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요한 지렁이 잡기(4)

시작하며

[지렁이의 기도]는 시작(프롤로그)에서 부터, 성령이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면서 “아들이다. 됐냐?”라고 했다든지, 영혼이 내 몸 밖을 빠져나가 하늘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든지, 성령의 불이 너무 강렬해서 집에 불이 난 줄 착각하고 “불이야!”라고 정신없이 외쳤다든지, 군목 시절에 군부대 낡은 건물에서 전기 스위치를 작동하지도 않았는데,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에 맞춰서 전기불이 들어왔다든지, 어느 것 하나 상식적이 않은, 아니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런 까닭에 정상적인 신앙의 소유자라면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거의 예외 없이 ‘어, 무언가 좀 이상한데!’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이내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상하다는 의심을 접고 계속 책을 읽게 된다. 왜냐하면 [지렁이의 기도]에는 저자의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너무나도 탁월한 성경 이야기들도 있기 때문이다.

[지렁이의 기도]의 구조를 보면, 김요한 목사의 책 전개 방식은 특이하다 못해 기이하다. 왜냐하면 보통은 자신의 이야기가 비성경적이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한다. 그러나 김요한 목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지렁이의 기도]에서 자신의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성경을 소재로 하여 탁월한 신학적인 진술들을 하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성경 이야기와 자신의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참 이상하기는 하지만, 이런 전개 방식은 김요한 목사의 계산된 수법으로 보인다.

김요한 목사의 이런 수법(자신의 이야기들 사이에 성경 이야기를 하는 수법)은 다음에 전개되는 자신의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성경적이라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저자의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를 이상하게 생각했다가도 ‘그럼 그렇지. 이 분은 절대로 이상한 분이 아니야. 성경을 이렇게 많이 알고, 또 이렇게 탁월하게 성경을 설명하시는데 절대로 이상한 소리를 할 리가 없지’ 하면서 의심을 지우고 계속 [지렁이의 기도]를 읽게 된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에 대한 비성경적인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그 사이사이에 성경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연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진술한 성경 이야기 때문에 당할 수 있는 비판을 피하는 효과까지 얻으려 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성경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 사이사이에 있는 성경 이야기를 근거로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를 비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실상 성경이 자신의 이상한 점치기를 성령의 역사로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아예 성경과 자신의 점치기를 직접 연결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가 집요하게 성경 이야기를 자신의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 사이사이에서 하고 있는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하는 성경 이야기 속에 자신의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를 성경적인 것처럼 위장하는 메시지를 숨겨 놓기 위해서이다. 그는 성경 이야기 속에 숨겨놓은 왜곡된 비성경적인 장치로, 자신의 점치는 이야기가 지극히 성경적인 성령의 역사임을 독자들에게 믿도록 최면을 걸고 있다.

김요한 목사는 자신의 뛰어난 성경적인 진술 속에 독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살짝 진리를 비틀어 놓은 사탄의 메시지를 숨겨놓음으로써,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그 다음에 있는 이상한 점치기 이야기도 바로 전에 읽었던 성경과 같은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유도한다. 김요한 목사의 이런 사탄적인 수법이 가장 노골적으로 숨어 있는 Chapter가 바로 <03 기도-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 이다. 그는 여기서 결정적인 사탄의 메시지를 “페레코레시스” 함정 속에 숨겨 놓고 있다.
 

지렁이의 “페리코레시스” 함정 파기 예비 작업: <02 기도 공부>

김요한 목사는 <03 기도-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사탄의 메시지를 숨겨놓은 “페리코레시스” 함정을 파기 전에, 먼저 <02 기도 공부>에서 독자들이 “페리코레시스”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도록 예비 작업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렁이의 “페리코레시스” 함정은 <02 기도 공부>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는 <02 기도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공회 석좌교수였던 신영복 선생의 “공부”에 대한 가르침(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池)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을 소개한다."(지렁이의 기도, p.50)

