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성경에서 하늘과 땅은 당연히 창조되었다(창 1: 1; 2:4; 시 124:8). 그 가운데 창조의 땅을 나타내는 구약 단어는 10여 가지가 있다.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단어는 주로 “에레츠”("erets", 창 1:1, 2, 10, 11, 12, 15, 17, 20, 22, 24, 25, 26, 28, 30; 2:11, 12, 13)와 “아다마”(“adama", 창 1:25; 2:5, 6, 9)다. 1절의 땅(”erets")은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 ”지구“를 가리키기도 하고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연합시키려는 운동, 곧 교회연합운동이다. 1910년 영국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는 현대 에큐메니칼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25년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원리들의 적용에 관심을 가지고 일어난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과, 1927년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일어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은 연합하여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조직하였다.이와 같
특별계시특별계시는 창조 후에 말씀으로 온 계시이다. 말씀의 형태로 왔으므로 특별계시는 말씀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로는 자기의 경륜과 작정을 다 알리실 수가 없었다. 일반계시로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와 권능을 알리셨고 그의 존재와 창조사역을 알리셨다. 그러나 일반계시로는 자기의 작정과 구원경륜 또 인류역사의 진행과 역사의 종말을 알리실 수 없으므로 말씀의 형태로 인류에게 계시하셨다. 이 계시는 계시를 받으면 알 수 있는 합리적인 존재들에게 하셨고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직접 적용되는 백성에게 이루어졌다.특별계시는 비구속적 특별계시
하나님은 창조와 인간의 구조로 하나님을 계시하게 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구조와 창조 자체가 하나님을 계시한다. 또 종족들에게 도덕법을 주셔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며 상을 주시는 자임을 알게 하셨다. 또 각 개인의 양심에서 말씀하시고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일반계시의 가치와 의의일반계시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죄 때문에 일반계시가 구원에 이르는 일을 하지 못한다. 또 일반계시는 구원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생활에서 일정한 역할을 감당한다.모든 종교의 기초모든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만 해도 작은 세력이었으나 20세기 말에는 큰 세력이 되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단지 몇몇 신학자의 문제가 아니고 대교단들의 목사들 다수의 문제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일찍이 배교적이었고 미국의 교회들도 1920년대 이후 점점 포용적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며, 성경말씀을 믿고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교회들은 수적으로 소수인 것 같다.100년 전에 주로 미국교회의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들의 영향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
계시의 필요성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성으로 직접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한 영이시고 절대적인 인격이시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뜻, 경륜과 작정을 알리셔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그가 자신을 알리시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계시는 인간이 직접 알 수 없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알리심이어서 자기 현시로 표현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계시는 필수적이다. 우리가 지성으로 하나님을 직접 접근하여 알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는 계시에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핵심적 진리들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자유주의 신학은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성경의 기본적 진리를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 사상의 유산에 불과하다”고 했다. 폴 틸리히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라고 했다. 또 오스
섭리 속의 악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악을 허락하신 것일까? 라이프니츠는 주로 철학의 관점에서 신정론(神正論) 문제를 처음 다루었으나 악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의 부분은 주로 섭리론(攝理論)에서 나타났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은 섭리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천지와 모든 피조물들을 붙드시며 잎사귀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음식과 식수, 건강과 병, 풍부와 가난 등 모든 것들을 우연이 아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손에 의해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세계를 다스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작정을 알리심으로 이해해야 바르다. 하나님의 계시는 자기를 알리심이다. 하나님의 자기 현지로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권능, 지혜, 경륜, 창조사역과 구원계획,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알리심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계획대로 이루시고 그것을 알리셨다. 그러므로 그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나님이 알리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감추어진 신비 곧 하나님의 자기 존재와 뜻을 알리심이 계시이다.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자기의 존재, 권능과 지혜, 또 영광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로 인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성경의 핵심적 교리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대표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그의 책에서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말했다. 또 폴 틸리히는 조직신학이라는 그의 책
현재 우리의 하나님 지식은 완성으로 가고 있는 신학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하나님 지식이 완전하지 못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 신 지식이 참이 아니라거나 거짓이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참 지식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거울을 통하여 보는 것과 같고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어서(고전 15:13:12) 완성을 필요로 한다.이 완성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서 마주 볼 때 우리의 하나님 지식이 완성에 이를 것이다. 인류의 목표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첫 인류가 역사의 시작에서 창조주 하나님 모시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끝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다. 역사의 끝은 허무가 아니고 처음 창조경륜대로
