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전에 WCF(웨스민스터신앙고백서, 1647년)를 절대적으로 신봉했다. 그 속의 모든 내용 한자 한자가 하나님이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을 통해 정확무오하게 작성하신 내용이라 생각했다. 세미나를 인도할 때 “이 내용은 웨민고백서 어디에도 있는 내용입니다”라고 말하며 나의 주장에 힘을 더하기도 했고, 웨민고백서 있는 내용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러나 이제는 약간 달라졌다. WCF를 작성한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처럼 사도들이 기록한 글의 의미를 해석하여 적용하도록 돕는 ‘성령의 조명’ 하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얼마든지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WCF가 출현하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영국에는 헨리 8세라는 죄악되고 탐욕스러운 왕으로 인해 ‘영국 국교회’라는 변종의 종교개혁 교회가 탄생하여 정치권력과 공고하게 결탁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교회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영국 국교회의 신앙고백 ‘39개 조항’(Thirty-Nine Articles, 1571년)은 청교도들이 인정할 수 없는 천주교의 신학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청교도들에게는 천주교보다 영국 국교회가 종교개혁을 방해하는 더 큰 걸림돌이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의 39개조의 위상에 필적하는 종교개혁 신학을 표방하는 신앙고백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청교도들은 단 하나의 신학노선으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은 장로교 청교도였는데, 그들은 스코틀랜드에 가장 많았고 칼빈과 <기독교강요> 등으로부터 직접 종교개혁 신학을 배웠다. 

숫자로는 장로교 청교도에 미치지 못했으나, 더욱 강력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독립파’ 청교도와 ‘분리파’ 청교도들도 있었다. 독립파는 영국 국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면서 그 내부로부터 참된 종교개혁을 추구하였다. 분리파는 영국 국교회를 사탄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뛰쳐나가 완전히 새로운 종교개혁 교회를 세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두 세력이 합해져서 회중파 청교도를 구성했고, 홋날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표되는 신대륙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의 조상이 되었다. 1608년부터는 원래 분리파 청교도였던 존 스미스에 의해 침례파 청교도 운동도 시작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으 초상화


장로교 청교도와 회중파 청교도들의 표면적인 갈등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청교도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권력의 정점에 서게된 독립파 청교도주의자 크롬웰은 의회에서 장로교 청교도들을 추방하였고, 이후 장로파 청교도들이 의회에 진출할 수 없게만들었다. 주연종의 논문 “영국혁명과 올리버 크롬웰의 상관성 고찰 : 그의 신앙관을 중심으로”은 그 당시 영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크롬웰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크롬웰은 교황주의에 반대했고 1641년 5월3일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로마 가톨릭을 공고히 하려는 사제단과 예수회의 구상에 대해 경계하고 이들의 참된 종교개혁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저지해야 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 하고 교황주의와 교황주의자들의 변신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주의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경계는 그가 호국경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656년 9월 17일 의회에서 크롬웰은 ‘진실로 스페인은 위협적인 적입니다. 그들은 자연적인(natural) 적입니다. 본인이 이전부터 지적해 왔던 것처럼 그들 안에 하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미신과 맹목적인 추종에 있어서 로마의 눈에 복종하는 자들입니다.’ 라고 말함으로 교황주의와 로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크롬웰은 교황주의와 국교에 대하여는 선명하고도 단호한 선을 그었고 교황주의와 국교회의 제도들을 개혁했다. 1643년에 크롬웰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의회는 회의를 소집하여 신앙고백서의 작성을 결의했고 마침내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의회의 승인으로 확정되었다. 크롬웰은 또한 사회윤리의 확립, 풍기단속법 등의 제정을 통한 기독교 이상사회의 구현을 위한 노력, 성직제도의 개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채택 등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여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에 광범위하게 기여했다.”1)

크롬웰의 일생에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로마교회와의 투쟁이다. 크롬웰은 로마교회에 의해 개신교도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노하였고, 자신이 미칠 수 있는 힘을 최대한 동원하여 대처했다. 로마교회에 의해 개신교도가 순교 당하는 핍박이 벌어지는 곳으로 군대를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크롬웰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신앙을 표현했던 사람이다. 남아 있는 그의 편지들의 끝에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God is our Strength), “저는 당신의 겸손한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Your Humble Servant)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크롬웰은 군 지휘관으로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부하들과 함께 기도하였던 탁월한 신앙의 사람이었다.2)

1643년, 권력을 장악한 크롬웰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영국 국교회의 '39개조'의 위상에 필적하는 종교개혁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 위한 의회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WCF)라는 명칭으로 완성되었고, 1648년에 의회로부터 승인 받았다. 그런데 의회의 승인을 받던 그 해부터 독립파(회중파) 청교도와 장로파 청교도 간의 투쟁이 표면화되었다. 크롬웰은 장로파 청교도들을 의회로부터 추방시켜버렸다.
 


