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1권(56-60) 요약


[56] 17세기 이미 개혁신학을 침식하고 파괴시킬 원리들이 현존해 있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파와 칼빈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문주의(로마 교회에 지적이고 심미적 원리로 반대함)와 재세례파, 소니누스파(세르베투스의 후계자들)가 있었다.

재세례파와 소시누스파는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개혁교회와 신학에 항상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종교에서 신비적 요소와 합리적 요소를 대변했다. 소시누스주의는 로마교회가 자연과 은혜를 분리하는 체계에 갇혀서, 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주창했다. 인간은 신 앞에서 죽을 존재밖에 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도 한 선지자에 불과했다(260쪽). 재세례파도 자연과 초자연이 평행하다. 소시누스파는 자연 때문에 은혜를 버렸고, 재세례파는 자연을 은혜에 희생제물로 바친다. 두 경향은 주관주의를 조장했고, 권위와 결별, 인간 자율을 부추겼다(261쪽).

바빙크는 이러한 첫 산물을 알미니안으로 제시했다(261쪽). 아르미니우스가 데카르트주의의 객관성으로부터 해방, 주관주의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데카르트의 추종자들이 상당했고, 그들은 교회에 합리주의를 도입했다. 바빙크는 코케이우스도 데카르트주의의 일환으로 평가했다(262쪽). 바빙크는 코케이우스의 방법이 “영원하고 불변한 것을 한시적이고 역사적인 것의 조류에 끌어내려, 결국 그런 식으로 생성의 개념을 하나님 자신에게 전가했던 것”으로 평가했다(263쪽). 그 코케이우스의 방법을 따르는 부류들이 많았다.

결국 푸치우스파와 코케이우스파 사이의 논쟁이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 싸움은 데카르트주의와 코케이우스주의가 승리했다(263쪽). 바빙크는 개혁파에 스콜라주의가 도입된 것으로 평가했다. 1720년 람페(Lampe)가 우트레흐트에 등장한 것은 코케이우스파의 승리를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소무르 대학도 충격적인 주장의 중심지였다. 존 카메론(1580-1625), 피스카토르(1546-1625)가 연계하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의지는 항상 지성을 따르기에 중생에서의 의지의 굴복은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라고 가르쳤다. 카메론은 지성의 조명을 제안했고, 아미랄두스는 객관적 은혜를 보편적으로 삼았고, 파용은 특별한 주관적 은혜가 불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이로 인해서 이신론과 합리론을 위한 길이 마련되었다(264-265쪽).

영국에서는 비국교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장로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후에 수적으로나 영향력에서 감소되었으며 독립파가 증가했다. 독립파(회중파)는 16세기 로버트 브라운, 프란시스 존슨, 헨리 아인스워드, 존 로빈스에 의해서 신봉되었으며, 시민전쟁 중에 증가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장로파는 다수였고 독립파는 소수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1658년 존 오웬의 주도로 런던에 모여서 사보이선언을 작성했다.

침례파 역시 1633년 자기 교회를 설립했다. 1677년 침례파는 신앙고백서를 산출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사보이선언, 침례파신앙고백서는 교회 정치와 세례에 관한 것이었다(266쪽). 침례파는 알미니안적 침례파와 칼빈파적 침례파로 구분된다.

영국의 시민전쟁(1688년 명예혁명) 기간은 종교적, 신학적 영역에서 커다란 혼란의 시기였다. 온갖 개념들과 경향들이 소용돌이쳐서 혼란을 야기했다. 과거에는 애누리없이 이단으로 간주했으나, 다양한 차이를 가진 집단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반율법적, 도덕폐기론까지 수용되는 형편이 되었다. 종교적 개인주의의 절정은 퀘이커주의였다. 결국 전통, 신앙고백서, 교단에서 해방되어 각 신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이신론의 길을 더 빠르게 열었다. 영국은 중세 시대에 로저 베이컨(실재론), 빌렘 판 오캄(유명론), 프란시스 베이컨(경험주의) 등으로 이신론적 철학 토대가 구비되어 있었다. 기독교는 급속하게 이신론과 융합하기 시작했다. 계시에 이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흄(1711-1776)에 이르러 회의론으로 귀착되었다(268쪽).

[57] 약 1750년경에 개혁파 신학은 사방에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바빙크는 코케이우스가 네덜란드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평가했고, 그 열매를 ‘관용’으로 제시했다(268쪽). 진리의 능력이 부인되고, 고백, 개혁파의 교리들, 원죄, 행위언약, 제한속죄 등을 포기하며, 성경으로 후퇴했다. 항변파(알미니안)과 소시누스가 전폭적으로 수용되었다. 정통 개혁파는 지향하는 알렉산더 콤리, 니콜라우스 홈티우스, 얀 야콥 브라헤 등은 관용론자들에게 심하게 공격을 받았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개펵파 신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퐁텐플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 1685년 10월)으로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났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신론에 사로 잡혀 합리주의로 채색되었다. 18세기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의 글은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다.

