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산 목사의 책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는 한국 교회에 에드워즈를 소개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오래 전에 보았던 이 책을 다시 보았다. 지금 다시 보니 백금산 목사는 에드워즈에게 확실하게  미친 사람이다. (백금산 목사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결코 아님을 독자들이 알기를 바란다. ‘미쳤다’는 말이 듣기에는 이상해도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강한 집념을 가지고 시도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다). 에드워즈에게 미친 백금산은 한국 교회에 에드워즈를 소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백금산이 얼마나 에드워즈에게 미쳤는지 보여주는 그의 말들 보자!

“미국 최고의 영적 거인, 아니 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직 한국교회에는 묻혀 있는 광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영적 광산에서 아직 빛나는 보석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이는 기이한 일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15 페이지)

“나는 2003년을 한국 교회에 영적 거인 에드워즈를 알리는 원년으로 삼고 싶다.”(15 페이지)

“필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사람이라는 로이드 존스의 평가에 기꺼이 동의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최고의 영적 거인, 아니 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이라는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곤 합니다.”(28 페이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교회가 배출한 최고의 인물이며 최고의 영적 거인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이라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29 페이지)

“저는 에드워즈를 저의 개인적인 신앙과 신학의 스승으로 여기고 있으며, 에드워즈에 대한 깊은 이해와 구체적인 소개를 저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에드워즈에 대한 남다른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55 페이지)

“인물 연구를 통한 성화론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을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에드워즈는 미국 최고의 영적 거인이었으며, 어쩌면 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이라 해도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58 페이지)

“조난단 에드워즈는 히말라야 산맥과 같은 거대한 사람입니다.”(47 페이지)

에드워즈에게 미친 백금산은 자신이 운영하는 <부흥과개혁사>를 통해 에드워즈에 대한 책들을 많이 보급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에드워즈에 대한 책들 가운데 <부흥과개혁사>가 출판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 - 백금산 저, 1999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 양낙홍 저, 2003
<신앙감정론> - 번역, 2005
<부흥론> - 번역, 2005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 번역, 2006
<구속사> - 번역, 2007
<조나단 에드워즈의 유산> - 번역, 2009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 이상운 저, 2009
<한 권으로 읽는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 - 번역, 2015

<원죄론> - 번역, 2016
<의지의 자유> - 번역, 2016

이 책들 외에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표설교 전집> 등 부흥과개혁사가 펴낸 에드워즈에 대한 책들 10권 정도가 더 있다. 대체 백금산은 왜 이렇게 에드워즈에게 미쳤을까? 백금산의 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백금산은 에드워즈를 미국뿐 아니라 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으로 본다. 에드워즈가 지성으로는 칼빈과 어거스틴에 필적하고, 그리고 영성과 성령 체험에 있어서는 그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본다. 에드워즈에 대한 백금산의 말을 들어보자!

“필자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미국 최고의 영적 거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성적인 측면과 체험적인 측면, 양자 모두에 있어 가장 탁월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또한 이 두 가지가 탁월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37 페이지)

“에드워즈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성령의 부으심을 여러 차례 경험하면서 교회사에 가장 강력한 ‘영적대각성’ 또는 ‘대부흥’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성령 체험과 교회사적 부흥의 체험을 겪으면서 에드워즈는 교회사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깊은 영적 체험을 한 인물이 되었습니다.”(38 페이지)

“우리는 에드워즈가 어거스틴, 칼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신학적 거인인 동시에 이 두 사람과는 다른 차원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체험적으로는 이 두 사람을 월등하게 능가한 사람이었을 알 수 있습니다.”(45 페이지)

백금산이 에드워즈에게 가장 깊이 매료된 부분은 에드워즈의 놀라운 하나님 체험이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에드워즈의 성령 체험이 백금산을 미치게 만들었다. 대체 백금산은 에드워즈의 어떤 식의 하나님 체험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였을까? 백금산은 에드워즈의 자서전에 속에 나오는 에드워즈의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에 대해 강하게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백금산의 책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의 153-185 페이지의 내용은 에드워즈의 자서전에 대한 번역이다. 백금산이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에드워즈의 자서전’이라고 불리우는 문건을 번역하여 한 곳에 모아 주어 우리는 그것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백금산 목사의 큰 공로이다.

 

백금산 목사의 저서

 

문제는 백금산이 감탄하는 에드워즈의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에 관한 내용은 논란의 소지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기록으로 남긴 그의 체험들을 정당한 신앙의 체험이라고 인정하고 수용하기에 많은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백금산은 심도있는 논의와 신학적 검증을 전혀 유도하지 않았다. 백금산은 곧 바로 “이와 같은 에드워즈의 성령에 대한 체험은 칼빈과 어거스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함이다”라고 발전시켰다.

