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샤머니즘적인 조상제사가 제거되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기능적 대치’로 추도예배를 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교파를 초월해서 사실상 한국의 다수의 교회들이 명절과 기일에 추도예배를 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역사에서 어떻게 추도예배가 자리를 잡았는지를 보면 1897년 ‘조선 그리스도인 화보 9월호’에서 최초로 추도예배를 한 자는 이무영이라는 정동감리교회 신자로 모친 기일이 되자 고민하다가 착안해서 하였다는 이 기사를 보고 이 교회의 다른 신자들도 한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1934년 감리교회 총회에서 추도예배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부모님 기일 기념 예문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추도예배는 1950년대에 성결교회가 하고 1970년대말에 장로교회도 인정하게 되었고 지금에는 한국교회의 90% 이상이 하고 있는데 이제는 개혁주의 교회들이 추도예배를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지를 올바르게 물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추도예배는 인본적이고 신본적이지 않다는 것을 용어에서부터 볼 수 있는데 추도라는 뜻이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슬퍼함’인데 성경은 ‘금지된 애도 풍속’으로 추도를 분명하게 금하고 있다(신 14:1-2).

그리고 추도예배가 궁극적으로는 ‘죽은 인간을 우상화하는 작업’이 될 수 있기에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모세가 죽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우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신 34:5-6).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보다는 죽은 인간을 우상화하려는 죄악성이 지배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칼뱅은 자신의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을 제네바의 공동묘지에 만들게 하고 작은 돌판에 이름의 약자(JC)만 새겨 놓으라 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으로 오는 것이 자신이 우상화가 될 위험성을 없게 하려 한 것이다.

이 얼마나 바른 개혁주의 신학적 사고를 가진 칼뱅의 유언인가를 알 수 있고 사실상 성경에서 신앙적 인물들의 죽은 날을 기념하여 예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가진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한국에 들어와서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조상제사를 분명하게 반대하였고 신자들이 격은 고통에 대해서 마포삼락(Samuel Hugh Moffet)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자들에게 최대의 장애물은 한국 유교전통의 제사의식이었다. 아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를 배반하고, 자신의 의무인 죽은 사람에 대한 효를 그만두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구조 전체가 유교적 형태로 짜여있는 나라에서 이 보다 더 큰 죄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욕을 먹고 돌을 맞는다. 그리고 종종 가문에서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법을 어긴 이방인의 부류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 (중략) ... 여성들 역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매를 맞고, 때때로 살해되곤 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충성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선교에서 분명하게 ‘조상제사에 반대’하였지만 어리석고 교만한 정동감리교회 신자가 감리교회 선교사들의 동의도 없이 한 추도예배가 인기가 되고 나중에는 감리교회 총회에서 인정이 되어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말하는 ‘교리와 장정’의 예문서로 삽입이 된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국교회 전체를 추도예배라는 비성경적이고 비개혁주의 신학적 사고로 개혁주의 교회들이 죽은 인간을 우상화하는 인본적 예배를 만들게 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주후 3세기에 죽은 자들의 무덤 앞에서 성찬식을 행하였고 주일에 행해지는 성찬식에서 죽은 신자들의 기억하기 위해 이름을 불렀던 것이 발전되어 중세교회에서는 ‘성인숭배’라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지만 16세기 교회개혁을 통해 루터와 칼뱅은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천주교회는 해마다 11월이 되면 ‘위령성월’이라 지키는데 위령이 뜻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함’으로 추도의 뜻하고 대동소이하고 사실상 한국교회가 행하는 ‘추도예배’하고 별반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들은 추도예배보다는 추모예배라 하는데 추모의 뜻이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인데 사실상 추도나 위령이랑 사실상 별차이가 없는 그냥 말장난(wordplay)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개혁주의 교회들은 추도예배가 죽은 인간을 우상화하는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효(孝)로 미화하지 말고 십계명의 제 5계명대로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 효를 행하고 기일에 추도예배를 하지 않고 명절에도 친인척들이 추도예배를 하지 않도록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추도예배는 비성경적이고 비개혁주의로 ‘죽은 인간을 우상화하는 어리석은 짓’으로 사실상 ‘십계명’의 제 1과 2계명을 범하는 죄이기에 16세기 교회개혁자인 루터와 칼뱅이 반대한 것이고 한국에 들어 온 장로교회 선교사들도 반대한 것을 기억하고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추도예배와 더불어 개혁주의 신학적 사고를 해야 할 문제가 ‘세배’로 조상을 섬기고 윗사람을 존경하는 예의에서 생겨난 풍습이라 하지만 문제는 인간에게 하는 ‘절’이 사실상 ‘종교적 행위’라는 사실이다. 즉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설’을 맞이할 때마다 하는데 문제는 절이 “종교의례인가 또는 윤리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종교의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원래 한국은 절을 하지 않고 민간신앙으로 비손(손을 빈다)을 하였는데 불교와 유교로 인하여 시작이 된 것이 ‘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은 불교에서는 불자들이 부처의 법을 대신하는 자에게 하고 유교에서는 군사부일체 사상으로 하는 것으로 불교와 유교가 인간을 신격화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 ‘절’이고 사실상 인간 안에 있는 ‘얼’에게 올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인간에게 ‘절’을 한 내용은 고대의 풍습이지 성경적인 것이 아니므로 ‘고대 문화(Ancient culture)’와 ‘성경적 문화(Biblical culture)’를 구분해야 하고 히브리어 ‘니쉬타하웨’는 신이나 왕 앞에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머리를 포함한 온 몸을 땅에 붙여 절한다는 것이고 사실상 신에게만 행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흙으로부터 만들어진 후 잠시 살다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절을 하게 된 것은 ‘인간을 신격화’하기 위한 것으로 인간은 타락 후에 신격화한 왕이나 조상에게 하게 되었는데 이는 ‘복의 주체’를 바르게 알지 못한 죄악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상 십계명의 ‘제 2계명’에 해당이 되기에 이제부터는 ‘세배’로서 ‘절’을 하지 말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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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옥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개혁신학연구원, Knox Theological Seminary(D.Min.), Grace Theological Seminary(D.Miss.Pro.)에서 공부하였고, <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등 6권의 저서와 1권의 공저를 출판하였다.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강사였고, 현재는 경북 영주의 바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바른성경아카데미(RBA) 원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 실천하려고 연구하는 실천신학자이고, 또한 장례지도사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고 있다. potentia-dei@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