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


글을 시작하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 말씀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고,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오고 오는 모든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성경 말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요3:16만큼이나 이 말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읽혀지는 개역개정(개역한글)에서 행1: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은 오역되었으며, 또 “권능을 받고”는 오석되어 대부분의 교회에서 잘못 적용되고 있다. 이렇게 행1:8은 너무나도 중요한 성경 말씀임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오역과 오석으로 인해 눈치 채지 못하게 은근히, 그러나 의외로 강력하게 한국교회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는 성경 말씀이기도 하다.
 

행1:8의 배경

누가(Luke)는 행1:3-5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간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 준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3절). 이 ‘하나님 나라’는 공생애 기간 중 예수께서 가르치신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중요한 메시지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또 하나의 말씀은 성령 세례를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4절). 이 성령 세례는 이미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며, 이제 ‘몇 날이 못 되어’ 제자들은 약속대로 성령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5절).

행1: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에서 우리 성경에는 빠뜨렸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me.n ou=n”(고로,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왜냐하면 6절은 앞(4-5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 ‘성령 세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 6절의 문두에 있는 “me.n ou=n”(고로, 그러므로)을 빠뜨리면 안 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빠뜨리지 않고 잘 번역했다(NIV: So when they met together,/KJV: When they therefore were come together,).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6절)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여러 번 계속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묻자와 가로되’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의 “evphvrw,twn”(에페로톤)은 ‘미완료 과거’ 동사로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를 한, 두 번 묻고 그만 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계속 질문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로마제국에 의해 사형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해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는 순간 마음은 한층 고무되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이 하신 3-5절의 말씀을 정치적인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했음을 예언한 것으로 오해하고 흥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 여러 번 집요하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를 질문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사실상 왕국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왕이 없는 나라, 즉 주권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방인들의 불법적인 지배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대리자인 다윗 가문의 자손을 통해 정치적 주권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지금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철저하게 정치적이고 영토적인 나라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전에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회복된 정치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될 것을 확신하고, 자신들이 그 이스라엘 왕국에서 한 자리에 차지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부탁했으며(막10:37/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또 큰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기까지 했다(눅22:24/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때 예수님은 도래될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이 꿈꾸는 정치적인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임을 말씀하셨다(막10:42-44). 물론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10:42-44)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면서 가슴 부풀게 꿈꾸었던 나라가 정치적인 이스라엘 왕국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은 이들의 질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자들의 질문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엄연히 미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심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avpokaqista,neij”(아포카디스타네이스)는 현재형 동사다.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적인 회복이 금방 일어날 것으로 여겼던 제자들의 조급함을 나타낸다. 또 “이때니이까”라는 말에서도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로부터 당장 해방될 것을 기대했으나(눅19:11/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예수님은 7-8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과 범위(땅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시기(성령이 임하실 때)와 그 권세(성령이 주시는 말씀의 권세)에 대한 제자들의 잘못된 이해와 기대를 바로 잡아 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2:7)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때와 기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cro,nouj h' kairou.j”(크로누스 에 카이루스)는 복수명사로서 “cro,nouj”(크로누스)는 연대기적 시간들, 즉 일반적인 시간들(times)을 의미하며, “kairou.j”(카이루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순간들(epochs, the dates, the seasons), 특정한 때(시점)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cro,nouj’(크로누스)는 종말이 도래하기 전, 보통 ‘말세’라고 일컬어지는 시간들, 즉 종말이 오기까지의 시간들을 의미하며, ‘kairou.j’(카이루스)는 예수님의 재림 때의 시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cro,nouj h' kairou.j”(크로누스 에 카이루스)는 ‘때와 기한’ 보다는 오히려 ‘기한과 때’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원문 직역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cro,nouj h' kairou.j”(크로누스 에 카이루스)가 함께 언급될 때에는 거의 종말론적인 시간을 의미(살전5: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본문의 “cro,nouj h' kairou.j”(크로누스 에 카이루스)는 “종말의 때”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종말의 때’는 시작되었고 예수의 재림으로 종결되겠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때와 기한’, 즉 “종말의 때”는 전후문맥에 비추어 볼 때,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종말의 때’, 즉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의 시작’을 말하는 것 같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시기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1:7)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 주권 안에 있는 문제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와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를 8절에서 말씀하실 준비를 하신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도 성육신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와는 본질저으로 다른 나라임을 분명히 하셨듯이(요18: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행1:8에서도 제자들이 기대했던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질문한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와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기 위해, 8절에서 “그러나”(avlla./알라)로 말씀을 시작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우리 성경에는 헬라어 원문에의 “그러나”(avlla./알라)를 ‘오직’으로 번역하여, 뒷부분의 “성령이 임하시면”을 강조했지만, 이것은 원문의 의미를 왜곡시킬 만큼 심각에 가까운 오역이다. 왜냐하면,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그러나”(avlla./알라)를 꼭 살려야지, ‘그러나’ 뒤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임의로 “그러나”(avlla./알라)를 ‘오직’으로 번역하여 ‘성령이 임하시면’을 강조한 것은 한국교회의 입맛에는 아주 잘 맞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8절에서 강조하신 것은 ‘성령’이 아니라, 문장 전체의 주어와 동사인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의 실수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롬1:17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도 나타난다. 헬라어 원문에는 ‘오직’이라는 단어 없이 단순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다. 그러나 우리 성경에서는 하나같이 모두 ‘오직’을 넣어서 ‘믿음으로’를 강조했다. 원문에 없더라도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첫째 문제는 어떤 경우라도 원문에 없는 말을 인위적으로 넣어서 원문에서 강조하고 있지 않은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심각한 무제를 야기할 수 있다. 둘째 문제는 원문에서의 ‘믿음’의 의미가 도리어 약화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박국 선지자나 바울이 왜 ‘오직 믿음으로~’가 아니라 단순히 그냥 ‘믿음으로~’리고 묘사했을까?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살리라’는 진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냥 단순하게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오히려 강력하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또 ‘오직’으로 강조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의 강력한 의미가 오히려 약화되는 문제가 생긴다.

