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교회가 장로교 체계를 도입한 것은 1570년 말이다. 그 이전에 주교와 시찰감독(superintendent)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156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자기 교회를 가장 잘 개혁된 교회(the Best Reformed Church)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1)

1558년 말, 스코틀랜드에서 광범위한 개혁운동이 발생했고, 그때 존 낙스(John Knox, 1515-1572)는 제네바에 있었다. 개혁운동을 전개하던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에서 존 낙스의 흔적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낙스는 1547년 세인트 앤드류의 설교자였고, 프랑스에 의해서 점령될 때 체포되어 갤리선의 노예가 되어 노를 젓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석방은 1549년 초 잉글랜드 에드워즈 6세(Edward Ⅵ)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토마스 크랜머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1547년 피터 버미글리(Peter Vermigli, 1499–1562)와 1549년 추방된 마틴 부처와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로 있던 존 낙스를 구출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 교회 질서(ordinal, 1550년)을 제정했고, 1552년에 1549년에 제정된 제1기도서를 폐지하고 제2기도서를 공포했다. 1553년에 칼빈의 예정론과 성찬론이 잘 반영한 42개 신조(Forty-two Articles of Religion)를 공포했다. 에드워즈 6세가 죽은 뒤에 등극한 메리 여왕은 교황주의로 회귀할 것을 추구하며, 잔혹한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메리는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Cranmer)를 비롯하여 리들리(Nicholas Ridley)와 라티머(Hugh Latimer) 등 300명 이상을 처형할 정도로 잔혹했다.

존 낙스는 메리 여왕의 핍박을 피해 신성로마제국과 제네바에서 영어 사용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1559년 5월 2일에 에딘버러로 귀환했다. 낙스가 도착할 때 스코틀랜드는 구교의 아성인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에 확실한 구교 왕국을 유지하려고 했다. 스코틀랜드는 중도정책(via media)을 가진 엘리자베스에게 원군을 요청했고2), 잉글랜드의 지원군으로 프랑스의 공격을 견딜 수 있었다.

1560년 7월 6일에는 에딘버러 조약(Treaty of Edinburgh)을 체결하여, 잉글랜드와 프랑스 군대는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했다.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공식적으로 라틴어 미사를 금하고, 감독제도(Episcopal Church)를 거부했다. 감독제도는 로마를 교회의 원점(교황)으로 한 계급적인 교회 질서이다.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는 왕을 원점으로 하는 주교 제도를 세웠다.

1560년 7월 19일 가일 예배당(St. Giles)에서 낙스가 감사 예배를 인도했다. 스코틀랜드는 독자적으로 종교적 문제를 개혁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섯 명의 존(John)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 준비위원회가 4일에 작성한 문서를 스코틀랜드 의회가 8월 17일 채택했는데, 이것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tish Confession)”3)이다.

여섯 명의 존(John of six clergy)은 존 낙스, 존 위록(John Willock), 존 스포티스우드(John Sopttiswood), 존 윈람(John Winram), 존 더글라스(John Douglas) 그리고 존 로우(John Row)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표준 문서였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작성 원리는 성경무오(the infallible Word of God)였다. 1561년 12월에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근거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했는데, 이때를 장로교회의 시초로 삼았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근거해서 1560년 <제일 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와 <교회 정치>(The Book of Common Order)를 작성해서 교회 질서를 확립했다. 1560년 12월 5일에 프랑스 왕 프랑소와 II세가 죽자, 왕비였던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는 20세의 나이로 1561년 8월 19일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의 화려한 생활을 좋아했는데,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이 모후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어떤 연고도 없는 스코틀랜드 출신 전 왕비를 박대했기 때문이다. 에딘버러의 홀리루드(Holyrood)에서 메리 여왕은 구교의 미사를 열었고 낙스는 강력하게 비판과 저항을 받았다. 그런데 여왕의 부적절한 사생활과 여러 불법 행동으로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폐위를 실현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총회장 조지 뷰캐넌)가 1567년 6월 25일에 개최되어, 추밀원(樞密院, Privy Council) 의원과 귀족들이 참여하여 7월 24일에 여왕의 통치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7월 29일에 여왕의 갓 돌인 아들 제임스 6세(James VI, 1567-1625, 후에 잉글랜드와 통합왕국의 제임스 I세가 됨)4)를 왕으로 옹위하고 섭정으로 모레이(Moray)를 세웠다. 1568년 메리는 탈출해서 대항했지만 패배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망명했고, 칼라일 성에 구금되었지만 잉글랜드 구 교파들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1572년 11월 24일 투쟁하는 과정에서 낙스가 소천했다.

