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는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능력이다성령의 은사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오순절 날 방언으로 말했던 제자들은 외국어를 배운 적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성령이 임하셨을 때 이들은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를 갑자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외국어를 아무런 배움이나 훈련 없이도 구사할 수 있도록 성령이 이들에게 초자연적인 외국어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오늘날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언어를 배워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초대 교회의 방언의 은사처럼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능력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은 외국어 능력일 뿐이다.또 성령의 은사는 신적인 능력이다. 이 능력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글을 열며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문제 삼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성령의 은사를 흉내 낸 거짓 방언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 4절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 교회의 방언도 당연히 거짓 방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방언기도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꿈에도 해 보지 않았을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특히 방언기도를 통해 여러 가지 영적 체험(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체험은 영적 체험이 아니라 착각에 불과하다)을 한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필자도 그랬다. 필자는 방언기도를 시작한 이래 수십 년 동안 방언기도가 주는 생생한 영적 체험들이 성령의 역사임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성경을 통해 방언기도가 거짓
최종 경고바울은 지금(고전12장~고전14:32)까지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최종적으로 엄한 경고를 한다."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14:37-38).위 본문에서 바울이 굳이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말은 정상적인 신자들에게는 하지 않아도 되는 상식적인 말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고려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자신을 신령하다고 여기는 정신 나간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1)따라서 바울은 자신을 신령하다고 여기는 정신 나간 자들의 저항을 의식했기 때문에 자신이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소멸되어 갈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결국에는 소멸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바울이 성령의 영감으로 고린도전서 13장 10-11절을 기록할 때 확실히 깨달았을 테지만, 그 전에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은사가 소멸되는 것을 이미 인지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신유의 은사에 대한 그의 경험을 살펴보면 바울은 은사가 소멸되어 감을 몸소 겪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바울은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자를 일으켰다(행14:10). 귀신들린 소녀에게서 귀신도 쫓아냈다(행16:18). 자신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갔다(행19:12).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까지 행했다(행20:10). 이렇게 바울
글을 열며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을 듣는 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된, 그래서 영혼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거짓 복음임을 잘 모르고 있다. 이런 기막힌 현상은 정이철 목사에 대한 이재위 목사의 비판 글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아래는 이재위 목사가 정이철 목사를 비판한 글의 일부이다.“목사님들은 설교를 하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럴 땐 주위의 조언/지적을 받아 고치면 되듯이, 고치면 되는 사안이지, 이단으로 몰 만한 사안은 아닌 것입니다. 남침례는 모두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김성로 목사는 그런 지적을 이미 받아들여 고쳤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참고: 6.30.2016& 7. 20.2016년 2번) 이 외에 다른 사역들은 모두 건강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그
글을 시작하며필자는 김성로 목사의 이단적 부활사상을 비판해 온 정이철 목사에 대해, 미 남침례교 긴급 이단대책 위원장이라고 하는 이재위목사가 쓴 “정이철 목사 5가지 핵심적 이단사상들”을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수준 있게 보이기 위해 멋을 부리며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만, 수준 이하의 글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예 아무 것도 모르고 휘갈긴 낙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물론 이재위 목사가 이제 겨우 2년차 목사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내공이 어린아이 수준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고수 같은 오만함을 염두에 둔다면 아마 이재위 목사는 어린아이 같은 자신의 내공 수준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먼저 산전수전 다 겪은 선배로서 한 마
들어가는 말성령의 은사는 중지되었는가? 아니면, 지금도 왕성하게 계속되고 있는가? 또 이것도 아니라면, 계속 소멸되고 있는가?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현대교회에서 거의 합법적으로 무분별하게 난무하고 있는 방언기도의 거짓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문제가 규명되지 않은 채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이 부분에 대해 바울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고전13:10-13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은사 중지론자들은 고전13: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에서 “온전한 것”을 정경의 완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성령의 은사는 이미 중단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순절주의자
거짓 방언은 통역의 은사로, 거짓 예언은 영분별 은사로 분별 한다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이 본문을 29절의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와 연결시켜서 보면, 두 본문이 서로 같은 구조로 된 같은 성격의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언하는 자들이 둘이나 셋이 말할 때 다른 이들이 이 예언을 분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 예언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27절에서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방언을 말하고 한 사람은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거짓 방언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이제 문제의 본문인
고린도교회에는 왜 방언과 통역의 은사가 있었을까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의 은사 목록에는 “방언 말함”의 은사와 함께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가 나온다. 통역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가 시행되었을 때 필요한 보조적인 은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언의 은사가 있는 곳에 꼭 통역의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을 보면 오순절 날 예루살렘, 고넬료의 집, 에베소 지역에서 방언이 있었지만, 그 방언들이 통역된 적은 없었다. 만약 이 경우에 고린도전서 14장 28절의 바울의 가르침, 즉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사람들 앞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서 하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한 사도행전의 방언들은 통역이 없었으므로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은사 목록에 나오는 은사의 순서를 놓고 방언 폐기론자들은 그 순서가 은사의 우열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사 목록의 맨 나중에 위치한 방언은, 방언 통역을 포함해서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열등한 은사라는 것이다.1) 그러나 반대로 오순절주의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2)어느 편의 주장이 옳을까? 