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학문을 진행할 때에 사고 체계를 갖추는 것은 당연하다. 체계가 없을 때에는 많은 혼란을 양산할 것이다. “체계 없는 사고 체계”에서 나오는 산물은 반드시 혼란을 선물로 제공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완전한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인간에서 나온 산물은 위험하다(마 15:11). 그럼에도 인간에서 나온 산물로 인류는 유지되었고, 유지되어가고 있다. 인간이 갖는 부조리의 원인이며, 인간미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문하는 사람은 체계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한다. 기존에 사용하는 어휘 개념을 이해하며 사용하는 것이고, 자기 개념을 자기-어휘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학생은 기존 어휘 개념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선생은 자기-어휘 개념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평생 학생이어도 좋다. 옛날 장례 행렬 만장(輓章), 지방(紙榜)에 범인은 ‘학생’으로 표기했는데,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학생의 영광을 알지 못한다면 범인의 죽음으로 부끄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의 현장에서 죽은 학생은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표현이다. 누가 학자가 되고, 박사가 될 것인가? 평생 학생이 학자이고 박사이다.

“우연성과 필연성”은 철학과 과학 개념이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칸트나 헤겔에게서도 주요하게 논의했던 테제이기도 하다. 철학에서 인간 존재를 우연에 산물로 규정했다. 오페론(Operon) 가설을 발표한 프랑스의 생화학자인 자크 모노(Jacques Lucien Monod, 1910-1976)는 『우연과 필연』(1970년)에서 생명의 기원과 진화 과정은 ‘필연’이 아닌 ‘우연의 결과’라고 피력했다. 세계의 기원을 우연으로 볼 때와 창조주 하나님 신앙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견해를 배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시대는 두 세계관으로 대별시킬 수 있다.

철학과 과학은 창조를 우연으로 볼 것인가? 필연으로 볼 것인가?를 토론한다. 그러나 신학에서 창조는 비필연적 산물로 규정한다.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창조 세계를 이루신 것을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러나 그 창조 세계에서 창조를 바라 볼 때에는 우연과 필연의 두 세계관이 대립한다. 그러나 결국 비필연적 세계관과 대립하게 될 것이다.

신학에서 창조를 비필연적으로 본다는 것은 근원에 대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신학에서 창조를 비필연성으로 보는 것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자존성). 전능하신 창조주은 자존하시고 완전하시기에, 그가 이루신 6일 동안 창조한 세계는 완전하다. 그 완전에 우연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난제이다. 우연에서 시작한 우연이 아니라, 완전에서 시작한 우연을 구분해야 한다. 그 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죄가 필연적이 되고, 죄의 기원을 하나님께로 둘 수 있다. 죄의 기원을 하나님께로 두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해야 한다.

그래서 신학은 죄를 비실체로 규정했다. 완전하시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죄(罪)에서 비롯된 양상이 악(惡)이다. 의(義)에서 비롯된 양상은 선(善)이다.

그런데 창조에서 아담에게 ‘조건’으로 영생을 주었다는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완전’과 ‘조건’은 유사한 어휘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 아담에게 조건을 협상한 것이 아니고, 자기 계명을 명령하셨다. 그 계명은 단순했다(아담 언약, 행위 언약, 첫 언약).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조건문은 “나무 열매를 먹지 않으면 살고, 먹으면 죽는다”가 조건이다. 성경은 “모든 것을 먹고, 그 나무 열매만 먹지 말라”는 명령이다. 언약에서 쌍무적(雙務的, bilateral) 개념이 아닌 편무적(片務的, unilateral) 언약이라고 한다. 조건이 없는 편무적 언약인 첫언약을 조건을 둔 쌍무적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원죄 이해는 언약, 칭의, 종말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인식론적 시작은 현재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단번에 주신 구원)를 루터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라고 했고, 칼빈은 신학의 경첩(hinge)라고 했다. 개혁신학에서 발전시킨 언약 사상인데, 쌍무적과 편무적 개념으로 나뉘었다. 이신칭의와 쌍무적 언약 이해(언약의 조건성)가 잘 부합되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부조리의 단초는 원죄 이해를 조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기원을 우연으로 보는 철학과 과학에서 죄는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현상이다. 기원을 창조주로 믿는 신학에서 죄는 비필연적인 현상이고, 원죄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있지만 하나님을 기원으로 하지 않는 현상이다(WCF 3, 4, 5, 6, 7장 참고).

그리스도인은 세계(창조)를 우연이나 필연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창조주께서 시작한 창조를 반역한 인류, 그 속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사는 하나님의 세계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창조 밖에 계신 창조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Omnipresence)을 믿어야 한다. 그 일은 반역한 죄(원죄)가 제거된 뒤에만 가능하다. 원죄가 제거되지 않는 수준에서는 세계를 우연이나 필연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설득하여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전혀 없다.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으로 성령이 역사하여 믿으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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