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프레임의 개혁신앙이란 무엇인가? (2)

존 프레임 박사

성경을 믿는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아는 것은 종종 어려운 문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 자체나 심지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 조차도 너무 모호하고, 심지어 오도되기도 한다. ‘정통주의’는 수염 난 사제들을 연상시킨다. ‘보수주의’는 종교적인 확신보다 정치적인 입장 혹은 괴팍한 고집불통(a temperamental stodginess)처럼 들린다.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는 과거에만 해도 어떤 매우 위대한 기독교 학자들에게 적용되던 것이, 오늘날에는 반지성주의를 연상시키는 비난이 되어 버렸다.

나는 성경을 믿는 모든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을 설명하는 최고의 용어가 ‘복음주의’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단어 또한 역사를 통해 다소 모호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 용어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의 성격을 가리키기 위해 루터주의 종교개혁자들이 먼저 사용했고, 따라서 오늘날에도 유럽 대륙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이 다소 ‘루터주의자’와 동의어로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어권 세계에서 ‘복음주의’가 두드러지게 사용된 것은,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그리고 다른 이들의 설교 아래 일어난 18세기의 ‘복음주의 영적각성’의 부흥운동으로부터 유래했다. 웨슬리의 신학은 아르미니언주의였던 반면, 휫필드의 신학은 칼빈주의였다. 그래서 복음주의 운동 자체는 아르미니언주의 요소와 칼빈주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영어권 세계의 많은 교파들은 이 운동에 의해 심오하게 영향을 받았다.

일찍이 복음주의운동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많은 교파들이 19세기에 자유주의가 되었다. 자유주의자 찰스 브리그스(Charles Briggs) 같은 사람을 ‘복음주의’라고 부르던 것이 흔한 일이었다. ‘자유주의적 복음주의’(liberal evangelical)라는 표현은 그 당시에 모순이 아니었다. 비록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영국 신학계를 가리켜 ‘자유주의적 복음주의’라고 종종 말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체로 이 용어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수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주의’가 불명예스런 개념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18세기 때 사용되었던 ‘복음주의’의 의미를 되살려 자기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용어로 받아들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칼 헨리, 해롤드 오켄가, 하워드 퓨 등과 같이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며 ‘신앙의 근본진리들’을 고수하는 개혁파 그리스도인들과 비개혁파 그리스도인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 용어(an umbrella-term)가 되었다.

모든 개혁신학을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개혁파 신자들이 때때로 부흥주의(revivalism)를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개혁파 신앙은 부흥운동 배경에서 유래된 이 이름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또 다른 이유는, 많은 개혁파 기독인들이 아르미니언주의 신학과 칼빈주의 신학 사이의 차이점이 너무 크다고 믿어서, 아르미니언주의자들과 공통의 이름 아래 한데 묶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넬리우스 반틸을 비롯한 어떤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복음주의가 ‘비개혁파 개신교’를 의미한다.

나의 멘토 반틸 교수의 선례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음주의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역사적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라는 단어는 칼빈주의를 포함하여 왔기 때문이다. 더 중요하게는, 성경을 믿는 개신교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어떤 용어가 필요한데,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명칭이 내게는 ‘복음주의’이다.

나의 관점에서, 개혁파 신앙인들과 복음주의자들은 많은 중요한 교리적 문제들에 있어서 일치한다. 아마 틀림없이 가장 중요한 교리적 문제들에 관해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개혁앙이 복음주의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신학의 주요 신앙들은 무엇인가? 내가 정의하기는, 복음주의자란 역사적 개신교 신학을 고백하는 이들이다. 그것은 다음 신앙들을 포함한다.

1)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참되시고, 능력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무(無)로부터 창조하시어 홀로 신앙적 경배와 무조건적인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궁극적인 실체이시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자의적으로 불복종하였으며, 그로 인해 마땅히 죽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죄책을 갖게 되었다.

3)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다. 그는 (문자적으로, 실제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그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는 예언을 성취하셨다. 그는 우리의 죄책과 형벌을 대신 지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살아나셨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4) 죄로부터의 구원은 우리의 선행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을 믿음으로 받음으로써 오는 것이다. 구원하는(구원 얻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우리의 희생제사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우리의 유일한 기초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하는(구원 얻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순종의 동기를 부여한다.

