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전 세계교회와 색다른 신앙생활의 규범(regula fidei)으로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십일조와 새벽기도회다. 그래서 공적 모임으로 주일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고 중시하여 직분 임명에도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넘어서 새벽기도회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신앙적 사고로 생각해 볼 것이 새벽기도회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교회의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규범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질문해 보아야 할 시기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농경사회에서 새벽기도회가 필요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사회에서 사실상 새벽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고 현실적으로 새벽기도회 출석률은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세례신자들 중에 매우 적은 수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비판적으로 보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은데 과연 바람직한 신앙적 사고라 할 수 있는 것인가를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과거에 조직신학자 고 이정석 박사(개혁신학연구원,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새벽기도의 신학적 반성”이라는 글을 작성하였는데 핵심적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독특한 기도양식으로서, 세계교회에 기도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증거하는 자랑이기도 하다. 물론, 새벽기도는 고대에도 있었고 서구에서도 발견되지만, 한국교회와 같이 전국의 모든 교회가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를 모이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복음서에는 새벽에 기도하신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주님께서 매일 새벽에 이와 같이 기도하셨는지, 혹은 필요할 때만 새벽에 기도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이 새벽기도가 개인기도이었고 집단적인 기도회가 아니었다.

...(중략) 교회는 끊임없이 그 활동에 대하여 신학적 반성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이러한 반성은 교회의 사역을 보다 더 성경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한국교회의 자랑인 새벽기도에 대해서도 우리는 솔직하고 진지한 반성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로, 새벽기도의 내용을 바꿔야 한다. 한국에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새벽기도의 전통이 있었다. 불교에는 새벽예불이 있었고, 도교에는 새벽에 여인들이 부엌에 정한수를 떠놓고 칠성신에게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새벽기도의 창시자로 알려진 길선주목사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도교의 수련에 정진하여 "길도사"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차력과 축지법, 그리고 공중부양을 하였다고, 그의 아들인 길진경목사가 전기 [영계 길선주]에서 증언하고 있다. 그는 이미 새벽에 수련을 하고 있었으며, 21, 49, 백일기도등에 익숙해 있었다가, 개종후에는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도들에게도 새벽기도가 전혀 저항감없이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기도문화 때문이었다. 이는 실로 그리스도를 만난 문화의 변혁으로서, 우상에 대한 기도가 참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변화된 실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의 대상은 바뀌었지만, 기도의 내용은 변화되지 않은데 있다. 부처나 칠성신에게 기도하던 내용을 대상만 바꾼채 그대로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기도는 배워야됨을 가르쳤다. "이방인의 기도"를 중단하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성도들에게는 새벽기도라는 형식이 무비판적으로 연결되면서, 근본적으로 기도를 반성하고 배우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무시되어 버렸던 것이다.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가르침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불교나 도교에서 배운 기도가 대표적인 "이방인의 기도"로서, 기독교인은 더 이상 그런 기도를 계속하지 말아야 하며 그릇된 기도는 아무리 오래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불신앙의 행위임을 준엄하게 선언한다.

우리 기도의 중심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여야 하며, 이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움으로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계산하는 기도의 양이 결코 기도시간의 총계가 아니라 진정한 기도의 총화임을 생각한다면, 한국교회가 과연 많이 기도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벽기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기복적인 기도만능주의를 부추길 것이 아니라 진정한 헌신과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둘째로, 새벽기도회가 진정한 기도회가 되어야 한다. 초기의 새벽기도회는 "대중적으로 매일 계속한 것이 아니었고 개인의 실천은 그 개인 자유에 일임했고, 교회의 특수사정이 있을 때마다 그 필요에 의해 집단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그러다가 성경공부가 추가되어 점차 새벽예배화 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기도회가 예배로 바뀌는 현상은 삼일기도회에서도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새벽기도회가 공적 집단기도보다는 사적 개인기도를 위한 모임으로 변질되어, 새벽예배후에 자유로이 개인기도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의 집단적 기도는 마18.19-20에 근거를 두고 있는 특별한 기도방식으로서, 개인기도와 비교되지 않는 응답과 능력이 약속되어 있다. 새벽기도회는 같은 제목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기도가 선행되는 것이 특권을 향유하는 것이며 그 후에 개인기도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실상부한 기도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새벽기도회로 유명한 한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수천명이 새벽에 모이는데 감동되었으나 너무 예배중심인데다가 기도할 여유가 별로 주워지지 않는데 아쉬움을 느꼈다. 또한 상당수의 교회들은 너무 소란하여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의 문제도 있다. 교회는 합심기도를 증진하고,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절제시켜 최적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새벽기도를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신 이유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서 성도가 항상 찾아가 기도할 수 있도록 개방할 필요가 있다.

새벽기도를 처음 시작한 평양 장대현교회는 "신자 각자가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매일 한번씩 교회당에 나가서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심령의 새로운 힘을 얻게 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예배당을 개방했고, 교회를 순례하는 신도의 발자취가 새벽부터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단적인 기도회도 새벽기도만으로 그치지 말고, 서구교회와 같이 교회안에 많은 기도구룹을 조성하여 서로 시간이 맞는 사람들끼리 다양하게 모여 합심기도하고 개인기도도 할 수 있도록 현대와 같이 복잡하고 분주한 시대에는 기도회를 다변화할 필요도 있다.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는 성도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교회가 획일화된 사고방식으로 나머지 다수의 교인을 위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기도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지도하지 않는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중략) 셋째로, 새벽기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독특한 현상임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이 한국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자인하고, 세계교회에 보편적 의무로 강요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자랑이라고 할 때도, 거기에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기도가 자랑이 될 때, 그것은 외식이나 자만이 될 수 있다.