헬라어 원문에서 행1:8의 문두에 나오는 “avlla.”는 앞 문장에서 제자들이 언급한 ‘이스라엘 나라’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의 뒤에 언급되는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른 ‘나라’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부정 접속사’이다(‘avlla’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헬라어 부정 집속사 ‘de.’보다 훨씬 더 강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낸다. ‘de.’가 ‘but’라면 ‘avlla’는 ‘never’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avlla.”를 사용하셔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으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열망하는 ‘이스라엘 나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성경과는 달리 영어 성경에서는 “avlla.”를 “그러나”로 제대로 번역했다(NIV: But you will receive power/KJV: But ye shall receive power).

놀랍게도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도 오역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에서 ‘임하시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evpelqo,ntoj”(에펠돈토스)는 ‘부정 과거분사’이기 때문이다. 헬라어에서 ‘부정 과거분사’는 본동사의 동작보다 앞서 일어난 동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임하시면’은 본문의 본동사인 “~받고, ~되리라”보다 앞서 일어난 동작의 시간을 나타낸다. 따라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은 가정법이 아니라 시간을 나타내는 ‘분사구문’이다. 이런 헬라어 원문을 염두에 두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을 제대로 번역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실 때”가 된다.

또 “임하시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evpelqo,ntoj”(에펠돈토스)는 ‘위에’를 의미하는 접두어 ‘evp’를 가지고 있으므로, ‘~위에 임하실 때’로 번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을 번역할 때에도 이런 부분을 정밀하게 염두에 두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실 때”로 번역하여,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놓치지 말고 독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또 일관성 없게도 우리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evpelqo,ntoj”(에펠돈토스)를 제대로 번역했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3:22)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2:3)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32:15)

전체를 다시 정리하면, 우리 성경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을 바르게 다시 번역하면 “그러나 성령이 너희 위에 임하실 때”가 될 것이다. 제자들이 열망하는 ‘이스라엘 나라’는 무력으로 로마제국을 쫓아낼 때 시작되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제자들 위에 임하실 때’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헬라어 원문대로 제대로 번역했다.

