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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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은 목사가 지난 해 6월에 SNS에서(facebook.com)에 서철원 박사의 신학 사상에 대해 게시한 글에 75개 정도 댓글이 달리면서 많은 호응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 정이철 목사가 <바른믿음>을 통하여 손성은 목사의 글에 대한 답변을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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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은 목사가 포스팅한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바른믿음의 글을 재인용).

“한국교회의 그 유명한 신학자, 그것도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강조한다는 한 신학자의 말입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한국교회만 아니라 2천년 세계교회가 깨닫지 못하였고, 칼빈의 신학도, 청교도의 신학도 자신의 깨닫는 바에 미흡하고 문제점이 있으며,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행위언약/은혜언약의 가르침도 전적인 은혜를 알지 못하고 행위로 구원얻음을 강조함으로 복음이 복음되지 못하고 변질시키게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 제 폐친분들, 특별히 개혁신학과 신앙을 소중히 생각하시는 분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옛 사람을, 지난 죄를 용서받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우리 안에 있는 저 욕망을 제어 받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죄의 욕망이 일어날 때 주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에서 나를 깨끗하게 한다고 선언하면 그 말씀에 역사하는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죄의 욕망이 소산돼요! 흩어져요! 없어져요!

옛 사람의 죄를 뿌리채 뽑아내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하고 났는데, 얼마 지나면 또 그 욕망이 올라와요. 그러면 또 그 말씀을 선언하는 것이예요. 주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선언함으로 죄 욕망이 소산돼요. 그것이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예요. 전적인 은혜로 ...’”(손성은 목사의 페이스 북, 2018.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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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은 목사가 “그 유명한 신학자”의 말의 한 부분으로 그의 신학 전체를 평가하려는 묘한 접근 방법에 대하여 아쉬움이 크다. 그리고 전후 맥락에 맞지 않는 ‘언약 이해’를 거론하였는데, 대체 어떤 점을 지적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므로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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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박사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언약 구도인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룬 신학자이다. 그 논의는 “A New Thought on Covenant Doctrine”, Studies Reformed Theology (Journal in Netherlands), 1996년 유럽개혁파학회에서 공식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개혁신학의 언약 이해는 코케이우스 이후 두 언약 체계를 확립했다. 서철원 박사는 행위언약 개념에 대해서 첫언약으로, 은혜언약을 새언약으로 구도화시켰다. 서철원 박사와 같은 언약 이해는 2,000년 교회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언약에 대해서 더 다양한 이해가 있다. 매리데스 클라인이 창조언약과 은혜언약(참고. 김찬영,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CLC, 2018년), 칼 바르트적 언약 이해, 새관점학파의 언약 이해 등 다양한 언약 이해가 난무하고 있다. 크게는 두 언약 체계와 한 언약 체계로 구분할 수 있다. 개혁신학, 서철원, 마이클 호튼은 용어과 개념은 다르지만 두 언약 체계를 이룬다. 칼 바르트, 톰 라이트는 한 언약 체계를 가진다. 손성은 목사는 어떤 언약 이해를 견지하는지 궁금하다. 칼 바르트적 언약 이해나 새관점학파(톰 라이트)의 한 언약 구도는 개혁파적 언약 이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무죄한 아담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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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은 목사 자신도 죄사함을 받았을 것이다. 손성은 목사는 자신의 죄사함에 대한 신학적 구도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서 박사님의 견해를 비평하기만 했다. 서 박사와 손 목사의 죄사함의 구도가 같지 않은 것 같다. 손 목사의 죄사함의 방식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필자는 서 박사님의 죄사함의 구도를 필자는 이렇게 이해한다. “첫째, 불신자의 죄가 용서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은혜로 신자가 된 뒤로 회개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셋째, 그 회개에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 효력을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복음을 선포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필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고백하며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며, 죄에 넘어졌을 때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붙들고 십자가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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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은 목사가 캡쳐한 서 박사님의 글에서 서 박사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잔존하고 있는 옛사람에 대해 언급했다. 옛사람과의 사투가 그리스도인의 영적전투이다.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거의 비아냥한 손 목사 자신은 과연 어떻게 옛사람과 관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면 좋겠다. 손 목사는 자신이 어떻게 옛사람과 관계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서 박사님은 옛사람과 치열하게 쟁투하는 상황, 그리고 그 쟁투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부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 박사님의 논지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부착하기 위해 오직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는 것을 피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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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목사는 한국교회의 그 유명한 신학자의 강의의 특정한 부분을 캡쳐해서 전체 혹은 급소를 공격하려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습관은 매우 나쁘고 저급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격으로 얻은 효과가 없지 않은 것 같다. 서철원 박사라고 항상 완전할 수 있을까? 서철원 박사를 개혁신학 진영의 한 대표적인 학자로 평가한다면, 손 목사의 그런 냉소적인 비평이 과연 무슨 유익이 있었을까? 손 목사의 사상이 서 박사와 사상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포스팅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서철원 박사는 한국과 세계 신학계에서 중요한 지표 가 되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서 박사님의 신학 사상을 파편적이고 냉소적으로 대하는 손 목사의 신학 사상의 특징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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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인 뒷담화는 나름대로 재미와 유익이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개혁신학을 대표하는 서 박사님과 같은 분에 대한 그런 글을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의 편집, 파편적인 제시는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호기심과 오해를 유발시키는 해로움이 있다.  자기의 믿음과 자기의 신학 이해를 밝히는 내용이라면 그런 뒷담화라도 유익이 없지 않았을 것이나,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학자는 공인이기 때문에 인정 혹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과 정체성을 먼저 밝혀야 할 의무도 있는 것이다. 비판을 할 때에는 그 이유가 존경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분의 사상을 거부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 목사의 태도는 맹목적이었다. 맹목적인 비아냥 투의 비판, 무책임한 비판은 학도의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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