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박사 / 브니엘 신학교 총장

2. 역사적 기독교와 개혁신학

학자들 가운데서 가끔 발견되는 우상성은 자신의 신념을 유일한 성경적 견해로 여기며 절대화하는 태도이다. 타성적으로 지금까지 다루어 오던 내용을 같은 방법으로, 같은 형식 속에 집어넣어 판단하면서 오히려 자기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을 자연과 우주의 중심에 두고, 모든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며,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말하면서도 자주 “객관적으로 말해서…”라고 한다. 자신의 것과 다른 신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역사적 기독교 신자들은 기존의 견해를 비평적으로 검토하는 일을 주저한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현 상태를 옹호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신학도의 임무는 쟁점들을 명확히 밝히고 공동유산인 신앙고백을 비평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적합한 기준을 제공하며 성경·전통·신앙고백·교리·신학·역사 등 신앙의 내적 외적 요소들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역사적 기독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평 작업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도 해석학적 겸손이 결핍된 사람들이 없지 않다.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 패러다임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 한다. 신앙과 이성을 구분하고, 기독교의 초기 역사(그리스도의 도성인신, 동정녀 탄생, 대속죽음, 육체부활, 기적 능력 등)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존재를 부정하고, 주관주의와 상대주의 태도를 가지면서 그것을 절대시한다. ‘선 무당 사람 잡는 식’으로 사물을 판단하기도 한다.

지적 폭군이 되지 않으려는 신학도는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왜곡, 편견, 실수에 대해 비평적이다. 해석학적 활동에서 본문을 자신의 선(先)이해에 밀어 넣어 꿰맞추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동시에 타인의 견해를 기꺼이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다. 자신의 선이해를 본문에 비추어보고, 해석학적으로 검토한 결과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교정하려는 선비의 태도를 가진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물이해는 완전할 수 없다. 해석학적 겸손을 가진 사람은 이성적 진리와 교회의 전통이 제시하는 진리 사이의 갈등을 보면서 이성적 진리가 이성 자체의 제한성과 속임수 때문에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간파한다. 이성적 탐구와 발견을 위한 비평적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신학 입장이 다르다고 하여 저 수많은 탁월한 학자들의 이론들을 맛보는 것조차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배우고 담아 본 뒤에 그것을 버리는 자유인의 기개를 가진다. 현대신학의 변화와 흐름을 탐색한다. 현대의 지성인들이 무엇 때문에 고뇌하며 씨름하고 있는가를 알아본다. 배울 것은 주저하지 않고 배운다. 진리탐구의 길을 뚫고 사고의 폭을 넓힌다.

유서 깊은 기독교 안에는 여러 갈래의 신학 흐름이 있다. 그 중심에는 개혁주의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이라고 하는 신념체계가 있다. 이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종 표준으로 삼는다. 성경의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성경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신학활동을 하고자 한다. ‘오직성경’(sola scriptura) 원리를 신학의 토대로 삼는다. 성경에 충실한 신조, 신앙고백, 교리를 선호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성경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신앙고백서라고 생각한다.

박형룡은 역사적 기독교와 관련하여, 자유주의 기독교가 과학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계시신학(啓示神學)의 본성(本城)을 버리고 자연종교의 막연한 황야로 도피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 신신학, 현대주의를 동일선상에 두고 비판한다. 반면에 유서 깊은 기독교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술된 말씀과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초자연적 성경관을 중심축으로 삼는 신학’12이라고 정의한다. 칼빈주의가 이러한 종류의 가장 명확한 신학적 표현이라고 하면서, 그의 『기독교신학난제선평』(1935)은 정통신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통신학은 절대적인 인식학적 권위가 오직 천계(天啓)와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에 있는 것이다. 순전히 성경에 따라서 거기 기초하고 거기 부합하는 종교적 의견이면 ‘옳은 의견,’ 곧 정통신앙으로 인정할 것이다. 교회의 교리를 제정함에 있어서 다수인의 권위나 선생의 권위에 따르지 않는바 아니다. 그러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다. 그 의견이 성경과 합하느냐 않느냐를 상고하여 성경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의견을 정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3

정통신학은 성령의 살아 있는 역사를 강조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으시고 사랑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속(redemption)에 능동적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 믿음과 칭의와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이다. 그는 만물의 주이며, 유일한 구원자이다. 창조·보존·섭리·통치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은 우주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케 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끝에 심판주로 재림할 것이다. 신앙은 삶 전체와 인격의 문제라고 본다.14

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과 신신학(바르트주의)을 수용했다. 역사적 신앙고백서들을 버렸고, 유서 깊은 기독교와 상반되는 ‘새로운 기독교’로 거듭났다. 그들이 버린 것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관이다. 

 

3. 성경과 교리

기독교의 유일성,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은 모두 성경에 기초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에 바탕을 둔 기독교는 참 종교이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은 거짓이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과 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모두 헛된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계시(啓示)라고 하는 초월적이며, 신적인 수단인 신탁(神託: oracle)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한 사이클에 맞추어 자신의 말씀, 영원한 진리를 특별하게 계시했다.