그러고 나서 그는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장 심오한 공부는 ‘기도 공부’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말로 ‘기도’에 ‘공부’를 슬쩍 얹어 놓으므로, 기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신영복 선생의 ‘공부’에 대한 정의를 근거삼아 자신이 말하고 싶은 사탄적인 ‘기도’의 정의(왜냐하면 기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핵심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도는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영원과 시간을 연결하는 사다리다. 기도의 사다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내재의 세상에서 영원의 세계로, 시간의 영역에서 초월의 공간으로 들어설 수 없다)를 내린다.(지렁이의 기도, p.50)

마치 신영복 선생의 ‘공부의 정의’가 기독교의 ‘기도의 정의’와 같은 성격의 것인 양 말이다. 그러나 이런 수법은 사탄의 하수인들이 흔히 쓰는 비열한 수법들 중의 하나이다. 김요한 목사는 <프롤로그>에서도 ‘파스칼의 메모’를 이용해서 이와 유사한 비열한 장난을 쳤다.

그렇다면 김요한 목사는 왜 굳이 이런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서 기도를 설명하려는 것일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양한 기도의 가르침이 있는 성경에서 ‘기도의 정의’를 찾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가 성경에서 기도의 정의를 찾지 않고, 신영복 선생의 ‘공부의 정의’를 이용해서 기도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다음 장인 <03 기도-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페리코레시스” 함정을 숨겨 놓은 자신의 ‘기도의 정의’를 성경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02 기도 공부>에서 신영복 교수의 ‘공부의 정의’로, 사탄적인 기도의 정의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요한 목사가 [지렁이의 기도]에서 말하는 ‘기도의 정의’는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정의’가 아니라 무서운 사탄의 속삭임이다. 어떻게 기도가 하늘과 땅을 잇는 핵심 사건일 수 있는가? 하늘과 땅을 잇는 핵심 사건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을 잇는 사다리는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진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십자가로 인해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기도는, 십자가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이다. 그러므로 김요한 목사가 말하는 “기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핵심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도는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영원과 시간을 연결하는 사다리다.”(물론 이 한 문장 자체로는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다음 문장인 “그렇다. 기도는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영원과 시간을 연결하는 사다리다. 기도의 사다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내재의 세상에서 영원의 세계로, 시간의 영역에서 초월의 공간으로 들어설 수 없다”를 보면 앞에서 언급한 사다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올라가 신이 되는 통로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탄의 메시지라는 것이다)라는 ‘기도의 정의’는 사실상 십자가를 부인하는 사탄의 메시지일 수밖에 없다.

김요한 목사는 기도라는 수단(사다리)을 통해서 인간이 시간의 영역에서 초월의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의 이 단언은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신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 붉은 용의 주문이다. 생각해 보라! 기도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기도로 하나님이 계신 초월의 공간으로 들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기도할 때에도 어쩔 수 없이 여전히 하늘이 아닌 땅에 있으며, 초월의 세계가 아닌 시간의 영역인 내재의 세상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계신 초월의 공간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땅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셨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어느 누구도, 기도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수단으로도 초월의 공간으로 들어가 신과 대면하거나 신처럼 군림한 자는 없다(고후12:2도 인간이 초월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 초월하신 하나님이 불, 구름 등의 현현으로 땅에 있는 인간을 만나주셔서, 인간이 잠시나마 초월의 세계를 맛볼 수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김요한 목사가 말하는 신이 되는 붉은 용의 주문은 아니라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땅에 있다할지라도, 또 시간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재의 세상에 있다할지라도, 기도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으며, 또 기도의 응답으로 그분이 행하시는 초월적인 능력을 시간의 제한을 받는 땅에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렁이의 기도]에서 결정적인 사탄의 함정은 “페리코레시스”이다

