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한국교회사연구원에서 발표한 “하용조 목사의 설교와 신학”이라는 제목의 글에 있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 목사가 여기서 제시한 성경 구절들이 요한 웨슬레가 성결에 대하여 설명할 때 제시한 구절들과 같다는 점이다. 성결교와 나사렛 성결교회에서는 성결의 경험이 바로 성령 세례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결하게 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하 목사도 그와 같은 주장을 한다는 점이다 ... 하 목사의 성화관은 장로교회와 성결교회의 성화관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

칼빈은 중생과 성화를 동일시하였으며, 중생 후의 성도의 신앙적인 삶의 전 과정을 성화 또는 성화의 과정이라 하였다. 이는 점진적 성화이다. 성결교회는 웨슬레를 따라서 중생과 성화를 서로 다른 은혜로 보고, 중생 후에 점진적 성화의 과정 중에 완전 성화의 은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완전 성화의 과정 중에 완전 성화의 은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완전 성화의 체험은 성령 세례라고 한다. 이것은 순간적인 성화의 체험이다.

하 목사에게는 점진적 성화의 개념이 있으므로 장로교회와 같으나, 성령세례를 성결로 보는 점에서는 성결교와 비슷하다. 그러나 완전 성화의 개념은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는 여전히 장로교회의 사람이다.”1)

하용조 목사에게 장로교적 칼빈주의와 성결교적 웨슬레 신학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하용조 목사는 장로교 목사가 아니었는가? ‘칼빈주의’ 또는 ‘장로교회’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예정론’이다. 하 목사도 장로교회 목사이므로 예정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정 사상을 강하게 신봉하지는 않았다. 그는 ‘예정’이란 단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 ‘선택’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장로교의 핵심 사상인 예정론을 하용조 목사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정과 선택은 어떻게 다른가?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라는 두 가지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둘 다 하나님이 선하신 뜻대로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유기를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은 ‘유기’를 빼 버리고 선택만을 이야기한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유기를 빼버리면 결국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인간중심 신앙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알미니안들의 주장이 강하게 나타난다. 알미니안들이 주장한 것 중 보편적 속죄론을 다시 한 번 보자. 알미니안들의 ‘보편적 속죄’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죽으심으로 만인을 위한 사죄를 획득하셨으나, 단지 믿는 자들만 거기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인을 위해 돌아가셨고, 그 십자가의 공로는 스스로 믿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이다. 반대로 장로교 신학을 다시 확인한 도르트회의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택한다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사상을 다시 확인하였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싸움의 핵심은 구원이 ‘하나님 단독 사역’이냐 ‘신인협력’이냐 이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적 신학과 인간 중심적 신학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의 관점에서 목회하기를 원하는 자, 사람을 많이 모이게 하기 위하는 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들을 모조리 배제시키고, 오직 따뜻한 소리들을 좋은 소식,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상현 교수는 하용조 목사의 설교를 폄하하면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하용조 목사는 철저히 설교의 ‘수용자 중심’사고와 행동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 수용자인 교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의 동화를 의식적으로 도모한다 ... 수용자를 우선시 하는 그의 배려는 목회의 여러 차원에서 감지된다. 세대별, 직업별로 감성적 공분모를 나누는 사람들끼리 모임과 만남과 예배를 갖게 하려는 시도들, 예컨대 가정 화목을 위해 ‘아버지 학교’나 ‘어머니 학교’ 같은 프로그램을 열고 ... 직업별 맞춤 전도집회를 기획하여 의료인과, IT 인들을 대상으로 열어나가는 등의 활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철저히 수용자 중심의 복음 선포를 실천하고 있음을 뜻한다.”2)

물론 수용자 중심성을 강조하는 이유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여러 사도들이 각자의 언어로 설교한 것을 들을 수 있겠으나, 수용자 중심의 설교와 목회를 통해서는 선지자적 외침, 즉, 죄를 지적하는 것, 회심을 위한 불타는 꾸짖음을 하기가 쉽지 않다.

지치고 힘든 육신의 몸으로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봐도 귀하고 안타까운데 불호령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용조 목사도 스스로의 반성에서 불의와 부정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던 선지자들처럼 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설교를 듣노라면 공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사라지고 오뉴월 꽃길 따라 산들 바람 속에 거니는 소녀의 미소가 느껴진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불같은 외침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용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며, 하나님의 공의 앞에 우리 모두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한다고 담대히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제 설교는 그런 예언자적 설교의 취약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3)

선지자적, 예언자적 설교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배당에 앉아 있는 자들 모두를 더 이상 회개할 필요 없는 이미 중생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교리의 중요성을 잃은 사역은 수용자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설교를 성경 중심이라고 하며, 철저히 성경을 연구했다고 하며, 성경 외적인 것을 가급적이면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하며 하나님 중심적인 설교라고 외친다. 그러나 설교 전체가 성경으로 도배가 되어도 성경적 설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로이드 존스가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를 평하는 것을 살펴보자.