성경의 모든 구성요소는 무오하다. 모든 내용이 영감되었다. 하나님은 성경 기록자들을 유기적으로 사용했다. 그 내용은 정확하며 안전하며 신뢰할 만하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받아 적거나 구술형태의 기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는 개념과 언어의 형식으로 전달되는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수단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또한 거짓된 것을 담을 수 없다. 하나님이 진리(롬3:4)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딤후3:16)도 진리의 말씀이다(요17:17).

역사적 기독교가 고백하는 이러한 성경무오성, 완전영감, 유기적 영감의 교리는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창작물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쳐 온 것이다.

유서 깊은 기독교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최종 규범이라고 본다. 신학과 에큐메니칼 활동의 평가 기준이기도 하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성경이 신행의 최종의 판단기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가 문화에 대한 탁월성과 동시대성과 통합성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문화와 복음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주변 문화의 이상과 구별되는 명백한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뚜렷하고도 확실한 메시지를 제공하지 못한다. 한 동안 진리처럼 여겨지던 사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진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캄캄한 흑암을 돌아다니는 유리하는 별처럼 잠시 빤짝이다가 그 빛을 잃는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교회를 점차 세속 문화의 흐름에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세상과 문화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다한다는 미명아래 교리와 신학의 한계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은 교회가 세상과 문화를 변혁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해 변화된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복음과 문화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유서 깊은 기독교는 성경이 말하는 역사적 사실과 기독교의 교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성경과 교리, 그리스도와 신조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교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바울 서신의 약 3분의 2 가량은 교리를 담고 있다. 나머지 3분의 1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경, 교리, 신앙고백, 신학이 없이 저마다의 자기 생각대로 믿으면 인간의 제한성과 주관성의 포로가 된다고 본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교리를 구분하면서 교리무용론, 신조무용론을 펼친다. 교리가 교회의 분규를 조장하고 연합을 방해하며 신학의 발전을 제한하고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교리를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십자가를 전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신경을 비교리의 전형(典型)으로 보면서 그것을 고백하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본다. 다양한 사상과 교리들을 모두 아름다운 신앙유산으로 받아들이자고 한다. 무조건 하나가 되자, 외형적 일치를 도모하자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그럴 듯해 보인다. 유한한 인간이 어찌 자기가 믿는 것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찌 자기 교단, 자기 종파만 옳고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사물이해와 사상은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 교회가 복음을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형식으로 전하려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해야 한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항상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정황과 관련을 갖고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인간이 무오한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상상적, 형이상학적, 초역사적 또는 초인간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절대적이거나, 명제적으로 무오한 진리를 아는 것이 쉽지 않다. 사물이해에 대한 해석학적 조건과 제한성을 깨달아 항상 배우고 겸허하게 진리의 확실성을 탐색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기독교의 근본을 부정하는 위험이 도사려 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어떤 것보다 성경과 그것의 권위 그리고 그 내용을 간추려 표현한 교리에 의존한다.

바울은 기독교의 근본이 종교 감정이나 경험에 있지 않고 역사적 사실들(facts)과 그것에 대한 설명―교리에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1) 그리스도를 믿고, (2)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3) 율법을 지키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울 당시의 유태주의자들은 (1) 그리스도를 믿고, (2) 율법을 지키고, (3)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 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교리이다. 교리가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보다는 복음의 ‘내용’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관용 정신을 발휘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관용은 신앙무차별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리 문제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가졌다. 자기 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영지주의, 거짓교사)에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1:8)고 말했다. 거짓교사들이 진리의 복음을 비복음, 거짓복음으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 진노했다.

바울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인간경험과 복음진리를 동등한 선산에 두지 않았다. 경험은 주관적이다. 특정인에게는 진리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바울은 기독교를 진리(교리)에 기초한 삶으로 이해한다. 교리(복음)가 먼저이고, 체험(삶)이 나중이라고 본다. 그는 항구적이고 우주적인 진리에 관심을 가졌다. 성령의 영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교리 없는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는다.

교회의 전횡적인 무대였던 유럽을 기독교의 불모지가 되게 만든 것은 신학을 시대사조, 시대정신에 걸맞게 변개해 온 자유주의 기독교이다. 다양한 신학을 수용하는 포용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이다. 영국, 독일, 미국, 캐나다, 호주의 주류 교회들이 생명력을 잃고 사양길을 걷는 이유는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고백하는 신앙을 ‘배타주의’라고 비난하는 그러한 발상과 태도가 교회를 쇠잔하게 만들었다.

칼빈은 “거짓이 종교의 성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교리 위에 기초해 있다면…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15고 말한다. 다양한 신학에 교회의 문을 열어주면 기독교는 교리 없는 종교, 십자가 없는 복음, 믿는 바가 분명하지 않는 집단으로 전락한다. 종교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시대에 기독교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성경관과 교리의 중요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최덕성 박사 / '리포르만다'에서 (크릭)
원제: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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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 교수는 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고,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의 총장이다. ‘신학자대상작’으로 선정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을 비롯한 약 20여권의 귀중한 신학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의 대표이며,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를 운영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공급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