백금산은 자신이 번역한 에드워즈의 자선전의 내용을 책에서 기술하기 전, 자신의 소감의 말을(153-156 페이지) 먼저 기술하였다. 거기에서 에드워즈의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극찬하는 말들을 수 없이 했다. 백금산은 4 페이지의 지면을 할애하여 (에드워즈가 하나님과 만남의)‘체험’을 가졌다는 표현을 20번 했고, (에드워즈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다는 말을 2번 했다. 백금산이 에드워즈를 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장이라고 평가하며 한국 교회에 에드워즈를 소개하는 일에 헌신하게 된 것은 바로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잘 만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서전에 나오는 에드워즈의 신비주의

백금산 목사가 번역한 에드워즈 자서전 속에 에드워즈가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을 가지는 특별한 경험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자들은 과연 이러한 내용이 정당한 기독교인의 신앙의 범위에 속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때때로 산 속에 혼자 있거나 어느 한 적한 들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몰입해 있는 일종의 어떤 환상이나 끊임없는 생각 또는 상상에 빠지고 했습니다.”(166)

에드워즈는 자신이 예수님과 직통으로 대화하였고, 환상을 경험하거나 내면의 특별한 상상에 몰입되는 경험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목장을 걸어다니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험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내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166)

“거의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고요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순수함, 하나님의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 그리고 이런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167)

에드워즈는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을 받았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지혜, 순수함을 보았다고 한다. 과연 이것은 로마서가 말하는 자연계시의 영역에 속하는 정당한 은혜일까? 중세의 수도사들이 추구한 신비적인 영적인 경지, 또는 관상기도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은혜와는 아주 다른 것일까?

“해마다 내 시간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종종 숲 속이나 조용한 곳을 혼자서 걸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168)

“종종 나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허드슨 강가의 조용한 곳에서 휴식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고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곳에서 달콤한 시간을 가졌습니다.”(173)

에드워즈는 자신이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한다. 그의 하나님과의 대화는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오고 간 대화와 같은 방식이었을까? 아니면 에드워즈 자신의 주관적인 상상 속에서 일어난 대화였을까?

“거기서 약 3개월 동안 아파서 누워있었습니다. 병중에 있을 때 기쁘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달콤한 능력으로 나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176)

“노샘프턴에 온 이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보면서 종종 하나님 안에서 달콤한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나에게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177)

성령이 에드워즈에게 달콤한 능력으로 찾아왔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은 사람이 마치 바람과 같은 성령을 감각으로 경험하고 느낄 수는 없다고 하셨다. 성령의 역사하심의 열매와 결과를 보고 성령이 일하셨음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언제나 성령은 그 자신의 존재를 사람에게 알리시지 않고, 자신이 오고 가는 것을 사람에게 들키시지도 않는다. 항상 성령은 성경의 말씀을 앞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며 일하신다. 그런데 에드워즈에게 찾아온 성령은 자기의 존재를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내어 에드워즈에게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삼위일체적인 분으로 영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품격 높은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79)

에드워즈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나타났다고 한다. 성경 66권의 완성 이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경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기 전에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왜 다른 사람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으시는 것일까? 

“나는 종종 그리스도의 탁월한 충만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온유하시고 적임자이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만 왕으로서 내게 나타나셨습니다.(180)

바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처럼, 에드워즈에게도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면 에드워즈에게 특별계시가 임한 것이 아닌가? 성경 66권의 완성 이후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우리에게는 왜 이런 일이 없을까?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습니다. 휴식 장소에 도착해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즉, 그 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되신 것과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또한 그 분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이 은혜는 아주 조용하고 달콤하게 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보다 크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모든 생각과 개념을 삼킬 만큼 충분했습니다. 이 체험은 제가 판단하기에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눈물을 홍수처럼 쏟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텅 비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 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180-81)

에드워즈는 자신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아름다움을 마치 사도 요한이 천국보좌의 환상을 본 것처럼 보았다고 한다. 그런 체험을 자주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정상적인 성도의 하나님 체험일까? 성경 66권의 말씀 외에 이와 같이 하나님을 만나는 다른 방법이 정말로 있는 것인가? 

