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우편이 고경태 박사

‘방언(方言)’은 표준어로 사투리, 즉 지방어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여러 의미로 신학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단수형(글롯사)과 복수형(글롯사이)으로 등장한다. 이창모 목사는 복수형이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로 이해했다. 방언은 1세기 예루살렘과 고린도에서 발생했는데,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이창모 목사는 고전 14:14-15절에서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린도전서 이후로 방언은 등장하지 않았다. 이창모 목사는 몬타누스파들이 방언했다는 견해를, 몬타누스의 추종자인 프르스길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키벨레(Cyblele) 신전에서 이상한 노래로 흥분시키는 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교회사에서 방언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1906년 아주사 부흥운동에서 방언이 등장했는데, 초기 방언도 기도가 아닌 복음전도를 위한 수단으로 방언이었다.

그런데 칼빈의 제네바요리문답에서 ‘방언’이 있기 때문에, 그 당시에도 방언 현상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제네바요리문답 240-247에서 등장한 어휘 때문이다. 우리는 영어 번역을 의존했는데, ‘the tongue’을 ‘방언’으로 번역했다. tongue는 ‘혀’, ‘언어’라는 의미가 있다. 반드시 ‘방언’이라고 번역하지 않아도 될 어휘이다. 라틴어 원문 어휘는 lingua이다.

행 2:4에서는 다른 언어들로 말함(loqui variis linguis)이고(개역개정), 행 2:6절은 자기 방언으로 들었다(audiebat unusquisque lingua sua illos loquentes). 사도행전 2:6에서 방언은 자기 지역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고전 12:10 여러 방언들(alii genera linguarum), 고전 14:2 방언(lingua)은 단수로 방언하는 사람이 하는 한 방언이다. 성경에서 방언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문법체계를 가진 언어(외국어)라고 볼 수 있다.

1901년 1월 1일, 찰스 파함 목사의 회중 중 아그네스 오즈만이라는 여학생이 안수를 받고 처음 방언이 발생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유사한 현상이 발생했고, 파함이 그 현상이 자기에게도 임하기를 사모했었다. 1905년 텍사스에 있는 파함의 벧엘성경학교에 흑인학생 윌리엄 세이무어이 공부했다. 이후 세이무어는 설교자로 초방받아 LA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초청받은 교회가 그의 심각한 이단사상 때문에 한 번의 설교를 관계를 단절해 버렸다.

이후 세이무어는 몇 사람의 여 신도들과 인근의 아주사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다. 1906년 4월에 바로 그곳에서 현대의 방언의 전조가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윌리엄 세이무어는 오순절 역사라고 규정하고 강력하게 확산시켰다. 처음 방언이 발생했을 때 성령의 역사로 규정하고, 사도행전처럼 선교 현장에서 복음전도가 가능한 언어체계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 방언으로 복음전도가 되지 않음을 알았지만, “단순한 소리를 성령이 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이 오순절주의이다. 신사도주의에서는 방언을 영언(靈言)으로 규정하고 영통역(靈通譯)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1세기 예루살렘 혹은 고린도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방언이 두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지방언어(문법체계)가 있는 방언과 둘째 소리(문법체계가 없는)인 방언이다. 성경의 방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인 방언’이 아니다. 비록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할지라도 타인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야 한다는 면에서 예언이나 기도나 모두가 동일하다. ‘tongue’는 ‘혀’, ‘언어’이지, ‘의미없는 소리’라는 개념은 없다. KJV는 an unknown tongue이라고 하여 의미는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번역했다.

제네바요리문답 240-247에서 방언(lingua, tongue)은 성경 어휘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지만, 1세기 예루살렘이나 고린도 상황에 대한 고려가 아닌, 16세기 제네바 교회에서 행할 기도에 대한 문답이다. 제네바에서 lingua는 문법체계가 있는 언어를 의미한다. 문법체계가 있는 언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언어, 열정(affection)이 없는 기도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외국 언어(exotica lingua)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문답했다(247문).

개혁된 교회는 기도에서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며 규범적이고 규칙적인 기도문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반드시 이해한 문장을 사용해서 이해할 문장으로 기도해야 한다. 회중 기도할 때에 회중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 언어(외국어)로 기도한다면 형제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형제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 제네바요리문답에서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로 기도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예언이었고, 몬타누스의 방언은 예언도 기도도 아닌 영매적 방언이었다. 20세기 아주사 방언은 복음 전도의 방편으로 방언이라고 오해되었고, 후에 선교 현장에서 시도한 결과 실패했다. 그들은 실패한 방언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로 전환시켰다. 결국 “의미없는 소리로 기도할 수 있다”고 잠정적으로 확정한 것이다.

아주사 부흥 전에는 의미없는 기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이고 규범적인 기도서가 문제였다. 천주교는 의미없는 방언 기도와 규범적인 기도문을 모두 갖고 있고, 오순절주의나 신사도주의는 의미없는 소리로 하는 기도를 영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네바요리문답은 의미있는 언어 체계여도 믿음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며, 의미가 있어도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로 기도하는 것은 위선이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훈련시켰다.

일단 16세기 제네바에서는 “의미 없는 소리뿐인 기도로서 방언”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의미 없는 소리뿐인 기도로서 방언” 아주사 부흥 운동에서 시작된 것, 즉 “전도용 방언”이 라고 오해되었으나 훗날 실패로 판명된 후 대안으로 고안된 “거짓된 방언”이다. 아주사 부흥 운동에서 발생한 방언은 성경의 “방언”, 16세기 제네바에서 언급한 “방언”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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