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2

박영돈 교수의 책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의 2장 “성령의 얼굴에 나타나는 거룩한 수줍음”을 정독했다. 2장에서 박영돈 교수가 이야기하는 성령에 대한 내용은 매우 아리송하다. 이런 책이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그렇게 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성령의 거룩한 수줍음?

2장에서 박영돈 교수의 이야기는 성령의 성품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는 성령의 성품을 ‘거룩한 수줍음’이라고 표현했다. 성령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시는 분임을 이야기 하는 내용이다.

“성령의 얼굴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룩한 수줍음’이라고 할 수 있다.”(57 페이지)

박영돈 교수는 예수님도 수줍어하는 분이고 하나님 아버지도 수줍어하는 분이라고 했다.

“이 거룩한 수줍음은 예수님의 특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셨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마저 수줍어하신다. 성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 분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57,58 페이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수줍음의 하나님으로 이야기하는 박영돈 교수의 시도는 과연 적절할까? 성령께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성자를 믿게 만드시고, 성자께서는 영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고, 성부께서도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박영돈 교수의 이야기는 맞다. 그렇다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을 ‘수줍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른 장엄한 성품들이 가리워지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박영돈 교수처럼 소설쓰듯이 성령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전도를 훼방하는 바예수를 꾸짖고 저주하여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성령(13:11)의 성품은 ‘깡다구’로, 헌금드리는 척 하면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속인 아나니아 부부를 죽이신 성령의 성품은 ‘응징자'로, 하나님께 올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며 자신을 신처럼 높인 헤롯왕을 충으로 죽이신 하나님의 성품은 ‘복수혈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어떤 옛날 어른은 신학자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지 말고 예전부터 있던 것을 잘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새롭게 소설 쓰듯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박영돈 교수가 들어야 할 말이다. 평신도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발상이니 좋았을 것이나, 그 때문에 독자들에게 성령에 대하 그릇된 이미지가 심기워질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 더욱 조심했어야 했다. 이미 이전의 탁월한 개혁신학자들에 의해 성령의 성품에 관한 좋은 표현들이 충분하게 개발되었고 축적되어 있다. 그것만 가르쳐도 부족하지 않을 것인데, 소설처럼 자신의 새 방법을 도모한다는 것은 위험스럽다.


성령 신학자 박영돈의 성령운동

아마 독자들은 이 책의 2장을 읽으면서 큰 혼란을 경험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영돈 교수가 은사주의자들의 장기인 ‘성령운동’에 대해 더 헷갈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상은 특수하고 전문적이고 고유한 용어를 동반한다. 그래서 어떤 사상을 배우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용어를 배우는 것이다. 그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과 관련된 용어부터 배격해야 한다. 박영돈 교수는 개혁주의 성령론을 전공한 조직신학자이다. 마땅히 교회를 헤치는 이단운동과 관련된 나쁜 용어들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불건전한 용어들이 2장에서 대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성령운동’(31회)
‘성령체험’(14회)
‘성령사역’(2회)
‘은사집회’(1회)
‘성령의 기름부음’(1회)
‘영성운동’(1회)
‘성령집회’(5회)
‘기독교 영성’(1회)
‘성령 사역자’(1회)

바로 앞에서 박영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령의 성품을 ‘거룩한 수줍음’이라고 했다. 성령이 역하하시면 성령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느껴진다는 진리를 박영돈 자신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나열된 나쁜 용어들 대부분은 그것과 상반된다. 이런 말들은 성령이 역사하실 때 성령은 없는 것 같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난다는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는 말들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자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느껴지니 성령은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주의 영'이라고 성경에 나온다. 그러나 '성령체험'이라는 용어는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느껴진다는 사상을 내포하는 말이다. 성령체험이라는 말은 성령과 함께 신체적, 감각적 느낌이 일어난다는 불건전한 개념을 담고 있다. 그래서 특히 개혁주의 신학자라면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한다. '성령사역', '성령운동'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은사집회'란 은사체험을 목적으로 모여서 기도하거나 안수하는 등의 행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성경은 모든 은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하신다. 은사를 받고 체험하기 위한 방법이나 예배는 기독교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개혁주의 성령론은 전공하신 신학자가 이 모양일까?

‘영성’이라는 말도 개혁주의 전통에서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영성이라는 말은 대략 두 줄기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천주교가 이방 종교의 명상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관상기도와 관련된 개념이다. 실제로 한국 교회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동원, 강준민, 최일도 등의 관상기도 운동(래노바래 운동) 관련자들이다. 또 하나는 오순절 운동에서 시작하여 광범위하게 전파된 성령체험 은사운동과 관련된 개념이다. 거짓 방언, 성령재세례, 환상보기 및 음성듣기, 금이빨 등의 거짓 성령의 이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체험을 영성이라고 표현한다.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영성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경건’이라고 표현한다. 성경에 수 없이 등장하는 경건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지 못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왜 박영돈 교수는 개혁주의 신앙전통에서 소중히 여기는 경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영성이라는 말을 쓰는 것인가?


