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3권 20장에서 칼빈의 방언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을 접했습니다. 이전에 방언이 언급되는 딱 한 문장을 보았는데, 오늘은 조금 깁니다. 총 4권 20장으로 구성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대작에서 방언에 대한 언급이 이 정도로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기독교의 방언 은사에 대한 이해에 논란이 종교개혁 당시에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기독교가 출범되는 되던 초기에 잠시 교회에 존재하였으나, 곧 바로 사라졌으므로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은사의 목록에는 방언과 방언 통변의 은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약 2년 후에 기록된 로마서 12장의 은사 이야기 속에는 예언은 있어도 방언이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사실 예언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는 같은 성격의 은사입니다. 둘다 하나님이 교회에 직접 말하시는데 사용된 계시적인 은사입니다. 계시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이 전달되어지는데 사용된 은사라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계시가 있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입니다. 만일 누구라도 지금도 계시가 있다고 하면, 바로 치명적인 이단시비를 당하게 됩니다. 어떤 이단전문가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돕는 이단시비를 당하는 사람을 의해 오히려 그 사람의 문제를 비판하는 저를 이단으로 몰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 쪽에서 퍼뜨린 그런 내용의 글들이 지금도 그 문제의 사람을 옹호하는 싸이트들을 통해 계속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이단으로 몰려고하였던 그 사람이 결국이단성을 가졌다고 판정되어 여러 정통 교단들이 교류를 단절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책에서 찾아낸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도 특별계시가 있으나, 반드시 그 내용이 성경에 의하여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매우 위험한 이단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특별계시가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과 우주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합니다. 자연계시는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나, 누구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으로 주어지는 계시, 즉 특별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계시만 특별계시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주어지는 모든 계시를 특별계시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신학과 교리의 절대적 사실은 특별계시가 성경 66권으로 완성되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의 계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죽으심과 부활이 하나님의 말씀계시의 완성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1,2)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성육신 자의 활동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심이라고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꿈, 환상, 천사의 메시지, 음성 등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자자들과 신약의 성경 저자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실 때에 사용했던 계시적인 현상들입니다. 계시의 완성, 즉 성경의 완성과 함께 그런 계시적인 현상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 정통신학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의 죽은 자를 살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이고 앉은뱅이였던 사람들을 성하게 만드는 특별한 치유역사도 특별계시를 전하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였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도들이 전하는 그리스도 계시가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계시임을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그런 특별한 이적이 나타날까요? 나타나면 좋겠으나, 특별계시를 내포하는 모든 성령의 역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정통신학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12장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내용 속에 계시적인 은사인 방언은 없는데, 왜 동일하게 계시적인 은사인 예언은 있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예언에는 두 종류의 예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을 예언이라고 하고, 또한 그렇게 주신 예언을 교회에 가르치고 설명하는 행동도 예언이라고 합니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6절)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은사로서 봉사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알고 설명할 수 있는 범의 안에서 겸손하게 가르치고 설명하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날 이 성경 구절을 근거로 스스로 성령을 빙자하여 예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짓된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과 메시지를 받는 예언이 없습니다.

그런 종류의 꿈, 환상, 음성도 없습니다. 계시가 들어있는 꿈을 꾸고, 음성을 듣고, 또한 방언을 하고, 그것을 스스로 통역하는 모든 사람들은 거짓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 이단들입니다. 눈이나, 귀나, 마음이나, 그 무엇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직통으로 받는 것은 불법입니다.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방언을 받는 것이 이런 엄청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방언을 말하고, 또한 그것을 통역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있어도 더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연관된 은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칼빈은 방언이 이방인들의 실제 외국어로 하나님이 교회에 말씀하셨던 은사로 이해하였습니다.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하나님이 복음을 말하게 하시는 은사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주장은 1900년대에 미국의 이단들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칼빈의 이전 시대와 칼빈의 종교개혁 시대에 까지 신비한 방언의 은사로 기도한다는 방언에 대해서는 아무도 주장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모두가 성경의 방언은 외국어로 복음을 말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사였고, 교회에 잠시 있다가 사라졌다고 알았습니다.

<기독교강요> 3권 20장에서 칼빈이 두 번째로 방언을 언급하는 곳의 제목은 "기도는 일상용어로 해야 한다"(33절)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다루는 내용이 아닙니다. 공중기도 할 때에는 모두가 아는 모국어로 해야지, 외국말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외국말로 기도하지 말라는 내용 속에서 방언이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독교의 방언은 외국어로 하나님이 말하시는 은사, 즉 하나님이 친히 직통으로 말씀주시는 은사였다는 것입니다. 33절의 첫 문장에서 칼빈이 말하는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공중기도도 종래의 관습 같이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는 헬라 말로,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틴말로 드릴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아는 국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 그들은 사도의 솔직한 비난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외국어로 장구한 기도를 고고하게 드리지만, 그 말의 뜻은 자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기독교강요, 3.20.33)

칼빈의 또 다른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고 말하였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기도에서나 개인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듯하여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한다." (기독교강요, 3.20.33)

칼빈은 '영으로 기도하고'를 배운적 없는 외국말로 방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의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과 그 시대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방언을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구사하면서 하나님이 시키는 말을 하는 특별한 은사로 보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기독교와 정통신학은 2천년 동안 성경의 방언을 이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이 완성되기 전, 하나님께서 특별한 역사를 일으키면서 교회를 세울 때, 즉 사도들의 특별한 사역을 돕기 위해 잠시 동안 교회에 주신 은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퍼뜨린 미국 사람들이 이단이었다는 것은 조금 신학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합니다. 이단들이 도입하고 주장한 것이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을 말씀 드릴까요? 그 이단들도 자신들이 도입한 방언이 외국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선교를 의해 힘써서 와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어졌다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1906년이었으므로 외국에 가서 실제 선교에 활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 이단들이 죽은 후에 인도 등의 나라에 가서 활용해 본 결과 전혀 실제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때부터 현대의 거짓 방언은 하늘의 신비한 기도의 은사로 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을 심도있게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 영혼들을 무더기로 미혹하고 있을까요? 아무도 정확하게 그 이유를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9-12)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하나님이 택하시고 지키시는 자에게는 악한 것의 역사가 미치지 못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뜻 가운데 미혹을 허락하셨을지라도 택하산 그 영혼은 반드시 진리의 사랑이 임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당신이 일평생 진리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참 복음 가르치는 교회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종 정이철 목사가 맥도날드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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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