“나는 여러 번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느꼈고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사역을 느꼈습니다.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영혼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달하심을 통해 무한한 영광과 달콤한 샘으로 나타나셨습니다.”(181)

에드워즈는 또 자신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계시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달콤한 샘물과 같이 다가오셨다고 한다. 에드워즈의 이런 경험이 참이라면 환상을 보고 성령의 임재를 즐기는 신사도파들은 무엇이 잘못인가? 에드워즈에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에게는 왜 안 일어나는 것인가? 오직 성경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기독교의 진리가 때로는 거짓인가?

“최근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더욱 충만하게 그리고 더욱 지속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즐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에 계시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184-85)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체험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어려움 가운데서 살아보아야 체험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닐까? 환상이나 무슨 방법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인가? 신비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식인지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신앙의 세계에는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일 외에 무슨 방법으로 중보자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을까?
 


이상웅 교수도 에드워즈가 성령과 특별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상웅 교수는 에드워즈가 성령의 달콤한 영향력을 즐기고 누렸다고 에드워즈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드워즈는 1차 대각성 운동을 변호하는 글들 중의 하나인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이 끝 부분에서 ‘나로서는 일 년 내 내 예언적인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영적이며, 신적인 아름다움과 무한하신 은혜, 그리고 죽으신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거룩한 믿음을 발후하게 하시고, 신적인 사랑과 달콤한 만족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겸손한 기쁨을 자아내시는 성령의 달콤한 영향력을 단 15분간만이라도 즐기는 편이 좋다.’고 고백하였다.” 1)

에드워즈의 ‘성령의 달콤한 영향력’ 표현은 참으로 모호하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성령의 달콤한 영향력이라고 말하는지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고, 신비주의 성향에 해당된다고 비판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하고,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고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만 역사하신다고 예수님께서 성령의 사역을 정의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달콤함이란 매우 주관적이고 신비적이고 위험스러운 말이다. 예수님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 다음과 같다고 하셨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그와 와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니”(요 16:8)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 16:14)


에드워즈의 이단성을 신앙의 탁월성으로 승화시킨 백금산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에드워즈가 자서전에 남긴 자신의 하나님 체험에 대한 내용들은 심각하게 검증되어야 할 내용들이다. 그런데 백금산은 이런 내용을 아무 검증 과정없이 곧 바로 최고의 신앙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백금산이 어떻게 이런 심각한 내용들을 미화시켰는지 그의 말을 보라!

“그의 신학의 중요한 핵심과 골격은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자신의 회심과 그 이후의 지속적인 하나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54)

“자서전에 나타나 있는 에드워즈의 생애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만나과 교제가 계속된 생애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154)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즉, 실존적인 하나님 체험입니다.”(154)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체험에 대한 내용들을 그의 자서전에서 여러 가지의 용어로 표현합니다. 즉 감각하다(sense), 보다(see), 나타난다(appear), 여겨진다(seem), 느껴진다(feel), 체험한다(experience), 맛보다(taste)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155)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은 무엇보다 달콤하고 기쁘고 즐거운 체험이었다는 것을 그는 달콤함(sweet), 즐거운(delight), 기쁜(joy), 유쾌한(pleasant) 같은 형용사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어들의 빈도수는 에드워즈 자서전의 거의 매 페이지 마다 나타나고 있습니다.”(155)

“우리는 에드워즈의 저작 전체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와 내용들이 에드워즈의 자서전 속에 체험의 형태로 씨앗과 못자리판처럼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155)

 

백금산과 에드워즈, 둘다 신비주의자

백금산 목사가 번역한 내용이 맞다면, 18세기 뉴 잉글랜드에서 살았던 에드워즈는 신비주의 이단성이 농후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성경 66권 외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없다고 보는 기독교 정통신학과 맞지 않는 신앙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백금산이 번역한 내용이 맞다면, 모세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주 직접 보고 경험하였다고 고백하는 에드워즈는 이단이다. 과연 우리가 그를 기독교 신앙의 모델로 받을 수 있을까?

이제 생각이 매우 복잡해지려고 한다. 백금산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에드워즈는 과연 건전한 신앙의 사람인가? 백금산의 취향에 맞게 가공된 인물은 아닐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려고 한다. 틀리면 왜 틀린지 누가 설명해 주기 바란다. 

1. 만일 백금산의 번역이 맞다면 에드워즈는 신비주의 이단이었다.

2. 신비주의자의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스승으로 삼고 존경하며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아온 백금산도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이후 에드워즈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몸의 마비, 진동, 쓰러짐, 울부짖음, 이상한 웃음, 환상, 입신과 실신 등이 나타는 것은 유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 미주 ---

1)Edwards, Distinguishing Marks, WY 4:281(「부흥론」양낙홍 역 (부흥과개혁사, 2005), 364-365. 이상운,「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부흥과개혁사, 2013),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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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