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설립자)

하용조 목사가 담임하던 시절의 온누리교회의 양육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1)새신자 등록 과정
2)큐티 과정
3)일대일 양육 과정

새신자가 큐티를 생활화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일대일 양육의 단계로 넘어간다. 하용조 목사는 이 단계를 아무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는 다른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온누리교회 만의 독특한 특성이다. 하용조 목사가 생각하는 일대일 제자 양육은 교육이나 성경 공부가 아니라, 한 사람의 훈련된 양육자가 영적인 부모의 심정으로 동반자를 섬기고 양육하면서 삶을 나누고 관계를 형성하고 복음 전파의 동역자로 세우는 과정이다.

4)순모임의 제자도 훈련 과정

모든 양육의 과정이 그렇듯 순모임에서의 제자도 역시 단순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을 나누고 배움으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을 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헌신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하용조 목사는 순모임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첫째, 순모임은 단순한 성경 공부가 아니라 큐티하면서 삶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서로 나누어야 한다. 둘째, 새신자를 환영하고 새신자를 위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이 모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치유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봉사 공동체로서 주신 은사대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배워야한다.”(하용조 목사)

5)전도훈련과정
6)비전과 리더십 훈련 과정

이 과정은 교인들이 모두 목회자의 비전을 함께 공유하고 교회의 방향성을 이해하면서, 여기에 지도자로 솔선수범할 수 있는 리더십을 기르는 것이다.

7)선교사 또는 사역자 파송(아웃리치)과정
 

온누리교회의 양육 과정을 마치려면 7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 매우 독특한 것이 있다.

첫째는 성경 공부를 포기한 것이다.
둘째, 성경 공부 대신 큐티를 하는 것이다.
셋째, 이들이 모여 삶을 나누는 것이다.

이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신앙의 주관화’라 할 수 있다. 열린 예배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체계적인 양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대일 또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양육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모습이 바로 구도자 예배(또는 열린 예배)가 있는 교회의 결정적인 ‘병폐이다. 진정한 성도들은 결코 성경의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서서히 굶주려 갈 뿐이다.

네 번째 단계인 순모임의 제자도 훈련 과정에서 나타나듯 이들의 목적은 새신자들을 위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체계적 양육을 받지 못하고, 교리는커녕 성경 전반을 공부하지도 못한 이들에게 또다시 새신자의 정착과 양육을 요구한다. 매주 모여 앉아 성경적 가치관과 깊이가 결여된 큐티를 나눔으로 혹은 신변의 잡다한 것을 나눔으로 그 일을 하게 한다. 자기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서로 나누라 하지만 사실 과장이나 왜곡으로 가득한 신변잡기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을 나눌 뿐이다. 매우 빈약한 영적 양식을 먹고 사는 것이 온누리교회이다.

문제는 이런 피상적이고 일천한 성경적 지식으로 운영되는 교회의 방식이 한국교회에 퍼져 간다는 점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에 결정적인 해악을 끼쳤다. 온누리교회가 미국에서 출발한 정크 푸드(junk food) 신앙을 충실히 받아 오고, 한국교회는 앞 다퉈 온누리교회를 배우게 된 것이다.

지금은 예배 공간 등의 확보를 위하여 소극장과 체육관은 없어졌지만, 건축 당시에는 파격적인 문화 공간들이 교회당에 함께 자리 하고 있었다. 하용조 목사는 교회 건물을 문화 공간으로 오픈한 것이다. 1987년 7월 19일 온누리교회당 입당 예배를 드리러 온 교인들은 이러 한 교회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교회당 문화에 대한 하용조 목사의 앞선 생각은 다른 교회의 건축에도 영향을 미쳐서 이제 온누리교회의 풍경이 일상적인 교희의 문화처럼 인식되어지고 있다. 교회당에 열린 문화 공간을 수용했던 온누리교회는 복음과 문화의 공존과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준 최초의 교회였고, 이를 시도한 하용조 목사는 분명 교회 문화의 선구자였다. 한국교회의 혼란은 하용조 목사의 방법이 놀랍게도 성공(?)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신학적, 교리적 성찰을 게을리 하고, 심지어 매우 위험하게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 불트만이나 바르트나 틸리히 같은 신학자들을 공부해 보면 그럴 듯한데, 문제는 이들의 신학 이론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많이 깨닫게 되니까, 사람이 메마르고 능력이 없어졌다. 그 많은 합리적인 이론 속에서 예수님은 점점 미라처럼 느껴졌다. 감격스럽게 만난 예수님이 자꾸만 사라졌다 ... 하마터면 1966년에 내가 만나고 체험한 그 예수님을 다 잃어버릴 뻔했다.

그런데 영국에 3년 동안 있으면서 그때까지 내가 학문적으로 배운 것만이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로 발견했다. 우리가 믿는 그대로 복음주의적인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문적으로 그것을 증거하는 많은 학자들과 경건한 분들을 만나면서 학문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하용조 목사)

신학과 교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은 하 목사의 목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자명한 일이다. 감동이 있는 모든 것들이 온누리교회의 중심 사역이 되는 것이다.

“위대한 신학자가 나오지 않으면, 위대한 설교자도 나오지 않는다”(찰스 스펄젼)

스펄젼의 이 말을 우리는 숙고해 봐야 한다. 그러나 하용조 목사가 시도하는 대부분의 사역은 신학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용조 목사는 영국에서 존 그래함 목사의 교회를 방문하고 난 이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설교가 끝나면 사람들은 춤을 추었다. 좋아서 손뼉을 치고 춤을 추고 ... 예배 도중에 귀신들이 막 떠나갔다. ‘와! 이게 예배구나! 이게 예배구나!’ ... 그러면서 교회에 대한 꿈이 생겼다. 교회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감격적인 예배의 경험은 ‘경배와 찬양’을 시작하는 영적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온누리교회 예배의 바탕이 되었다.”(하용조 목사)

하목사가 성령 목회를 하게 된 계기도 우연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1991년 하와이로 안식년을 떠난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하나님은 나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성령목회를 해라!’ 안식년에서 돌아오자마자 성령 목회를 하기 시작했다 ... 이러한 나의 경험은 온누리교회의 목회 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온누리교회는 항상 말씀 중심의 영성, 성령 중심의 영성, 공동체 중심의 영성, 사회 참여의 영성, 선교 중심의 영성, 이 다섯 가지 영성을 지향한다.

교회는 철저하게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진정한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원의 고백과 감격이 있어야 한다. 고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다.”(하용조 목사)

이런 것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면 종교 개혁도 필요 없고, 순교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 목사의 시각으로 보일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고백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선별한다면 어떤 기준도 필요하지 않다. 교리적 분별력이 거의 없는 하용조 목사는 조용기 목사와 예수전도단으로부터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전수받은 듯하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에서 위 단체들과 다른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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