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 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4절에서 자신이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조상의 유전’에 더욱 열심이었다고 고백한다. 다 알다시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에세네파가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파가 바리새파였다. 바울 당시 바리새인들이 믿었던 유대교란 ‘조상의 유전’에 근거한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으로 표현된다. 예수님은 그 ‘장로들의 유전’에 계속해서 도전하신다.

‘장로들의 유전’이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한 것이다. 유대교는 그런 ‘해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종교다. 말하자면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의 해석학적 틀이다. 지구의 종말을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의 모든 구절이 종말과 관련된다. 귀신론의 해석학적 틀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성경의 모든 구절이 영적 전쟁과 관련이 있다. 해석학적 틀은 이렇게 정통 안에서 하나의 교파를 만들기도 하고 이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럼 유대교의 해석학적 틀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전제는 무엇인가? 유대교의 시발점은 에스라의 개혁운동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방의 포로가 된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고민의 결과 찾아낸 이유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선포되는 저주의 마지막 단계가 이방의 포로가 되는 것이었다.

너희가 이같이 될찌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찐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레 26:27-33)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 벌을 칠 배씩 더 하다가 마지막에 내리시는 벌이 ‘열방 중에 흩는 것’, 곧 바벨론 포로였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 율법을 잘 지키면 저주가 아니라 복이 올 것이다.

그래서 에스라 이후 유대에서는 율법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경주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좋게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반드시 변질된다. 본질로 시작했다가 형식으로 끝을 맺는다. 에스라의 개혁운동은 참으로 순수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올수록 점점 변질이 된다. 벌써 말라기에서 선지자의 탄식이 들려온다. 에스라의 개혁운동은 명맥만 남은 채 형식화되고 이즘(ism)이 되어 버렸다.

변질된 단체일지라도 거기에는 순전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잘 몰라서 그 변질된 단체에 봉사한다. 바울이 그렇다. 반면 그 단체에서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자들이 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다. 이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의해 지옥의 자식으로 선포된다. 이들은 회개의 기회를 결코 얻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변질된 것을 바른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 그것에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복을 받기 위해 천착한 것이 모세의 율법이다. 율법의 공식이 그렇다.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저주를 피하고 복을 받기 위해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런데 복에 대한 열망과 저주에 대한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율법 준수에 있어 경직성을 띠게 된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큰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의 실수라도 줄이고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 방법론을 연구해야 했다. 이 방법들이 ‘장로들의 유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탈무드와 미쉬나 등이 이것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장로들의 유전은 율법을 잘 지켜서 저주를 피하고 복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해석학적 틀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율법 중의 하나가 안식일 법이다. 안식일을 지키면 살고 범하면 죽는다(민 15:32-36 참조).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사활을 거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들은 총 39조 234장에 달하는 안식일 조항들을 만들어낸다. 이 조항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본래의 안식일 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이 안식일 조항들을 일부러 깨뜨리시는 장면들을 자주 본다.

소위 정결례도 그렇다. 먼지가 많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상 반드시 필요했다. 샌들을 신고 다니는 문화에서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집에서 발 씻을 물을 내놓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다.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정결‘의식’이 된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 7:5)

정과 부정은 유대교에 있어 절대적인 개념이다. 정한 것은 거룩한 것이고 부정한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사람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들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속을 더럽게 한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 본 뜻은 속에서 나오는 것이 겉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다. 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정결례의 본질이다. 정함과 부정함을 통한 거룩함은 속사람에 관한 것이지 겉모습에 관한 말씀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시비에 이렇게 대답하신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15-23)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지켰던 정결례법 역시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거룩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형식적 종교 행위는 저주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불러오고 복을 차버리는 것이다. 율법(계명)을 지켜야 저주를 피하고 복을 받는데 이들은 그것을 그리도 갈망하면서도 정반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8,9)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율법을 잘 지키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이다.

유대교가 했던 실수는 오늘날 정확하게 반복된다. 특히 한국에서 그렇다. 한국 사람들의 DNA에는 ‘복’이 각인되어 있다. 그 ‘복’의 내용은 레위기, 신명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복이다. 다시 말해서 현세적인 복이다(앞의 글에서 “구약이 말하는 복과 저주는 모두 육신과 땅에 관한 것이다”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라).

유대교가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라는 선언문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를 주장한다. “율법을 잘 지키면”이 “예수를 잘 믿으면”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복’은 똑같다. 이것은 앞의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약과 구약의 차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지독한 난독증의 결과다. 복의 내용이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만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런 말은 성경에 없다. 또 율법과 연계된 복이 이 땅의 것인 것은 맞다(사탕이다). 그러나 예수 믿고 받는 복은 하늘의 것이다. 그것도 무엇을 잘해서 앞으로 받을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1:3). 그래서 신약의 백성들에게는 “예수를 잘 믿어서 복을 받아라”가 아니고 (이미 주신) “은혜 안에 거하라”다. 은혜가 복이다. 구원이 은혜이고 구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롬 8:32).

