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모두들 성경을 믿는다고 하며, 교회에 출석하며, 성도의 교제를 하며, 선교를 하며, 내적 치유를 하지만 구원의 체험을 한 사람은 없다. 구원의 체험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복음주의권 내부에서 구원의 도리를 입맛에 맞게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목사나 성도나 무지 속으로 들어가 헛된 약속으로 거짓된 평안함 속에 들어가 있다. 현대 한국교회에서 ‘당신은 구원의 체험이 어땠습니까?’라고 물으면 곧바로 ‘구원파’라고 낙인찍는다. 구원의 체험은 아무 것도 없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특히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한 사람들은 격한 구원의 체험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구원 받은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 감격도 없으며 구원 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바울이나 교회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거듭날 때 경험하는 걱정을 현대교회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종교개혁 시대의 목사나, 청교도 시대의 목사들이 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했는가? 무지한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에 그렇다. 참된 목사, 참된 교회를 분별해야 우리는 천성으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잘못된 가르침은 교회사 속에서 항상 인기 있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해하기 쉽고 편하고 따뜻하고 인정미가 넘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장의 좁은 길은 우리를 힘들게 하며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기 때문에 넓은 길을 택하는 것이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람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0-12)

진리를 믿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들, 심지어 진리를 듣지 못한 자들은 결국 심판에 이를 것이다. 이제 섞일 수 없는 두 신학이 섞이는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 또는 알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가 섞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행위구원론과 은혜교리가 섞인다. 두 개는 섞일 수 없는데 섞이고 있다.

문제는 섞이는 순간 어느 정도는 행위구원론이 되고 어느 정도는 은혜구원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행위구원론으로 바뀌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서 단 0.1%라도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면 불순하게 되어 버린다. 순전한 사도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만다.

오순절 신학은 철저히 알미니우스주의이다. 예수전도단도 오순절 신학을 근간으로 했으므로 같은 오순절 신학이라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열심히 하고 나가면 그뿐이 다. 장로교 목사는 오순절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하고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기웃거리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기웃거림으로 불순한 신학을 조장하는 교회가 있다. 바로 ‘온누리교회’이다.

앞으로도 보겠지만, 하용조 목사는 교파, 교리 등이 없는 것을 순수한 신앙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가 시도하는 교리적 혼합은 올바른 사고를 가졌거나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신도나 신학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장로교의 신학과 오순절의 뜨거운 기도, 선교 단체들의 열정을 섞어 보려는 소망을 가진다. ‘내가 옳다 네가 옳다 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자기의 소견대로 옳다고 서로 싸우고 교단을 나눈다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모든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자연인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서로의 장점을 연결하여 진정 하나가 되는 그런 기독교를 만들어 보고 싶은 의지를 가진다. 그런데 장로교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오순절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동일한 성경 구절로 서로 정반대의 결론을 내고 있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된다. 장로교가 옳다고 하면 오순절이 틀리고 오순절이 옳다고 하면 장로교가 틀리게 된다.

예컨대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장로교는 이미 중지 되었다고 하는 반면 오순절은 성령 세례를 받은 증표라 한다. 이 두 그룹은 똑같이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근거 자료로 삼는다. 방언을 이야기해야 하므로 동일한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 그 동일한 구절로 한 진영에서는 방언은 확실히 중지 되었다고 말하고 한 진영에서는 그러므로 방언은 지금도 진행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하나를 따르면 하나를 버려야한다. 그 대안적 방안으로 ‘방언은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구원 얻은 데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방언하면 좋고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날카로운 대립을 피하기 위해서는 좋으나 답이 될 수는 없다. 한국에는 장로교가 많지만 각 교회에서 방언을 실제적으로 허용하므로 이런 입장을 많이 취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방언을 한다는 의미에서 오순절 적이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에서 ‘오순절에서는 반감’을 가질 만한 것이다. 오순절에서는 성령 체험의 증거를 방언에 두고 있기에 방언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학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교리가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학을 조금 더 깊이 연구하면 두 진영은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진영이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아이들이나 하는 생각이고, 이제 막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진지하게 신학을 계속 연구하는 목사나 신학자들은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하용조 목사가 해왔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하용조 목사는 평신도나 신학적 소견을 가지지 않은 목사들 사이에서는 한국교회에 큰일을 했다고 평가되고, 신학을 조금만아는 목사들 사이에서는 ‘짬뽕’목사 ‘비빔밥’목사라고 불리며 온누리 교회는 ‘대형마트식 교회’라고 평가된다. 즉, 이런 저런 교리들과 갖가지 방법론이 뒤섞여 있다는 뜻이다. 장신대 명예 교수인 강사문 교수는 하용조 목사를 한국의 칼빈으로까지 생각한다.(‘장신대 교수가 보는 칼빈관이 이 정도일 줄이야’라고 느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하용조 목사와 칼빈의 공통점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두 사람이 모두 병에 시달렸다는 것 ... 두 번째 공통점은 설교가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 세 번째 공통점은 칼빈은 1년에 286편의 설교와 186회의 신학 강의를 했으며, 그 가운데 2023편의 설교가 남아 있다 ... 하 목사도 지금까지 문서로 남긴 설교가 1천 편이며 앞으로 1만 편에 이를 것을 추정했다. 강 교수는 ‘칼빈의 설교가 명쾌하고 핵심을 찌를 것이었으나 혹독했다’며 ‘하 목사의 설교도 편수가 많은 것 못지않게 설득력과 감화력이 있다’고 말했다 ... 네 번째 공통점은 칼빈과 하 목사의 설교가 주석적 강해이며 통전적이라는 것을 꼽았다.

마지막으로 칼빈과 하 목사는 사회, 정치, 경제 및 문화 구조의 변화로 하나님 나라 구현을 목표로 설교, 목회, 전도하는 점을 들었다. 칼빈이 제네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되고 다스림을 받는 시로 만들기 위해 노렸했듯, 하 목사도 온누리가 다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을 희구하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성결교 출신 학자인 한영태 교수는 하 목사가 장로교의 약점을 보완하고, 지금도 오순절과 같은 성령 체험이 가능하다는 성결교적 신앙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 한 교수는 ‘하 목사의 성화관이 장로교회와 성결교회의 성화관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 목사에게는 점진적 성화의 개념이 있으므로 장로교회와 같으나, 성령세례를 성결로 보는 점에서는 성결교회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 선택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는 점을 들어 ‘하 목사의 신학에 장로교회의 엄격한 전통적 예정론이 희미한 것은, 그가 가슴이 뜨거운 목회자요 복음 전도자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기독교 역사를 간추려 보아 알겠지만 반대되는 교리는 섞일 수 없고, 정통 교리를 지키기 위해 2000년간을 싸우며 고수해 왔는데, 하 목사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목사들은 믿음의 선배들의 수고와 노력을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깟 교리들이 뭐가 중요해? 예수님 만나면 되지’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듯 하는 하용조 목사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거대한 교회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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