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목사가 2월 2일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린 글로 인해 또 심각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분이 노 목사의 글에 이상한 내용이 많으니 분석해 달라면서 전문을 보내왔다. 가장 충격적이고 놀라운 내용은 바로 다음의 말이었다.

“칭의란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노 목사, 2월 2일 페이스 북)

노 목사는 이미 예수가 예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능동순종(율법준수)를 했다는 사상을 주장하여 심각한 이단성 시비를 당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노 목사는 불과 며칠 만에 또 다시 그 못지 않은 심각한 말을 하였다. 대체적으로 노 목사가 하는 말은 앞뒤의 짜임새가 엉성하여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신’이라는 말은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신학 사상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피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노 목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셨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예수가 능동순종으로 자기 자신이 구원받게 했다는 주장, 즉 이미 먼저 강하게 지적받은 이단성 발언의 내용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노 목사는 여전히 예수가 능동순종으로 자기를 구원받게 했다는 기존의 이단적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 보인다. 단지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리스도가 이루셨다고 말을 바꾸고 있을 뿐이다.

이것 외에도 노 목사의 글에는 자신의 이단적인 능동순종 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이해할 수 없는 괴변들이 많았다. 전체적인 소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노 목사는 정통신학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씩 분석하면서 설명해보자. 

“그리스도의 농동적인 순종은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적 구조다”(노 목사)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사상이 종교개혁의 핵심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와 종교개혁을 완성한 칼빈에게서 그것이 중요하게 취급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에게는 단지 십자가 신학으로 연결되는 신자에게 임한 ‘수동적 의’의 개념만 있었다. 칼빈에게는 능동이건 수동이건 전혀 없었다.

“아담의 최초의 죄는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는 ‘범책’과 정녕 죽으리라는 ‘벌책’으로 구성되어 있고”(노 목사)

범책, 벌책이라는 말은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공인된 신학 용어가 아니다. 아담의 '원죄'와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가 법적으로 아담의 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있음을 의미하는 '죄책'이 있을 뿐이다. 노 목사는 대중을 헷갈리게 만든다. 자신의 신학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말해주면 좋겠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의 속죄를 해석하면서 벌책, 다시 말해서 사망의 형벌은 그리스도가 대속하셨는데 아담의 범책 곧 행위로 지어진 죄들”(노 목사)

‘아담의 행위 행위로 지어진 죄들(?)... 무슨 개념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성경에는 아담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즐거워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려고 결단하고 선악과를 먹은 죄만 나온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밖에서 살면서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인가?
 

노 목사의 페이스 북 캡쳐 사진(2월 2일)


“‘원의의 주입’은 이런 맥락이죠. 즉, 주입된 의는 바로 사망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이 지은 자범죄의 범책과 벌책, 그리고 조상이 물려준 원죄의 범책을 순종의 공로로 갚아야 하는 구조였습니다.”(노 목사)

어느 나라의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일까? 천주교는 영세를 받는 순간 원죄를 제거하는 은총이 주입되고, 그때까지의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닌가? 그리고 그 이후에 지은 큰 죄와 작은 죄들에 대한 대책을 따로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었던가? 자범죄의 범책과 벌책, 원죄의 범책 ... 이런 용어는 어디서 왔을까? 이런 용어들을 남발하면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제 22항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위치에서 행하신 모든 거룩한 행위들과 그분의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십니다.’라고 고백했고 고재수(N. H. Gootjes) 교수는 벨직 신앙고백서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백하는데 있어서 모호하지 않다고 말합니다.”(노 목사)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1년 작성되었고, 저자 드 브레는 1567년에 순교했다. 이때 능동순종, 순동순종 개념이 있었던가?

“칭의와 성화라는 종교개혁 공통의 신학적 구조가 이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전가를 기본 합의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서 확인되냐면, 루터파의 신앙고백서인 Augsburg Confession와 Formula of Concord는 칭의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백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노 목사)

루터는 신자의 구원에 미치는 ‘수동적 의’(passive righteousness)를 강하게 주장했고, 그것으로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했다. 루터를 어거지로 이용하여 자신의 이론을 변증하려는 노 목사의 의도가 안타깝다. 루터파의 신앙고백서가 개혁신학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이 구분의 핵심적 장치가 무엇이었냐면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전가된다고 정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와 성화를 구분짓게 하는 핵심적인 해석의 키워드였습니다.”(노 목사)

노 목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성화가 이루진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어디에 그리스도의 율법순종, 즉 능동순종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성화가 이루어진다고 말씀하는가?

“중세 후기 신학은 이 순종을 개념은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주입된 의’에는 이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의 그 범책과 자범죄에서 비롯되는 벌책과 범책은 ‘주입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를 근거로 순종해서 얻어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이죠.”(노 목사)

개혁신학에서 신자에게 '주입된 의'를 가르치는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는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된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들어본다. 참으로 해괴하고 금시초문이다.

“능동적인 순종은 어느 신학자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공교회의 신학적인 입장입니다.”(노 목사)

공교회의 신학적 입장이란 교부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의 신학을 말한다. 그때에는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가 핵심이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이라는 신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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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