창세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벽기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생활을 영위해 왔으며, 그들의 영성을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다른 영성적 대안을 부정하고,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모든 세계교회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영적 교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새벽기도를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기도를 하지 않았다거나 그들의 영성이 우리보다 저급한 것은 아니었다.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서구교회에서도 훌륭한 신앙과 고도의 영성을 가진 고매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 시대와 장소의 문화에 따라 다양한 기도형식이 사용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단지 어느 시간에 기도하느냐 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뿐이다.

위의 내용들을 통해서 생각해 볼 것은 21세기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새벽기도회가 각 신자의 신앙의 평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현실은 새벽기도회가 객관적 기준으로 삼기에 사실상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율법주의가 무엇인가하면 한마디로 “신앙생활에서 자신의 행위를 강조하여 자기 의를 내 세우는 것”으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대표적 율법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은 자기 의로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기도, 금식, 구제로 내세워 영적 교만에 빠졌다.

이러한 율법주의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비판하고 경고하였기에 초기교회에서 율법과 복음을 조화를 추구하여 율법주의로부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지켰지만 이단인 ‘영지주의’가 등장하여 율법주의가 다시 영향력을 가졌고 중세 시대에도 ‘공로신앙’이 자리를 잡았지만 16세기 교회개혁을 통해서 율법주의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시간이 지나면서 청교도들과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에 의해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어 결국에는 한국교회 안에 ‘율법신앙’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더불어 ‘번영신앙’과 짝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들을 바른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새해를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새벽기도회를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삼지 말고 각 신자의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기준으로 각 신자의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는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로 사도신조, 십계명, 주님의 기도를 제대로 올 바르게 알고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리교육’이 중요하기에 개혁주의 교회는 칼뱅의 말대로 “주님의 교회는 교리교육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가르침에 따라 교리교육을 제대로 실천하여 신자들을 복음 신앙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신자의 ‘청빈한 삶과 나눔의 실천’이 신앙의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고 이러한 신앙의 삶을 보여준 초기교회 신자들, 칼뱅의 제네바교회, 초기한국교회에서 볼 수 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한다면 루터가 말대로 “주일예배는 천국을 가는 훈련”으로 주일예배에 참여 할 수 없는 직업이 아닌 이상 반드시 주일예배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주의해야 할 점은 청교도가 강조한 주일성수의 개념이 아니라 칼뱅이 말대로 특정한 날만이 아니라 모든 날을 주님의 날로 이해하고 특별히 초기교회 신자들이 주일에 모인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잊지 않고 성찬식을 행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개혁주의 교회는 주일예배와 수요기도회로 공적 모임은 충분하고 새벽기도회는 사적 모임으로 신자 개인의 자유 시간으로 행할 것이 되어야지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삼아 영적 자유를 주지 못하여 정죄가 되는 ‘율법신앙’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새벽부터 나오는 것은 사실상 건강(인간의 수면에서 좋은 호르몬이 나오는 시간이 밤 11-2시, 새벽 4-6시)에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도 잘못된 기도로 회개가 없이 간구만 하여 ‘번영신앙’을 만들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개혁주의 기도론에서 기도의 순서는 3가지로 찬미와 감사, 회개, 간구인데 새벽부터 나와 기도를 할 때에 무슨 회개를 할 것인가라는 신앙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목사들의 심각한 설교 문제로 설교학자들은 질적인 설교가 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설교의 횟수를 줄이라 하는데 새벽기도회로 인한 현실은 바른 설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합해보면 반드시 새벽기도회는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공적 모임도 아니고 각 신자들의 신앙 평가 기준이 되어서도 안되고 목사들에게 질적인 설교를 위해서 반드시 없어져야 하므로 개혁주의 교회는 새해를 맞이하면 개혁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고 대안으로 사적인 가정 기도회도 아니고 공적인 수요기도회 또는 아침이나 저녁기도회(화, 목, 금)로 충분하고 정말로 기도회에서는 공동 기도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기도를 하느냐 또는 하지 않느냐”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기도의 대상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기에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기도교육’이고 시간을 정한 기도보다 평상시 기도가 더 중요하기에 바른 기도를 각 신자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즉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그동안 한국교회가 기도는 정말 많이 강조하였지만 바른 기도를 잘 하지 못했고 바르게 가르친 ‘기도교육’이 없었는데 대표적인 현상이 성경 본문 해석을 왜곡한 ‘야베스의 기도’가 지금도 인기가 있는 것이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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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옥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개혁신학연구원, Knox Theological Seminary(D.Min.), Grace Theological Seminary(D.Miss.Pro.)에서 공부하였고, <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등 6권의 저서와 1권의 공저를 출판하였다.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강사였고, 현재는 경북 영주의 바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바른성경아카데미(RBA) 원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 실천하려고 연구하는 실천신학자이고, 또한 장례지도사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고 있다. potentia-dei@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