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다니엘 목사의 “루터와 아그리콜라 논쟁”을 정리하면서


신학(神學)은 무엇이고 누가하는 것일까?

신학이 1세기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신학(theologia)”이라는 용어는 12세기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명제집(Libri Quattuor Sententiarum)에서 등장했다. 신학은 전문 직종에서 파생한 용어로 보아야 한다. 그 이전에 논쟁은 교리 논쟁으로 교회 사역자들이 교회 현장에서 교회 이룸의 과정이었다.

신학이 형성되면서 신학 자체 논쟁이 시작되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리 논쟁에서는 대주교가 주도권을 갖고 있었는데, 신학 논쟁에서는 탁월한 연구자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대주교는 성도들의 지지로 유지되었는데, 4세기 아타나시우스는 황제에게 미움을 받아 수 없이 유배와 도피를 했지만, 알렉산드리아 교회 성도들은 지지를 중지하지 않았다. 결국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복귀했고, 알렉산드리아는 기뻐했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 신학 논쟁(보편논쟁)은 교회 밖에서 사유 논쟁으로 진행했고, 결말을 내지 못해서 결국 오캄(William of Ockham, 1285?-1349?)에 의해서 좌절되고 말았다. “이신론”이란 괴이한 이론이 창안되었고, 개혁파는 “오직 믿음과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로 기독교 회복을 추구했다. 종교개혁 당시에 세르베투스는 기존의 기독교(삼위일체)가 아닌 전혀 새로운 기독교를 제안했다. 그런데 세르베투스는 “새로운 기독교(Neo Christianity)”라 하지 않고 <기독교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 1533년)이라고 명명했다.

세르베투스의 견해를 소시니안이 전수했고, 후일에 유니테리언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칼 바르트의 후예들은 자신을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고 했다. 21세기 기독교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구축하고 있다(참고,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김성욱 역, 부흥과개혁사, 2009).

중세와 근대 유럽은 기독교 사회(Christendom)였다. 교회와 사회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다. 교회의 이슈는 사회 이슈였고, 사회 이슈는 교회 이슈였다. 그럼에도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나라(Regnum Christi) 세우기를 갈망했고, 16-17세기 개혁가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나라(Regnum Christi) 세우기를 갈망했다. 기독교 사회에서 그리스도 나라 세우기를 갈망한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기독교 사회에서 바른 기독교 사회를 이루기 원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나라 이루는 학문에 심각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믿는 자가 매우 적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다.

신학은 믿는 자, 중생한 이성(ratio renata, ratio christiama)이 해야 한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아그리콜라(Johann Agricola, 1494-1566)의 관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다. 아그리콜라는 루터의 비서 역할을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고 큰 신임을 가졌다. 그런데 후일에는 루터와 갈등을 겪으며 루터파에서 무율법주의자(Antinomianism)로 정죄되고 배제되었다. 1577년 일치신조(Formula Concord)에서 율법의 용도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죄를 드러냄, 둘째 사회생활에 필요한 예의, 셋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에 규율을 제공함이다(참고. R.C. 스프로울, <기독교의 핵심진리 102가지>. 김창영 역, 생명의말씀사, 2013).

송다니엘 목사의 루터와 아그리콜라 논쟁에 관한 글을 정리하면서 느낀 것은 아그리콜라의 자세이다. 루터가 지적할 때에 자신의 율법폐기론을 철회했지만, 다시 주장해서 논쟁이 계속되었다. 필자는 아그리콜라에 대해서 중생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 신학으로 보았다. 루터와 그렇게 긴밀한 관계였고 중요한 임무를 실행하기도 했지만 결국 결별할 때에 심각한 신학 문제로 결별하고 말았다.

루터와 아그리콜라의 차이가 그렇게 많지 않는데 결별까지 간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제자였던 아그리콜라가 자기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루터와 아그리콜라 논쟁을 보면, 루터가 일면을 인정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루터는 율법을 전면 부정하는 아그리콜라의 과격함을 용인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그리콜라도 자기 선생의 지도를 끝내 거부하고 말았다.

이신칭의를 주장하면 율법을 부정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어떤 교수는 구원파적 구원론(무율법주의)이라고 했다. 그런데 교회사를 살펴보니 루터와 아그리콜라 논쟁에서 발생한, 아그리콜라의 주장이 시효적인 개념이 있었다. 이신칭의, 오직 믿음을 주장하니 행위를 부정한다느니, 율법을 부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루터에 대해 오해한 것이다.