크롬웰은 그 다음 해(1649년), 아일랜드로 군대를 몰고 출정할 때 회중파 신학의 최고의 인물로 등장하게 될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을 종군목사(궁정목사)로 초빙했다.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오웬을 깊이 신뢰하면서 오웬과 함께 많은 중요한 일들을 했다. 1652년, 존 오웬이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으로 취임한 것도 크롬웰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크롬웰이 죽던 해인 1658년에 존 오웬이 주도하여 회중파만의 '사보이 신앙고백'(Savoy declaration, 1658년)1)이 탄생되면서, 장로파 청교도와 회중파 청교도는 공식적으로 신앙의 길을 달리하였다.  

함께 영국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세력 장로파 청교도와 회중파 청교도는 1648년, WCF가 의회의 승인을 받던 바로 해부터 실질적으로 서로의 길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이 두 청교도 종파 사이의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정치에 대한 차이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시대의 최대의 이슈는 종교개혁이었고, 모든 중요한 문제들은 종교개혁의 신학 노선과 관련되어 있었다. 회중파 청교도 신자 크롬웰이 권력을 잡은 후 의회에서 장로파들을 추방해버린 일차적인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정치적인 내용이겠으나, 더 깊이 들어가면 각각 정치적 현안들에 대한 다른 주장들을 통해 얻으려는 종교개혁에 관한 궁극적인 목표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그들 사이의 정치적 견해의 차이의 근본 원인은 종교개혁에 관한 신학의 차이였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이렇게 성향이 다른 청교도 종파들이 영국 국교회의 39개 조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의 신학을 절충하여 만들어 낸 것이 WCF이다. 웨민고백서가 만들어진 후 바로 장로파와 회중파는 생사를 건 싸움에 돌입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WCF는 장로교회만을 위한 신앙고백서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WCF가 장로교만을 위한 신앙고백서로 작성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류게 봉착하게 된다.

1648년부터 장로파와 회중파가 생사를 걸고 싸우기 시작했고, 결국 회중파는 자신들만의 신앙고백서 '사보이 신앙고백'을 선언함으로서 WCF 작성 과정에서 억누르고 있던 불만을 공개적으로 터뜨렸다. 문제는 회중파가 연합을 깨뜨리고 나갔음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 회중파가 기독교를 파괴하는 그릇된 신학을 많이 주장했음에도, 장로교회는 WCF를 버리지 않고 자신의 본래의 신앙고백서(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1610년)으로 복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WCF에 들어있는 회중파 신학의 흔적을 제거하지도 않았다.

침례파 청교도들도 훗날 자신들만의 신앙고백서 '침례교 신앙고백(Baptist Confession of Faith, 1689년)을 작성함으로 자신들만의 신앙의 길을 개척하였다. 영국 국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의 '39개 조항'만을 고집하였다. 오직 장로파 청교도들만 WCF를 끝까지 지지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청교도들은 그 전에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충실하게 반영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ch Confession, 1560년)을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버리고 함께 연합하여 작성한 WCF를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수용하였고, 이후 그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장로교는 연합을 박차고 나간 회중파의 흔적을 WCF 속에서 걸러냈어야 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등에 기술된 내용과 다른 내용의 신학을 걸러내어야 한다. 그것이 회중파의 흔적이라고 보면, 큰 오류가 없을 것이다. 성경적이지 않고, 칼빈이 가르치지도 않은 이상한 내용들이 WCF 속에 다음과 같이 들어있다.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거기에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WCF, 7장 2항)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아담을 완전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 백성으로 조성하시지 않고, 아담을 완전한 생명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 만드신 후 아담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영생을 획득하도록 설계하셨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신.구약 성경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인데, 이 내용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에 이르게 한다는 '자력구원'과 '행위구원' 종교의 하나님으로 왜곡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행위 언약으로서 한 법을 주셔서 그것에 의해 그와 그의 모든 후손들을 인격적인, 완전한, 정확한, 그리고 영속적인 순종의 의무 아래 두셨고 그것의 실행에 근거한 생명을 약속하셨으며, 그것의 위반에 근거하여 죽음을 경고하셨고 그것을 지킬 힘과 재능을 그에게 부여하셨다.” (WCF, 19장 1항)