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한다.

6) 기도는 단지 명상 혹은 자기 계발이 아니라,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속자와의 참된 대화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고, 세상에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간구를 드린다.

이 신앙의 진술들은 ‘신앙의 근본진리들’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성경의 핵심 복음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 점들에 관해 개혁주의자들은 모든 복음주의자들과 일치한다. 나는 개혁주의자들이 “우리는 아르미니언주의자들과 전혀 공통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마음이 상한다. 사실, 우리는 그들과 공통적인 성경적 복음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나는 분명히 아르미니언주의 신학이 복음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진심으로 복음을 믿는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개혁신앙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면에서 아르미니언주의 형제자매들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신앙의 타락에 맞서는 면에서도 그들과 일치한다. 우리는 세속 인본주의, 이단(사교), 뉴에이지운동,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전통에 대항하는 일에서도 모든 복음주의자들과 일치한다. 내가 ‘자유주의’라고 할 때는 앞서 언급한 ‘신앙의 근본진리들’ 중 어떤 것이라도 부인하는 종류의 신학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주의’라는 말에는 그레샴 메이첸 시대의 현대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신정통주의 전통(반틸에 따르면 ‘신현대주의자들’인 바르트와 브루너)과 자유주의신학, 과정신학,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신학과 같은 더 최근의 신앙운동을 포함시킨다. 최근의 신앙운동들이 종종 자유주의와 대비되기도 하지만, 나는 성경을 믿는 전체 개신교인들을 묘사하는 한 용어가 필요한 것처럼, 신앙의 근본진리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부인하는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는 용어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가장 적합한 용어는 ‘자유주의’이다.

위 1)-6)의 진술과 일치하는 범주들 안에서 자유주의 전통의 몇 가지 전형적인 공식들(formulations)을 요약하겠다.

1) 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죄를 벌하지도 않으시며 기도에 응답하지도 않으시는 ‘인격의 피안,’ ‘선악의 피안’이시다.

2) 죄란 인간의 외적인 법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타인들과 그 자신의 참된 인간성으로부터의 소외(alienation)다.

3) 예수는 여러 가지 방식에서 하나님과 부합하는 인간이었다. 문자적 기적과 부활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더 높은 어떤 실체의 상징일 뿐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나 혹은 구원의 배타적 방식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거나, 또는 ‘구원 받은 자들’이란 여러 가지 윤리적 프로그램과 정치적 프로그램을 고수하는 자들을 가리킬 뿐이다.

5) 성경은 오류가 있고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의 글로서 어느 정도신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6) 기도는 본질적으로 자기 지시적이다.

이처럼 ‘복음주의 복음’이 자유주의자들의 복음 거부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우리가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특별히 신학공부 과정을 시작하는 학생들이 직접 이 문제들을 심사숙고하기를 권한다. 지금이 여러분이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의 관계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할 때다.

여러분은 성경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위대한 주(主)시라고 믿는가? 여러분 자신이 죄책 아래에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는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교회 출석, 교회 봉사, 지적 교정을 포함하여) 여러분 자신의 공로를 신뢰하는가,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만을 신뢰하는가?

만약 이런 종류의 질문에 결코 답해 본 적이 없다면, 부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하건대, 이제 거기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학교에 왔다고 해서 모두 이런 의미의 신앙인이지는 않다. 여러분이 줄곧 그리스도인과 같은 삶의 행동을 해 오고 있다면, 자신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한, 이런 방식으로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울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가 신학 전문가가 된다면, 자신의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따라서 여러분에게 어린아이 같이 되어 다른 사람의 지혜를 온전히 신뢰해야 한다고 권하는 사람의 말을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 9).

-존 프레임 박사(리폼드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

최덕성 교수의 리포르만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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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 교수는 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고,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의 총장이다. ‘신학자대상작’으로 선정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을 비롯한 약 20여권의 귀중한 신학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의 대표이며,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를 운영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공급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