존 낙스를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끈 사역자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다. 앤드류 멜빌은 감독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장로주의를 체계화한 장로주의의 교부(Father of Presbyterianism)이다. 멜빌은 1564년 19세에 파리 대학에서 수학했고 21세에 교수 활동을 했다. 1569년부터 제네바에서 베자의 사역에 참여했다. 멜빌은 제네바 대학 인문학부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김낙중 교수는 제네바에서 카트라이트와 멜빌이 교우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멜빌은 5년 동안 제네바에서 사역하면서 장로 제도를 이해했다.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글래스고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멜빌이 스코틀랜드에 돌아왔을 때 상황은 다시 주교제도로 회구하려고 했었다. 멜빌은 주교목사도 회중을 섬겨야 하는 사역자간 평등 원칙을 주장했다. 멜빌은 1578년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작성했다. <제2치리서>는 노회(presbytery)를 근거한 장로 정치 원리로 교회 질서를 확립하게 최초의 교회 질서이다.

장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주(主)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멜빌은 두 왕국 이론(doctrine of the Two kings and Two kingdoms)을 제언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세상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으로 구분했는데, 멜빌은 두 왕(예수와 왕)과 두 왕국(교회와 왕국)으로 구분했다. 그래서 교회의 왕이신 예수께서 교회를 주관할 수 있도록 제도를 확립했다.

멜빌의 <제2치리서>는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의 사상(Erastianism)과 대치되었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VI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1578년 11세가 되면서 제임스 VI는 통치를 시작했다. 제임스 VI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앤드류 멜빌이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멜빌은 왕의 압정을 피해서 20여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 귀족들은 무력으로 왕을 제압했고, 멜빌 일행이 귀환할 수 있었다.

김중락 교수는 1587년부터 1592년까지를 장로회 제도가 이상적으로 작동했던 기간으로 평가했다. 1592년 황금법(Golden act )이 제정되면서 장로교는 절정에 다다랐다. 1584년 제임스 VI가 주교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 만든 암흑법(Black Acts, 왕은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다)을 무효화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개혁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은 장로 제도를 싫어하는 제임스 VI였다. 제임스 VI는 주교 제도를 결코 굽히지 않았고, 1603년 잉글랜드 왕으로 옹위되면서 혼란은 시작되었다.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과 끊임없는 갈등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1567년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VI는 1603년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여왕 후계자가 되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통합 왕 제임스 I가 되었다. 제임스 1세에 대한 평가는 혹평과 호평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제임스 1세가 번역한 흠정역(欽定譯) 혹은 킹제임스성경(1611년,Authorized Version, King James Version, KJV)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현한다.5) 그 당시 제네바성경(Geneva Bible)이 영국에서 잘 읽혀지고 있었는데, KJV 성경을 번역하여 제네바성경의 영향력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1604년 제임스 1세는 카트라이트를 비롯한 1,000명의 목사가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으로 햄프턴궁전 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를 개최해서 장로회 제도를 도입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왕은 “주교 없이는 교회도 없다”라고 외치며 장로주의를 거부했다. 제임스 1세의 1604년은 칼빈이 소천한지 8년이(1565년) 지났고, 바돌로매 대학살(1572년)로 위그노를 학살한 것을 보았다.

혹자는 청교도에 의해서 KJV가 번역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장로 제도를 싫어하는 제임스 1세가 번역했다. 1604년, 청교도(국교회) 존 레이놀즈(John Reynolds. 1549-1607)가 왕에게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역본을 번역하자고 제안을 했다. 존 레이놀즈는 중도주의자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의 제자였다. 후퍼는 종교개혁자 볼링거와 친분이 깊었다. 제임스 1세는 이상하게도 제네바성경에 대해서 혐오를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부터 잉글랜드 안에 분리주의자(훗날의 회중파 청교도)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The lnvincible Armada)를 격파한 엘리자베스는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발했다.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 I, (1533출생)1558-1603)에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장로주의를,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은 분리주의(Brownist)를 제창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장로파가 많고 분리파는 매우 소수였는데, 제임스 1세 이후에 장로파는 감소하고 회중파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제임스 I 시대에 존 스미스를 중심으로 첫째 분리주의 교회를 세웠다. 1606년 윌리엄 브루스터와 존 로빈슨을 중심으로 두 번째 분리주의 교회가 세워졌다. 1608년 존 스미스는 교인들을 이끌고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고, 1609년 스쿠루비(Scrooby)의 윌리엄 브루스터 교인들은 네덜란드 라이덴으로 이주했다.

제임스 1세는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발했다. 라이덴에서 정착하지 못한 분리주의자들은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1607-1609년까지 신대륙에 버지니아에 정착해서 제임스타운에 개척한 존 스미스(John Smith, 1580-1631)는 잠시 귀국했다가, 1616년 다시 탐사를 가졌다. 1620년 9월 16일 윌리암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7-1644)의 지도로 잉글랜드 남쪽 플리머스(Plymouth)에서 남자는 78명, 여자는 24명, 총 인원은 102명이 출발해서, 두 달을 항해서 1620년 11월 9일에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에 도착했다. 그들이 가지고 간 성경은 제네바성경이었는데, KJV로 곧 전환했다. 분리주의자(Separatists 혹은 Brownist)들은 신대륙에 정착하면서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로 이름을 바꾸었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존 로빈슨의 지도를 받은 헨리 제이콥(Henry Jacob, 1563-1624)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지양하는 새로운 온건파 청교도주의운동(교회 안에 교회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이 독립교회파, 비분리회중주의(Independent, Non-separating Congregationalists)이다. 이들은 온건파 장로파와 또 다른 입장의 청교도주의 운동이다. (이들도 후에 분리주의자들고 함께 회중교회의 조상이 되었다.) 