NIV: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comes on you.

KJV: But ye shall receive power, after that the Holy Ghost is come upon you.

예수님은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이 품은 야망의 대상이었던 정치적 세상 나라에서 주관자들이 행사하는 권능 대신에(막10: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고상한 하늘의 권능을 ‘성령이 임하실 때’ 제자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 권능으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요16: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다시 말하지만, 말세의 때에 성령이 임하셔서 주의 제자들에게, 즉 이 땅의 교회들에게 주시는 권능은 ‘땅 끝까지의 증인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말씀의 능력’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의 권능을 엉터리 해석하여, 엉터리로 적용함으로써, 교회를 하나님 나라가 아닌 타락한 세상 나라, 즉 제자들이 열망했던 정치적인 이스라엘 나라로 변질시켜버렸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그것을 세계 최고로 극대화시켜서 교회사에 길이 남을 슬픈 신화를 만들고 말았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범위가 “땅 끝까지”임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사49:6/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예수님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의 근동 지역 사람들은 ‘땅 끝’을 지중해 서쪽 끝에 위치한 스페인(롬15:23/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의 복음 전파 경로는 ‘예루살렘’(행1:1-7:60), ‘유대와 사마리아’(행8:1-11:18), 그리고 ‘소아시아와 로마’(행11:19-28:31)였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상적인 ‘땅 끝’은 ‘서바나’(스페인)였을지 모르지만, 사도행전에서의 실제적인 ‘땅 끝’은 ‘로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니 제자들로 말미암아 세워진 참 교회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들)이 되리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가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확장되고 전진하는지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증인들’(moi ma,rturej/모이 말투레스)이란 공생애에서 부활 후까지의 예수님을 본(아는, 경험한) 자로서, 특히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선포할 수 있는 자들을 말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내 증인들’(moi ma,rturej/모이 말투레스)이란 ‘십자가의 복음’ 선포로 하나님 나라를 전진시키는 오고 오는 모든 참 교회(성도들)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돈으로, 조직으로, 큰 건물로, 무력으로 확장되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시고 성령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군사들인 성도들이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확장되는 나라이다. 진짜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세속적인 힘이 전혀 없는 무력해 보이는 나라이다. 그래서 힘이 있는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껏 핍박한다. 왜냐하면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세상 나라의 죄를 꾸짖고 회개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의 ‘증인’(ma,rtuj/말투스)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순교자’의 의미로 발전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의 증인들은 대부분 세상 나라에 의해 순교했기 때문이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참 증인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난당하며, 멸시당하는 순교자의 삶을 살 수밖에 때문이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행22:20)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2:13)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계17:6)
 

글을 마치며

세상 나라의 흥왕은 규모 커야하고, 군사가 많아야하고, 그래서 강한 무력(돈과 세상 권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타락한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 나라를 장악하고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우는 나라이다. 따라서 참 교회가 가져야 하는 능력은 세상적인 ‘능력’(돈, 권력, 큰 조직 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말씀의 능력’이다. 여기서 ‘말씀의 능력’이란 ‘하나님 나라의 진리’(십자가)를 위해 세상 나라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 능력이다. 종말의 때의 진짜 교회는 부활을 믿으며, 죽음으로 말씀을 전하다가 죽음으로써 승리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패배가 아니듯이 교회가 세상에 의해 죽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다. 그런데 세상(적그리스도)의 힘이 참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상에 의해 죽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가 믿음을 변질시켜 세상(적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구걸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세상에게 패한 주류 한국교회의 슬픈 모습이다.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승리한 교회인가? 아니면 패배한 교회인가?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1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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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