루터의 글을 송다니엘 목사의 축약을 통해서 읽을 때에, 유해무 교수의 강연이 생각났다. 유 교수의 강연에 루터의 깊음에 빠지지 말라는 논지가 있었다. 루터의 사상을 오해할 소지가 많다. 그 중 하나는 아그리콜라가 한 것이다. 필자의 오해는 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나눈다고 생각했는데,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하나로 보고 있었다. 루터는 “율법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복음에서 율법을 들을 수 있는” 구도였는데, 매우 현실적인 이해라고 생각했다. 루터의 처절한 심정을 송다니엘 목사가 잘 전달시켰다고 생각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루터 뒤에 루터보다 뛰어난 학자가 나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칼빈 뒤에 칼빈보다 뛰어난 학자가 나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루터 계열은 순수루터파(Gnession-Lutheran)가 계승했고, 칼빈 계열은 데오도르 베자가 계승했다. 그 다음 대에 신학에 많은 약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처절한 영적 전투,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겸손과 온유의 전쟁이 사라진 것이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17-18세기 어떻게 유지하였는지에 대한 두 큰 테제(밀러 테제와 멀러 테제)가 있다.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회중파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국교회로 자리 잡고 말았다. 명예혁명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독일에서 루터파는 경건주의, 자유주의의 아성으로 있다가, 20세기 나찌당으로 인식될 정도가 되었다. 네덜란드 개혁파는 나폴레옹 정복 이후 사분오열이 되었고, 2001년 동성혼인 허용을 가장 먼저 통과시킨 국가가 되었다. 루터와 칼빈의 후예들이 가득했던 지역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계몽철학의 관용(tolérance)을 교회가 수용했기 때문이다. 시대가 역전된 지금은 정통파 기독교가 사회에 관용을 요구할 수 있을까?

[참고. 동성의 시민결합(Civil union) 인정은 최초로 덴마크에서 1989년에 시작했다. 438년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 9, 7, 3)에 동성혼인 금지하고 처형 규정을 넣었다. 이는 342년 콘스탄티누스가 밀란 칙령에서 최초로 법제화한 것이다. 그 이전에 동성혼인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동성혼인추진은 결국 기독교 사회(Christendom)를 파괴하는 신호탄이다]

기독교의 붕괴는 기독교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안에서 합리주의를 추구하며 기독교를 파괴하는 신학 체계를 양산했고, 그것을 관용 정신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관용으로 수용된 이설(異說)는 결코 한 점만을 점유하지 않았다. 그 한 점은 모두를 이설로 전환시켰다. 18세기 스코틀랜드 총회는 글라스고 대학의 심슨 교수(John Simson, 1668-1740)가 삼위일체를 부정한다고 확증했지만, 관용으로 교수직을 유지시키도록 허용했다(매로우 논쟁이 발발한 이유, 서요한의 분석). 하바드 대학(Harvard Univ)이 회중파에 의해서 설립되었지만, 100년이 되지 않아 유니테리언 학교로 전환되었고 결코 회중파 신학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김경식은 하바드가 합리주의 유니테리언에서 신비주의 초절주의자들(Transcendentalists)로 전환되었다고 제시했다. 그럼에도 신학교에서는 변함없이 학문적 자유, 관용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신학교도 그 패턴을 반복했다. 한국 교회가 붕괴하는 기독교를 버티는 최종 보루가 되었다. 유럽과 미국 신학은 중생하지 않은 이성으로 진행한 산물이 풍미하면서, 기독교 진리가 질식(choking)되고 있다고 분석할 수 밖에 없다.

중생하지 못한 이성이 진행하는 신학과 중생한 이성이 진행하는 신학, 차이점은 무엇일까? 필자는 첫째, 여호와 앞에서 잠잠한 훈련이다(시 37:7, 합 2:20). 힘서 여호와를 섬기자, 그리고 모든 일을 다 한 후에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자. 둘째, 자기 선생을 밝히고 선생의 도를 쫓자(딤후 3:14). 루터와 아그리콜라 논쟁에서 아그리콜라는 끝내 자기 선생의 교정을 받지 않았다. 셋째, 자기 옮음이 아니라 주의 영광과 교회 유익을 위해서 정진하자. 나의 부끄러움이 주와 교회에 유익한다면 그 오명에 들어가야 한다. 주의 자녀가 되면서 생명을 주께 위탁시켰다.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것과 믿음을 추구하는 방편이 있다. 신학에서 생명을 살리는 내용을 양산할 수 있어야 한다. 바른 신지식은 계시 지식이기 때문에, 신자의 지식과 양심에서만 나올 것이다. 전할 복음의 내용을 양산하는 신학, 전도자의 심장을 강하게 할 신학을 추구하자.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자기 양을 안다(요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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