침례파 운동은 존 스미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영국 국교회 사제였고 제세례파 온건파인 메노나이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김홍기). 스미스는 재침례파인 메노파와 만나면서 그들이 참된 교회라는 것을 인정하며 교류했다. 1612년에 반대자들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런던에서 침례교를 세웠는데, 침례파의 기원은 존 스미스라고 한다. 1638년에는 칼빈의 예정론과 제한적 속죄론을 믿는 ‘특별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 때에 분리파, 비분리회중파, 침례파 등이 형성되었다. 장로주의는 잉글랜드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스코틀랜드 언약도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잉글랜드 장로파는 세력을 확산시키지 못했지만, 분리파(회중파)는 세력이 왕성하게 확산되었다. 과격한 분리파는 식민지에서 활동했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나 사보이선언 작성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비분리 회중파는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운동을 주도했다.

바빙크는 회중파를 통해서 합리주의, 자연주의, 유니테리언이 대거 유입되었다고 분석했다. 제임스 1세 시절에 스코틀랜드는 멜빌을 중심으로 한 장로파를 확립했고, 잉글랜드는 국교회, 로마 교회에서 분리파, 독립파, 침례파 등 다양한 분파가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는 메노나이트, 소시니안 등 다양한 유럽의 이설들이 영향을 주었다.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은 국왕이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순종하며, 교회(the Kirk)를 수호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왕에게 유쾌한 일이 되지 않았고, 끊임없이 종교와 국가 갈등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1733년,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에벤에셀 어스킨(Ebenezer Erskine, 1680-1754)을 중심으로 교회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로 분리되는 결단까지 감행했다.

활발해진 항해술로 유럽 대륙과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유럽의 산물은 잉글랜드로 더욱 용이하게 도입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과 1706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연합 조약(UK, United Kingdom)은 이해의 신기원을 가져야 한다.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잉글랜드 회중파, 침례파를 혼합하여 청교도로 정립한 위인은 로이드 존즈의 『청교도 신앙 : 그 기원과 계승자들』(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서문강 역, 생명의말씀사)로 보인다.

찰스 1세부터 웨스트민스터 총회(청교도 혁명)까지 다음에 다룰 것이다.

 

--- 참고 자료 ---

1) 김중락,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서울: 흑곰북스, 2018), 17.

2) 스코틀랜드 개혁파는 윌리암 메이트란드(William Maitland, 1528-1573)를 잉글랜드에 파견해서 협상을 진행했다.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처음으로 잉글랜드 군대가 스코틀랜드 땅에 들어오는 것을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한다(Douglas, "John Knox and the Scots Reformation," 251). 스코틀랜드 왕실군대와 프랑스 군대와 대치하던 스코틀랜드 개혁파 군대는 잉글랜드와 1560년 1월 27일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상호방위조약인 벌윅 조약(The Treaty of Berwick)을 체결했다. 1560년 6월 10일, 섭정 기즈의 메리가 사망하자 프랑스 군대가 화평을 원했다.

3) 김요섭,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교회론의 구조적 특징과 신학적 의미 연구”, 『성경과 신학』, 68권, 2013년. 이광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서울: 교회와 성경, 2015).

4) 메리 스튜어트의 아버지 제임스 5세는 엘리자베스 1세와 4촌 관계였고, 메리 스튜어트에게 엘리자베스1세는 5촌 아주머니가 된다. 모레이는 메리 스튜어트의 이복 오빠였고, 개혁파를 견지했다. 모레이는 메리 여왕에서 추방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와 연대해서 스코틀랜드에 영향력을 발휘했다(참고 , 김정미, 『연애의 사생활』(서울:다산초당, 2010), 6장. 지독한 사랑에 중독되지 마라, 오만하고 경솔했던 사랑, 메리 스튜어트, 헨리 단리, 보스웰 백작).

제임스 V세와 기즈 매리 사이에 메리 스튜어트가 태어났고, 메리 스튜어트와 단리(Henry Stuart, Lord Darnley) 사이에서 제임스 VI가 태어났다. 1543년 제임스 5세는 메리가 태어나 6일에 사망했고, 메리가 여왕이 되고, 기즈 매리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1587년 메리 스튜어트가 참수되자, 스페인의 필립 2세는 무적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략했다. 1588년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를 칼레(Calais, 아르마다 해전)에서 격파했다. 기념메달에는 Flavit יהוה et dissipati sunt 1588(1588년에 여호와께서 바람을 일으켜 흩으셨다)를 새겼다.

5) 다음을 참고하라. 권동우,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의 망상』(서울: CLC.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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