이 내용은 창세기의 선악과를 완전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 백성으로 지어지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른 피조물들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왕으로 세워진 아담이 하나님을 즐거이 섬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배반할 것인가?의 징표로 해석하지 않는 위험한 주장이다. 그리고 선악과를 아담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획득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지켰어야만 하는 율법 체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부자연스러운 해석이다.

창세기의 선악과에 대한 해석에서 이렇게 빗나갔으므로 결국 예수께서 아담이지키지 못한 율법을 대신지켜 하나님 백성의 의(권리, 자격)를 얻어 우리에게 전가하였다는 그릇된 능동순종 교리가 따라오게 되었다.

“이 법은 그의 타락 후에도 계속 의(義)의 완전한 규칙이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에 의해 십계명에 그렇게 선언되었으며 두 돌판들에 기록되었는데 처음 네 계명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그리고 그 나머지 여섯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고 있다.” (WCF, 19장 2항)

이 내용은 불완전한 아담이 스스로의 공로와 노력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성공적으로 지켰어야 할 율법들은 이후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적용되어 영생얻기 위한 조건으로 동일하게 제시되었다는 그릇된 주장이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그 율법들을 모세를 통해 돌판에 기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셨다는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 이 내용은 아무런 죄성이 없었고, 죄를 거절할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졌던 타락 전의 아담에게 영생 획득을 위한 처방으로 주신 내용과 죄의 종이 되어 버렸고 스스로의 힘으로 한 점의 의를 행할 수 없는 타락한 모세 시대의 죄인들에게 주신 처방과 일점의 차이도 없다는 괴상한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엉성한지를 다음의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아담이 미혹되어 혹시 섬길 수도 있었던 악한 우상들은 과연 에덴동산에 몇 개나 있었던가? 하나님이 지으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악한 우상들이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면, 그리 말씀하셨을까? 대체 죄가 시작되지 않았던 처음 세계에 악한 우상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길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일까? 

이런 우스꽝스러운 내용을 믿는 것으로부터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저주받았고,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 백성의 권리와 자격을 얻었다는 회중파의 사변신학인 능동순종의 교리가 나왔다. 이런 사상은 예수로 예수를 치는 이단사상이고, 예수로 예수를 잡는 덫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성경과 신.구약의 모든 페이지를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다른 복음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WCF에 들어있는데도, “웨민고백서 앞에 손들고 맹세하고 목사가 되었으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런 말을 하려면 먼저 루터를 향하여 “천주교의 신부가 될 때 교황에게 충성하겠다고 맹세했으면서 왜 종교개혁을 시작했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다른 내용이 있음을 알려고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권위를 부여하고 추종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이 슬퍼하시는 일이다. 필자는 WCF를 매우 사랑하고 엄청나게 좋아한다. 닭고기 중에서는 WFC를 가장 좋아하고, 신앙고백서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WCF이다. 그러나 WCF가 내 영혼을 죽이고, 교회를 죽이는데 이용되는 것은 반대한다. 그래서 앞으로 종종 필자는 어마어마하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WCF의 문제점에 대해 이런 식으로 자주 알릴 것이다.

다음에는 소위 ‘멀러 테제’, 즉 칼빈의 신학과 WCF 등에 기술된 후기 스콜라 개혁파들의 변질된 칼빈주의가 '동일신학'이라는 미국의 전 칼빈신학교의 멀러 교수의 주장의 그릇됨을 1) 성경, 2)칼빈의 <기독교강요>, 3) 핵심적 종교개혁 교리들에 비추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 미주 ---
1) 공식 명칭은 다음과 같다: A Declaration of the Faith and Order owned and practised in the Congregational Churches in England.  런던의 사보이 궁전에서 채택되었으므로 '사보이 신앙고백', '사보이 선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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