유대교가 율법을 잘 지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장로들의 유전을 만들어냈다면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잘 믿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새로운 장로들의 유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목숨을 걸고 지켰던 것처럼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목숨 걸고 ‘새로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킨다. 건강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특히 자식을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유대교에 안식일 법이 있었다면 한국 기독교에는 ‘주일 법’이 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못한다. 주일에는 돈을 쓰지 못한다. 어느 장로(?)가 만든 유전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주일에 돈을 쓰면 배교자 내지는 우상숭배자로 취급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물건은 주일에 갖고 오고 돈은 월요일에 지불한다. 자판기를 설치한 교회에서는 주일에 돈을 넣지 않고도 음료를 먹을 수 있도록 조치한다(90년대 말까지는 많은 교회들이 이런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배 때 에는 앞자리에 앉아야 복을 받는다. 심지어 ‘목사의 침이 튀는 거리’라고 하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인다. 그래서 어느 대형교회의 예배 때에는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고 몸싸움까지 일어난다. 형제, 자매와 몸싸움해서 빼앗은 자리에 목사의 침으로 몸을 적신다 한들 복이 임할까?

가장 끔찍한 상황은 복을 받기 위해 말씀의 왜곡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위 ‘일천 번제’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그가 원치도 않았던 장수와 부귀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천 번제에 대한 ‘장로들의 유전’이 이렇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국정을 돌보는데도 엄청 바빴을 텐데도 거의 3년이나 되는 일천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사를 드렸으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감동하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복’을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도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정성으로 복을 받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그렇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안수 떠놓고 비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는 복을 못 받으면 ‘정성이 부족’한 거다. 그래서 필요하면 정성을 더 드려야 한다. 어떤 사람이 꼬박 꼬박 30분씩 새벽기도를 했다. 어느 날 바빠서 3분 정도 일찍 일어나서 나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그랬더니 자기가 3분 기도시간을 잘라먹어서 이런 사고를 당했노라고 회개했다고 한다. 종교가 형식화되고 화석화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솔로몬은 복을 받기 위해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고 자기 같이 부족한 사람을 왕으로 세워주신데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흠향하시고 기쁨으로 그에게 상을 주신 것이다. 순서와 목적이 다르다.

또한 솔로몬은 일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다. 일천의 번제다. 다 알다시피 번제는 태워서 드리는 제사의 형태이다. 열왕기상 3장 4절에는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말씀한다. 한글 성경만으로는 일천 번인지 일천의 번제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역대하의 기록을 보면 명확해진다.

…솔로몬이 회중으로 더불어 나아가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대하 1:5,6)

그리고 7절은 “이 밤에”라고 시작한다. 일천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린 ‘그 밤’이라는 뜻이다. 물론 당시 기브온 산당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천 마리의 짐승을 번제로 드릴 규모가 되었겠는가 하는 것과 그 짐승을 잡을 제사장들이 충분했겠는가는 상식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분명하다. 또한 백번 양보해서 천 마리의 짐승을 하룻밤에 잡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3년에 가까운 천 일 동안 제사를 드린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장로들의 유전’은 복을 받고 저주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갈멜산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그것도 매우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성을 드리고 무언가를 잘해서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삯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4:4)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조건 준다. 머슴은 땀을 뻘뻘 흘려야 칭찬을 받고 밥을 얻어먹는다. 구약의 율법의 요구는 정상적으로 이해해도 머슴 신앙으로 갈 수 있다. 세례 요한의 오해를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신약의 은혜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절대로 우리의 공로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한국 사람들은 무언가 열심히 하고나면 결과야 어떻든지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무엇엔가 열심있는 자들을 우러러 본다. 그것이 종교 안으로 들어오면 지극 정성을 들이는 사람을 존경한다. 옳고 그름은 그 열심에 묻혀버린다. 정성을 들이는 본인도 충분한 정성을 들이고 나면 스스로 만족한다. 그 정성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그렇지 않으셨는지는 상관없다. 아니, 받으셨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 교육하고 훈련하고 때로는 징계(히 12:5-11)하신다. 그리고 이 과정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 여정의 모든 것이 바로 이 훈련과 교육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 시키려고 부르신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소위 ‘사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그리고는 “어디든지 가오리다”를 목청 높여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 이런 착각 속에서 열심을 내는 것이다. 어떤 목사들은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 쉬는 것을 정죄한다. 휴가가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목사들을 보면서 성도들은 감동을 한다. 그 열심에 최고의 찬사와 존경을 보낸다. 하나님도 7일째는 안식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질서에 ‘쉼’을 주셨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조차 무시하는 이 무식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가 그 무식한(?) 열심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계절’을 우리가 오게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도 “때가 차매”(갈 4:4) 이루어진다. 인간으로서는 수천 년을 기다린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일을 이루신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혹자는 한국교회가 그렇게 열심이 있었기에 이만큼 성장하지 않았느냐고 강변한다. 무식하면 용감한 것이다. ‘성장’ 자체가 하나님의 관심인가? 말라기 2장 15절을 보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시는 창조주께서 일부일처 제도를 만드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경건한 자손’의 ‘번성’이다. ‘경건’을 뺀 ‘생육과 번성’은 오히려 재앙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성장의 결과가 무엇인가? 중세 때에도 없었을 ‘개독교’ 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장이었고 무엇을 위한 열심이었는가?

제발 두 주먹 불끈 쥐지 말고 아무 때나 열심 내지 말라. 열심히 하지 말고 ‘바르게’, ‘신실하게’ 하라.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이라고 여기며 추구하는 것들(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은 우리가 추구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채우시는 것이다. 자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밥을 얻어먹기 위해 열심히 마당을 쓸고 장작을 패고 있다면 그것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어떨지 헤아려 보라. 우리의 모습이 정확하게 그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우상숭배다.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개념은 성경에는 아예 없다. “잘 믿는” 종교적인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모세 목사(thdhan@gmail.com) / 그루터기 장로교회(아리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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