 대형교회의 특징은 바로 목사 중심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도 유행처럼 이루어진다. 미국에서 커뮤니티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자 한국에서도 이러한 커뮤니티 교회를 이루기 위해 목회자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교회가 부흥하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유행병이다. 그런데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