<03 기도-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김요한 목사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인 진술은 매우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탁월하기 그지없다. 과거에는 두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 ‘양태론’이나 ‘삼신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수두룩한 현실을 감안하면, 김요한 목사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설명은 특히 더 돋보인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그의 탁월한 성경 실력에 놀라며, [지렁이의 기도]에 환호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김요한 목사가 ‘기도’를 이야기하면서 왜 ‘삼위일체’ 교리를 들고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김요한 목사의 주장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으면 인간이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성립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성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져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한 죄의 담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며, 성령 하나님이 인간에게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꼭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아브라함이나 어린 사무엘, 다윗, 또 시편 기자들과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능하게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며, 지금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래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분들도 기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는 ‘기도 이야기’를 하면서 알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닌 ‘삼위일체’ 교리를 왜 들고 나온 것일까? 필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첫째는,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는 자신의 신학적인 실력을 과시함으로써 책에서 하고 있는 자신의 점치는 이야기를 성경적인 것처럼 독자들의 신뢰를 얻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만큼 유리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03 기도-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더욱 정교하게 그리고 독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점진적으로 “페리코레시스” 함정을 만들어 가기 위함이다. 이것이 김요한 목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렁이의 기도]에서 들먹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김요한 목사는 ‘다니엘 L. 밀리오리’의 글을 인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페리코레시스”라는 헬라어 단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명사 페리코레시스는 “회오리”(돌개바람) 혹은 “회전”(빙빙 돌기)을 의미하며, 동사 “페리코데오”는 “빙빙 돌다”, “빙빙 돌며 춤추다”, “순환하다”, “껴안다”, “포옹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구별되는 위격적 존재인 동시에 서로 간에 페리코레시스적 순환을 통해 상호 침투, 내주, 환대를 행하신다. 즉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은 서로 안에 ‘내주하고’, 서로에게 ‘침투하며’, 서로를 ‘둘러싸고’ 참으로 아름다운 신적인 춤 속에서 하나를 이룬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요17:21)(지렁이의 기도, p.62)

김요한 목사가 힘주어 강조하며, 수시로 집요하게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뜻하는 헬라어이다. 이 헬라어는 막시무스(580-662)가 최초로 성자의 양성 연합에서 오는 사역의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사용했으며, 그 후에 다메섹 요한(670-750)이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삼위일체론에 공재(circumincessio)의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 후 오랫동안 “페리코레시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유행처럼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이 단어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자는 거의 없다. 물론 지금도 불건전한 ‘성령론’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오순절 계통이나 신사도주의, 또 이상한 점치기를 성령의 역사라고 거짓말하는 김요한 목사 같은 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할 때, 마치 진리라도 되는 양 “페리코레시스”를 즐겨 사용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페리코레시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단어이다. 그러나 반대로 독자들에게 [지렁이의 기도]로 神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가장 적절한 단어이기도 하다{참고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부언하면, 김요한 목사가 사용한 ‘페레코레시스’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용하는 다른 어떤 말로도, 또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물질(예를 들면, 물, 얼음, 수증기, 또는 나무, 가지, 잎, 뿌리 등의 이야기들)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는 우주 안에 어떤 피조 세계에서도 발견될 수 없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하나님만의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할 때에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러면 김요한 목사가 <03 기도-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페리코레시스”를 동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사실상 김요한 목사는 독자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 이해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가 노리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설명을 빙자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페리코레시스”가 성경적인 용어임을 믿게 하고, 더 나아가 기도를 언급할 때 “페리코레시스”를 적절히 반복해서 사용하므로(지렁이의 기도, pp.65, 69, 72, 112, 201 등에서), 기도하는 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상호공재”, “상호침투”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음모를 꾸미기 위함이다. 그러면 독자들은 “페리코레시스” 함정에 빠져서 [지렁이의 기도]에서 소개하고 있는 김요한 목사의 이상한 점치기나 기적 행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한 결과임을 의심 없이 믿게 될 것이다.