성령운동 해야야 해? 말아야 해?

“또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마치 우리가 우리 뜻대로 성령을 조종하고 운행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하기에 매우 부적합한 용어다”(59 페이지)

박영돈 교수는 이처럼 스스로 성령운동이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쓰지를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 후보터 더욱 본격적으로 이런 용어들로 자신의 책을 도배하였다. 박영돈 교수의 다음의 말들을 보면 더욱 헷갈린다.  

“한국 교회에는 성령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종교적인 야욕을 채우려는 이들은 많아도 ...”(59 페이지)

과연 성령이 누구에게 이용당하시는 분인가? 성령을 이용하여 종교적 야욕을 채울 수있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가? 이상한 말이다. 지금 박영돈 교수는 올바른 성령운동이 가능하다고 은근하게 주장하고 있다. 성령운동이라는 것을 통해 마귀의 영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역사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박영돈은 성령을 이상하게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성령운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분명한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복음은 왜곡되고 ...”(64 페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는 성령운동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이 있을가? 성경의 어느 사도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는 성령운동을 했었나? 사도행전의 성령충만했던 제자들과 사도들이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성령운동을 했었던가? 그들은 다만 보이지 않는 성령을 의지하여 항상 말씀을 전파했고, 그러면 보이지 않는 성령이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것이 성령운동이었나? 박영돈 교수의 소설 성령론은 정말 헷갈리게 만든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기적이나 은사를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십자가에 대한 초점을 흐리게 한다는데 있다.”(64 페이지)

성령운동은 기적과 은사를 인위적으로 뽑아내려 하는 운동이다. 그 발상 자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성령운동이라는 말과 행태를 망령되게 여긴다. 박영돈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정말 기적과 은사를 뽑아내는데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으면 성령운동이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일부 성령운동이나 성령 사역자들에게서 성령의 인격성을 손상시킴으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이단자의 얼굴이 자주 나타난다.”(74 페이지)

이 말을 조금 바꾸면, 박영돈 교수는 성령운동을 부드럽게 하거나 조금 조심하면 성령의 인격성이 손상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성령의 성품이 ‘거룩한 수줍음’이라며 성령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하신다고 했다. 왜 이제 딴 소리를 할까? ‘일부의 성령운동가들과 성령 사역자들’이 성령의 인격성을 손상시킨다고 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성령운동가들은 성령의 성품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체 성령운동, 성령 사역자는 무엇인가? 피리 소리를 듣고 항아리에서 고개를 쳐드는 인도의 코브라처럼 성령이 사람의 구슬림을 따라 일하신다는 사상이다. 박 교수는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성령의 인격성을 손상시키는 것임을 모르는 모양이다.


구렁이인가? 일그러진 생선인가? 

“이런 성령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성취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기 쉽다.”(65 페이지)

과연 성령이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성취하는 방편으로 이용될 수도 있는 분인가? 정말 어이없는 소리이다. 성령이 강아지도 아니고 바보도 아닌데,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정말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채워주는 일을 했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 성령을 가장하는 마귀였을 것이다. 마귀가 한 일을 왜 성령이 했다고 하는가? 박 교수는 참 이상한 분이다.

“권력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권능만큰 위험한 것이 없다. 능력이 마귀적으로 남용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것이 성령 집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다 ... 사람들을 제압하고 조종하기에 초자연적 현상과 기적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67, 68 페이지)

박 교수의 말은 정말 어이없다. 과연 성령께서 자기의 능력이 마귀적으로 남용되도록 당하시는 분일까?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성령의 역사가 인간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 능력이 마귀적으로 남용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다. 정말 성령이 인간에게 이용당하겠는가? 지금 박영돈은 성령을 가장하는 마귀가 벌이는 미혹을 전혀 감지하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초월적인 기사와 능력을 다루는 이들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가장 끔찍한 죄를 범할 수 있다. ‘능력을 마귀화’하는 범죄에 빠질 수 있다. 그 능력이 거룩한 성령의 능력일 때 그 범죄의 심각성을 극에 달한다.”(70 페이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나타난 성령의 능력이 마귀적인 능력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가?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이 바보 멍청이가 아니다. 어찌 성령의 능력이 마귀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일까? 사탄이 베푸는 미혹을 알아보지 못하고 끝까지 성령의 역사라고 변호하는 박영돈은 신학교 환경에 적합하게 특화된 마귀의 스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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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