불행하게도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장 8-10절과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 전후에서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들은 모두 귀중한 은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틀림없는 사실 한 가지는 은사 목록 맨 나중에 있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열등한 은사라는 방언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로 설명했듯이, 몸에 붙어 있는 지체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한 의도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면서 무엇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앗수르 방언인가? 아니다. 바울의 관심은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예언으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앗수르를 보내어 심판하실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예언)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앗수르 방언1)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앗수르 방언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지라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선지자의 예언(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들어가는 말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악’으로 규정하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엄한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21-25절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사야 당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섰던 이스라엘을 보여주면서, 고린도 교회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빠져있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21절에서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까닭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정황이 이사야 당시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정황과 흡사하기 때문이다.본문 해석의 난제와 오석"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바울은 방언기도를 한 적이 없다. 위 본문에서 바울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방언을 더 많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1)하듯이 방언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고린도교회의 방언기도와 전혀 다른 것임을 선언하기 위함이다.바울이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방언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방언(외국어)이다. 본문에서 “방언을 더 말하므로”는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 부딪히면서 이들에게 방언으로 복음을 전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자신이 경험한
글을 열며필자는 에서 조덕영 교수의 글들을 읽고서야 유석근 목사의 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조덕영 교수의 학문의 깊이와 그의 신실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바이기에, 필자는 에 대한 호기심과 또 목회자로서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유석근 목사의 을 읽기 시작했다.그러나 필자는 그 책을 읽는 동안에 미세먼지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것 이상으로 견디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적어도 필자에게는 fact가 없는 성경 이야기는, 매연을 들이마시는 것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에 몇 번이고 책을 던져버릴까 했지만, 사명감으로 이 책에 미혹된 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한 기침을 계속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영과 마음과 육체를 다 동원하는 전인격적인 기도(기도하는 자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하는 바른 기도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상적으로 기도할 때, “성령으로, 성령 안에서”라는 수식어는 더러 쓰지만(엡6:18; 유20절) “영으로”라는 수식어는 굳이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음과 육체와 함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이제라도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기도가 무슨 특별한 기도라도 되는 것처럼 “영으로 기도한다.”는 거짓말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는가를 깨닫고, 영과
글을 열며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4-15).위의 본문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바울을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변호하는데 쾌재를 부르며 사용하는 본문이다. 반면에 은사중지론자들에게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오순절주의자들의 유력한 증인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순절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당혹스러운 악재로 작용한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차라리 이 본문은 없었으면 좋을 텐데........’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그러나 이 본문은 오히려 방언의 불편한 진실을 밝히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고린도전서 14장 2절, 4a절을 특징으로 하는 방언은 왜 하면 안 되는가? 고린도전서 14장 2, 4a절로 설명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통역할 수 없는 불소통의 방언이다. 그러므로 이 방언은 교회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짓 방언이다.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고 말함으로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4a절에서도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고 말함으로, 이들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과는 무관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고린도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이 심각한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5절을 근거로, 바울은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만큼은 너무 귀중한 은사이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다 말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1)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마추어적인 성경 해석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2)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전후 문맥도 고려하지 않은 채 본문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정말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했는지 전후 문맥을 통해 살펴보자.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5).여기서 먼저 살필 것은, 본문에 언급된 ‘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나 고린도 교회에서나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인간의 언어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영음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의 영음 방언은 성령이 초대 교회에 주셨던 방언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 목록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가 있다는 것은, 방언이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1)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27절에서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도록 바울이 명령하고 있는 것도, 방언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이다.그럼에도 김동수 교수는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방언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앞뒤가 맞지 않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만큼은 개인의 덕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가?"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오순절주의자들은 위의 본문을 근거로 방언기도는 ‘개인의 덕을 세우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다른 모든 성령의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의 은사만큼은 통역하면 교회를 위하는 은사가 되고, 통역 없이 개인적으로 기도하면 개인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익한 은사라는 것이다.1)과연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외국어)과 함께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영음)도 있는가? 아니면 한 가지 방언(영음)으로 통역자가 있을 때는 교회의 덕을 세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