“20분 동안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반드시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본문을 선택하여 말씀을 잘 분석했다고 해도 그것을 반드시 설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설교에 대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사실, 곧 자신이 기특하고도 영원한 은혜를 나르는 통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큰 확신’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적 설교가 아니라 예언자적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듣는 설교는 주로 제사장적 설교입니다. 자상하고 조용하며 수려한 문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잘 짜여진 설교가 주를 이룹니다. 그런 설교는 예언자적 설교가 아닙니다. 예언자적 설교에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존 녹스가 그런 식으로 잘 짜여진 설교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두렵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 종교개혁자들은 권위 있는 예언자적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선포요 외침이었습니다. 그들의 설교관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우호적인 논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 존 녹스 역시 그렇게 하나님의 불이 뼈와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선지자처럼 불과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말씀,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가 변화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오랜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대가 열렸습니다.”4)

로이드 존스 시대 영국 교회에서도 불같은 선지자적 말씀 선포는 사라지고,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아낙의 모습처럼 앙증맞고, 예절 바르고, 세련되고, 청중에게 나쁜 감정을 심어주지 않는 잘 짜여진 설교들이 범람하였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이런 설교들은 성경을 탐독해도 설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제사장적인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설교를 준비 하는지 짤막하게 쓰고 있다.

“온통 대화와 논의가 주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 보자. 그들을 회심 시키려면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대화와 논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자. 우리가 고약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자. 그러면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 그렇다면 존 녹스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습니까? 그가 우호적인 논의를 나눌 수 있는 친절하고도 다정하며 자상한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참으로 감사합니다.”5)

로이드 존스가 지적한 사람은 정확히 하용조 목사와 같은 사람이다. 하용조 목사의 목회철학은 존 스토트나 로이드 존스, 존 맥아더, 캠벨 모건등과는 전혀 다르다. 하용조 목사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하 목사와 이들의 목회 철학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이들이 우려했던 것, 반대했던 것들이 하용조 목사의 목회 전반에 나타난다. 빌 하이벨즈나 헨리 나우웬 정도는 닮은 것 같다.

유상현 교수는 하용조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하용조)는 기독교의 근간이나 지켜야 할 원칙, 또는 본질적이고 항구적인 목적과 별반 관련이 없는 부차적 사안들이나 수단에 불과한 2차, 3차적 중요성만을 갖는 사항들에 관해서는 변화에 관대하다고 공연한다. ‘교회의 핵심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명제는 절대 타협할 수 없지요. 하지만 본질과 목적이 아닌 주변 수단은 철저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순절 방언 이해의 기적이 제시하는 의미란 결국 하용조 목사가 시도하는 ‘수용자 중심의 전언, 수용자 사유 세계와의 밀착 노력, 수용자 세계관 및 라이프 스타일 과의 적극적 교류’ 속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6)

교회사 안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명제를 거부한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의 명목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들을 안타까워하였던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섬길까 고민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 목사가 수용자 중심적 설교를 추구하고, 예언자적 설교를 지양하는 이유는 특별한 관찰 없이 교회의 회중들을 이미 회심한 신자로 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영태 목사는 하용조 목사의 목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그(하용조)가 가르치는 대상은 이미 구원 받아 성도가 된 사람들이며, 그들에게는 선택과 사랑의 축복 그리고 감사를 가르치는 것이 목회자의 큰 역할이기에, 그는 유기는 언급하지 않고 선택을 강조한다.”7)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회심을 향한 불같은 외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느냐는 것이 아닌가? 물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 중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이후의 삶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살아가게 되므로 그의 인생에는 최종적인 소망에 근거한 기쁨과 즐거움이 이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회심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성화도 없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평안과 기쁨이 생길 수 없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과 그 나라의 행실을 정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독교의 중요성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그 과정에서 죄를 심각하게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고, 그들의 양심을 깨우고, 그들로 하여금 임박한 진노로부터 피하도록 경고해 주는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상실된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온누리교회는 교회의 출석과 동시에 많은 프로그램으로 거듭남의 증거도 없는 사람들을 교육한다. 거듭남의 증거도 없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해 나간다. 거듭나지 않는 영혼은 영이 죽은, 영적인 시체이다. 거듭남은 새롭게 출생한다는 것이다. 양육은 출생한 것을 돌보는 것이지 여전히 출생하지 않는 것이나 무생물이나 시체를 돌보는 것이 아니다.