1717년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이 중요하다. 이 논쟁은 독립파(회중파) 에드워드 피셔의 작품, <현대신학의 정수, 1645년)에 의해서 발단되었다. 이전 세기 잉글랜드에서 발생했던 신율법주의 투쟁이 스코틀랜드에서 재현되었다. 1719년 4월 제임스 해도우 총장이 개회 설교에서 이 책을 공격했다. 1720년 총회는 <현대신학의 정수>의 몇 가지 주장들을 오류라고 정죄했는데, 이로 인해서 얼스킨 형제, 토마스 보스톤의 입장에 서 있던 제임스 훅, 존 보나르, 존 윌림암스, 제임스 키드, 가브리엘 윌슨, 제임스 위드로 등 12명의 목사들이 분리했다.

신율법주의는 점차 스코틀랜드 신학과 교회에 침투했고, 그것은 교회와 신학이 합리주의로 가는 디딤돌이었다(273쪽). (※ 토마스 보스톤은 율법을 “삶의 규칙”이 아니라 “행위언약”으로 간주했다. 율법폐기주의와 신율법주의의 논쟁은 결코 합치를 이룰 수 없다. 둘 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존중하면서 발생한 것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합치의 문서인데도 불구하고, 합치가 되지 않는 것은 안타깝다. 합치를 위해서는 진리의 내용이 아니라, 복음전도를 위해서 합력할 수 있겠다.)

[58] 19세기 초 개혁파 신학은 유럽 모든 지역에서 슬픈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개혁파 신학이 약화되자 신학에 범신론적 경향까지 투입되었다.

[59] 존 웨슬리는 학문적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유능한 설교자로서 복음을 개인화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생사의 문제로 삼았다(279쪽). 웨슬리와 휫필드로 시작된 감리교는 39신조를 떠난 것은 아니었고, 죄책과 은혜에 대한 즉각적 인식 경험, 개인적 회심과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에 관한 것으로 다른 사람의 회심을 추구하며 다양한 아디아포라에 대해 삼가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현세에서 이룰 수 있다고 추구했다.

감리교가 성공회, 장로파, 독립파, 침례파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280쪽). 바빙크는 감리교 운동의 낭만적 경향에서 옥스퍼드 운동까지 연결된 것으로 제시했다(280쪽). 감리교의 낭만주의 성향은 로마 교회와 연합을 추구했고, 광폭적인 교회 연합 운동을 추구했다. 개신교회의 연합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 엄격한 칼빈주의는 날마다 지경을 잃어갔다. 스코틀랜드 북부와 웨일즈 일부에서 유지되었지만, 학문적 연구와 변호는 존재하지 않았다(282쪽).

그리고 진화론이 영국에서 확장되었다. 기독교와 진화론이 경합하며 종도노선을 옹호했다. 유니테리언은 유신론을 변호하며 진화론을 수용했다. 그리고 1891년 리버풀에 이슬람 사원이 개원했다.

[60] 미국의 개혁신학은 초창기부터 아주 다양한 형태를 보여 주었다(284쪽). 영국, 유럽 대륙의 모든 교회들이 미국과 캐나다에 이주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바빙크는 뉴잉글랜드에 도입된 청교도적 칼빈주의와 장로교적 칼빈주의 사이를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285쪽). 두 형태의 칼빈주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기초하지만, 옛학파와 새학파 사이의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그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는 휫필드와 사역했고, 알미니안을 배격했다. 그러나 그는 에드워즈파, 신신학파, 신광명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후예들은 프랑스 소뮈르 학파처럼 원죄를 부인했고 보편속죄를 주장했다(286쪽). 그의 아들 에드워즈 2세는 본질적으로 휴고 호로티우스의 이론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 사무엘 홉킨스는 페네롱과 마담 귀용이 전개했던 하나님에 대한 사심없는 헌신적인 사랑을 전개했다. 그리고 더 나가 그의 신학은 미래 심판 유예 이론까지 이르렀다(286쪽). 구학파는 옛 칼빈주의를 옹호했는데, 청교도주의(회중파 청교도)는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갈수록 포기했다(286쪽). 1880년 회중교회 대회에서 새로운 고백서를 마련했는데, 특수한 개혁주의 교리를 삭제했다.

미국 장로교도 심각한 위기를 갖고 있다. 1903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해서 채택했다. 알미니안이 유입되었고, 성경무오, 삼위일체,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 제한속죄, 선택과 유기, 영원한 징벌 등이 은밀하게 공개적으로 거부되었다. 미국 칼빈주의의 미래는 낙관적인 장미빛이 아니었다.

※ 개혁교의학은 1928-1930에 출판되었고, 미국 장로교회는 1936년 메이천 박사를 중심으로 분리하게 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