이제 김요한 목사가 만들어 놓은 “페리코레시스” 함정의 음모를 파헤쳐 보자. 아래 본문은 김요한 목사가 “페리코레시스” 함정을 만들때 가장 먼저 이용한 성경 구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위 본문의 예수님의 기도는 김요한 목사의 “페리코레시스”처럼 “우리가 서로 ’상호공재‘, ’상호침투‘하는 것처럼 그들도 다 하나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상호공재‘, ’상호침투‘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미의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께서 성령강림을 언급하시면서 말씀하신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 14:20)를 김요한의 “페리코레시스”의 논리대로 해석한다면, 그 날(오순절 날)이 되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처럼 ‘상호침투’하고 ‘상호공재’의 관계가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여기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상호공재’하거나 ‘상호침투’한다는 의미가 아님은 분명하다. 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6)는 바울의 외침도,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하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김요한 목사의 “페리코레시스” 함정에 속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간이 하나님(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어떤 경우에도 “페리코레시스”적, 즉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안에 있다”는 표현은 ‘인격적인 연합을 통하여 하나 됨’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서로 생명의 사귐’이 있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특히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전적인 의존을 내포한다. 따라서 김요한 목사가 ‘다니엘 L. 밀리오리’의 글을 인용하여 내린 ‘기도의 정의’는 매우 부적절한 사탄의 메시지일 수밖에 없다.

그는 요17:21 앞부분을 제시하며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페리코레시스’적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고 나서 ‘다니엘 L. 밀리오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은 남을 지배하지 않고, 타자와 함께 삶을 공유하는 데 있다”는 말을 인용하여, 독자가 느끼지 못하도록 ‘인간도 하나님과 ‘페리코레시스’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삶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기도’에 적용시킨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 교리가 다름 아닌 기도의 고백 속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애당초 딱딱하고 난해한 탁상공론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풍성한 기도 생활을 위해 주어졌다."(지렁이의 기도, p.66)

성경에서 수많은 기도의 예들 중에 삼위일체 교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거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김요한 목사는 “페리코레시스” 함정을 만들기 위하여, 물론 삼위일체 교리와 기도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필연적인 관련이 있는 것처럼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는 “페리코레시스” 함정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려고 ‘스텐츠 그렌츠’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또한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성부에 대한 성자의 영원한 응답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아들에 참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페리코레시스적 삶의 역동성에 참여한다."(지렁이의 기도, p.68)

김요한 목사는 ‘’스텐츠 그렌츠의 말을 징검다리로 해서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사탄적인 결론을 도출해 낸다. 이것야말로 그가 <03 기도-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페리코레시스”로 설명하는 진짜 이유이며, 목적이다.

"특별히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삶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다....(중략).....따라서 기도야말로 삼위일체적 삶에 참여하는 가장 훌륭한 방정식이다."(지렁이의 기도, p.69)

위에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다.”라고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김요한 목사는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삶에 참여하여”를 전제함으로써, 놀랍게도 기도라는 사다리를 통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에 참여하는 신으로 승격시킨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 사탄의 메시지를 마치 진리인양 속이기 위해, 뻔뻔하게도 성경을 가지고 들먹인다.

여기서 그가 들먹인 성경은 요13:1-20의 흔히 세족식으로 알려진 본문이다. 그는 이 본문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난 뒤에,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나누시던 사랑의 페리코레시스적 환대와 섬김을, 이제는 성육신하신 성자께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서 몸소 시연하신다”(지렁이의 기도, p.72)는 말로, 드디어 하나님이신 성자와 인간인 제자들의 관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관계와 같은 차원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 김요한 목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요1:1을 들먹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그리고 성령)는 마치 연인이 얼굴을 마주하고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처럼, 독특한 페레코레시스적 친교 속에서 상호 침투, 내주, 환대의 행위를 반복해 오셨다. 이것이 영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중략).....성자 예수님은 그 신적 비밀 혹은 계시를 알려주러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요1:1에서 영원 전에 성부와 성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듯이, 요13:21 이하에서 예수님과 사랑하는 제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다른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교회의 참된 정체성이며, 신자가 누려야 할 기도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중략)....우리는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유비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과의 사랑과 환대와 친교를 맛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 비밀을 배울 수 있다."(지렁이의 기도, pp.72-73)