기독교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더욱이,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이 사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속성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거짓 증거를 미워하시고(출 20:16; 잠 6:16-19) 또 불변하시다(시 102:26-27).또한 기독교 교리들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에 기초하였고 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내용은 확실하고 불변적일 수밖에 없다. 또 기독교 복음은 많은 기적들과 목격자들의 증언들에 의해 확증되었다(행 2:22; 요 21:24). 기적은 어떤 진리를 확증하는 표가 되기 때문에 ‘표적’(sign)이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보고 전한 바를 순교의 피
교회의 첫 신앙고백은 주 예수였다(요 20:18.20,28; 21:7,15-16; 행 1:6,21,24; 2:36,16:31). 그리고 모든 사도의 가르침을 믿었다. 그러다가 교회의 진행과 함께 이단의 발생으로 우리의 믿음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바른 믿음이 무엇이며, 유사하면서도 바른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바른 믿음이 아닌 조항들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바른 믿음의 조항들을 정하는 과정에서 사도신경과 신앙의 규범이 공식화되어 이단을 식별하고 바른 신앙을 지키며 교회 교육을 위해서
1. 구원 받은 롯그렇습니다. 롯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비록 삼촌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요셉, 모세처럼 믿음의 모범 반열(히 11장)에 그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으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벧후 2:7).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을 롯을 통해 알 수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선물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2. 롯의 배경롯은 아브라함과 나홀의 형제였던 하란의 아들로 아브라함의 조카(창 11: 27, 31)였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우상을 섬기던 우르 땅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
비판>목사님의 율법 이해에는 매우 문제가 많습니다. 괜한 문제를 더 일으키지 말고 이제 조용하십시오. 목사님의 문제점은 율법과 영생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고신의 우병훈 교수님도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인간이 성실하게 반응하고 순종해야, 즉 율법을 잘 지켜야 영생의 언약이 완성된다고 잘 말했는데, 목사님은 그 교수님에게 괜히 시비를 걸었습니다. 회중파 청교도 신학이 말하는 대로, 아담이 십계명과 율법을 지켰으면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책들을 폭넓게 보시고 많은 이론들들 다양하게 공부하기 바랍니다. 회중파 청교도 신학자들의 구원론은 개혁주의 정통입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고 하나님의 예정의 실행입니다. 개혁신학의 ‘오직 믿음’이라는 전제 속에 다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아담은 십
신학은 중생인이 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 또 중생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한 진리를 문장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전체를 조직하고 체계화한다. 이 일이 신학작업이다.하나님이 말씀하시므로 인간은 들어야 한다. 그 들음이 바로 믿음이요, 그 말씀하신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 계시를 들음으로 신학한다. 그러므로 사변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고 듣는 말씀에서 사고한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 믿음에 근거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사고한다. 그러므로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것을 주입하여 사고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다. 내 이성이 신학 구성에 공헌하는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므로 듣고 그 말
질문>호세아서 13장 14절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고 주석을 찾아보아도 명쾌하지 않아 전혀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있어 문의 드립니다.1. 개역개정 :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호13:14)2. KJV : I will ransom them from the power of the grave; I will redeem them from death: O death, I will be thy plagues; O grave, I will be thy destruction: repentance shall be hid from mine eyes.3. 표준새번역(개정): 내가
믿음 = 하나님의 지식 수납의 손하나님을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 사역, 성품, 구원을 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르고 확실하게 안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은 구원이 창조주 자신의 사역임을 아는 것이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다. 또 믿음으로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시고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심을 확신 있게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 지식은 믿음으로 얻고 믿음으로 확신한다. 믿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믿음의 본성이처럼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믿음이 지식 획득의 길이다. 믿음은 본래 논증
1. 복음주의가 무엇인가?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마셀러스 킥은, “역사적으로, 복음주의자는 신앙과 행위의 법칙으로서 성경의 절대적 우위성(sola scriptura)과 값없는 은혜로(sola gratia) 믿음으로 얻는 의롭다 하심을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믿는 개신교회들을 복음주의라고 부른 것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부정 혹은 왜곡시키고 성례나 신자의 공로적 선행을 강조했던 천주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는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입장, 곧 성경적 기독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20
통상 조직신학은 성경계시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통일 종합하는 신학적 작업으로 여긴다. 그러나 교의신학은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할 때 교회의 교리들의 안내를 따라 작업을 한다. 이 교리들은 고대교회의 기본 교리들이다. 그러나 체계화 작업을 할 때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들(credo)을 참조하고 조명을 받는다.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들은 고대교회의 교리들을 수납함과 동시에 구원 얻는 길에 특히 강조를 두었다. 이 신앙고백들은 고대교회의 교리들과 같은 구속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여도 교리적 성격을 갖는다. 루터교회는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삼았다. 개혁교회는 칭의교리를 근본교리로 받지만 성경의 권위를 더 중시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고대교회의 교리들은 보편교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