하용조 목사는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사람들을 붙잡아놓고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등 수 많은 프로그램으로 참가하면 그 영이 소생할 것이란 생각을 하는 듯하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고민과 영혼에 대한 두려움, 죄를 향한 증오에 따른 울부짖음이 사라지자 심리 치료를 통한 과거로의 역행으로 눈물을 대체한다. 성화의 과정 중에 찾아오는 기쁨이 나타나지 않자 심리 치료를 이용한 내적 치유를 통해 기쁨을 추구한다. 내 마음의 쓴 뿌리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한다는 이상한 이론을 들고 나와 내 속의 쓴 뿌리들을 뿌리채 뽑아 버리기 위해 괴성을 질러 댄다. 상담 치료 기관에서 진행하는 집단 상담과 같은 형식으로 고통의 상황을 생각하게 하고 그 상황을 다시 되씹으며서 그 고통에서 서서히 나음을 입듯이 내적 치유도 동일하게 과거로의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고난당하는 과거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한 예로 아버지로부터의 학대로 이끌어져 간다. 물론 ‘성령님이 이끄셨다’고 하면 그만이다. 성령님이 내 손을 잡고 내 나이 일곱 살 때로 데려 간다. 그리고 똑똑히 보여주시는데 어두운 구석에서 웅크리고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는 아이를 보여 준다. 아버지는 옆에서 화가 잔뜩 나셔서 회초리를 들고 계신다. 이런 문구나 간증은 공식이나 되듯 비슷하다.

이미 구원 받았지만 성화에 대한 징표가 없자 당황한 교회 지도자들은 곧바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다. 기독교와 가정, 기독교와 청소년, 기독교와 사업, 기독교와 아버지 위치, 기독교와 개인 등의 프로그램이 채용된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가 이렇게 직접 체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실제적인 삶에 도움을 주지 않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재빨리 만들어 낸 것들이다. 그리고 각 세대별로 그 시대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4050세대에게는 7080류의 찬양을 하게하고, 2030세대에게는 젊은이 다운 찬양을 하게하며 10대에게는 10대가 좋아하는 장르의 찬양을 하게 한다.

하 목사가 만든 두란노 출판사에서 출판되는 책들 중에 베스트셀러를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상담 시리즈”(전 30권)
“현대 상담 시리즈”(전 12권),
“상한 감정의 치유”(데이빗. A 시멘즈)

또한 두란노 바이블 칼리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강좌를 운영했다.

“치유, 회복, 기쁨이 있는 곳”
“자존감 세미나”」

온누리교회의 일반 성도들은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지식 보다는 개인의 내적인 것에 몰두하도록 교육받는다. 그 결과 ‘중생’ ‘성화’ ‘견인’ 같은 신학적 용어보다는 ‘쓴 뿌리’와 ‘성인아이’ ‘자존감’ 등의 심리학적 용어에 익숙해진다. 이 교회가 이렇게 개인과 집단 치유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 내에 상담 기관을 많이 둔 것은 교인들이 그만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 목사는 자주 설교에 핵심을 둔다고 하지만, 성경과 설교만으로는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보여준다. 특별히 상담과 내적 치유 등의 강사들 중 상당수는 일반 대학의 심리학 교수이거나 정신과 의사인 경우가 많다. 이 강의를 진행하는 의사나 교수가 그리스도인이기에 그 강의는 ‘기독교적 심리학’이라고 간주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세속 심리학을 강의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드립시다’라고 했다고 하여, 그 강의가 자연스럽게 ‘기독교 심리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 요가 강사가 요가 강좌를 연다고 해서 곧 기독교 요가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독교인 대중 가수가 ‘이 목소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어요’라고 고백하고 ‘이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요’라고 선포하고 가요를 부른다고 그것을 찬송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과연 온누리 교인들은 대부분 거듭난 백성들일까? 구원의 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시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유효하게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이루는 구원의 서정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곧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의 유효한 사역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온누리교회는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중생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인 것이다. 교회 내에 선택 받은 자와 선택 받지 못한 자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교회의 문제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오게 되어 있다. 내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하고 있거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발생하게 된다.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은 결코 불교나 유교인에 의해서 발생되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이교적 사상을 가진 자들과 불신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로이드 존스의 말을 들어보기 바란다.

“이 모든 이기적인 우둔함과 도덕적인 연약성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널리 사용되는 보편적이고 고정적인 논증이 하나 있습니다. 대적이 교회 밖에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 있는 형제는 자기 형제가 무엇을 믿든지 그 믿는 바가 이제까지 정통으로 특징지어지던 모든 것에서 멀리 벗어나 보인다 할지라도 염려할 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8)

 

--- 각주 ---
1) 한영태, <하용조 목사의 설교와 신학>, 두란노, 173-175.

2) 유상현, <하용조 목사의 설교와 신학>, 50-52.
3) 하용조,<하용조 목사의 설교와 신학>, 193.
4) 마티 로이드 존스, 이안 머리, <존 녹스와 종교개혁>(조계광 역), 지평서원, 43-46.
5) 마티 로이드 존스, 이안 머리, 45.
6) 유상현, 51-55.
7) 한영태, <하용조 목사의 설교와 신학>, 178.
8) 로이드 존스, <시대의 표적>, (기독교문서선교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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