요13:21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제자에게 자신을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신 것을 가리켜, 김요한 목사가 “예수님과 사랑하는 제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비밀을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표현한 것은 의도적인 성경 왜곡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과 그의 가슴에 기댄 제자는 현재의 문제를 놓고 은밀하게 서로 대화한 것이지, 결코 하늘의 비밀을 나누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유비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과의 사랑과 환대와 친교를 맛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 비밀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의도적인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신령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방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삼위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므로 김요한 목사의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유비적으로 참여하여~”는 말은 저주받아 마땅한 신성모독이다.

또 “주시는 신적 비밀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 신성모독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신적 비밀은 인간이 듣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 듣고 배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신적 비밀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은 신적 비밀을 듣는 것으로서 그 비밀은 종결되지만, ‘신적 비밀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배운다’는 말은 ‘무엇을 배우면, 그것을 배운 자는 그것을 가르친 자와 똑같이 자신이 배운 것을 남에게 가르치거나 그대로 구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김요한 목사가 말하는 신적 비밀을 배운다는 [지렁이의 기도]는 결국 신이 될 수 있는 붉은 용의 주문이 되는 셈이며, 그것은 명백히 저주받아 마땅한 신성모독에 해당된다.

[지렁이의 기도]에서 소개된 그의 점치기 능력은 기도할 때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도라는 수련을 통해 신적 비밀을 배움으로써, 필요할 때마다 기도 중이 아니라도 성령의 음성을 통해 이미 배운 신적 비밀을 다른 이에게 말해 줄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그가 사람들에게 ‘태아의 성별이 아들이다, 어디로 이사 가야지 형통한다. 다음에는 아들 낳겠다, 당신의 딸이 좋은 직장에 취업할 거다. 몇 년 안에 당신의 남편이 크게 아플 거다’는 등의 점치기 행위들은 평소에 기도하면서 배운 신적 비밀 덕분이다. 다시 말하면 김요한 목사는 그가 평소에 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페리코레시스”적 관계 속에서 신적 비밀을 배우고 있으며,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유비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신처럼 신통방통한 점을 칠 수 있는 것이다.

김요한 목사는 드디어 <07 성령의 중보와 탄식을 힘입음>에서 기도하는 인간을 하나님과 동일선상에 놓는 신성모독을 노골적으로 감행한다.

“신약 성경 곳곳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과 함께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창조와 구원의 영이시다. 구원의 영으로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현재화하신다.”(지렁이의 기도, p.112)

여기까지는 훌륭한 진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진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진리의 영이시다”를 빼버렸다. 아마도 자신의 주인인 거짓 영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라는 참 진리를 참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위의 김요한 목사의 진술은 독자들을 미혹하는 연막이며, 마약이다. 그것은 “따라서” 이하의 그 다음 진술을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착시 현상을 노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며,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의 페리코레시스적 교통과 환대에 참여할 수 있다.”(지렁이의 기도, p.112)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또는 구원을 누린다”는 표현과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는 표현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실로 엄청난 의미의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응하는 피조물의 믿음의 태도를 말하지만, 후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신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요한 목사는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할 때 썼던 “페리코레시스”를 동일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설명하는데 사용함으로써, 처음 파놓은 “페리코레시스” 함정의 음모대로 드디어 독자들 몰래 피조물인 인간을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끼워 넣으므로 “신을 만드는 붉은 용의 주문”을 완성시킨다.
 

마치며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은 것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죄의 본능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사람들이 방언기도의 은사를 받으려고, 또 예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애쓰며 몸부림치는 것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죄의 본능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김요한 목사가 만들어낸 [지렁이의 기도]는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죄의 본능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한국교회가 [지렁이의 기도]에 열광하는 것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죄의 본능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기도는 미래를 알게 하는 점치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인간의 불확실한 미래를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는 능력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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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