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정이철 목사님, 오륜교회의 최근의 금요기도회 실황을 담은 영상의 마지막 부분을 잘라서 보냈습니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에 김은호 목사가 무대에 등장하여 집회를 마무리하는 모습입니다. 김은호 목사가 신자들에게 통성기도를 하게 한 후 자신도 기도를 하는데, 김은호 목사의 신비한 빙언기도가 마이크를 통해 청중들에게 들려지고, 녹화되었습니다.

김은호 목사도 소위 ‘방언기도’라고 하는 신비한 기도를 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잘 들어보시고, 김은호 목사에게서 나오는 짧은 내용이 이상한 소리가 방언기도가 맞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도가 성경의 어디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잘 들어보았습니다. 찬양팀의 노래소리와 신자들의 통성기도 소리에 묻혀서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으면, 분명히 김은호 목사의 “오~ 라사아라 바라바라 ...!”라는 신비적인 방언기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동안 수 없이 설명했으나, 한 번 더 기독교의 방언에 대하여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1. 기독교의 은사는 '방언'이지 '방언기도'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방언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통해 전체 교회에 말하는 은사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방언기도는 한 사람이 자기의 방언으로 하나님께 은밀하게 말한다는 거짓 은사입니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멸시 받았던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셨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방언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교만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십자가 복음에 순종하는 이방인들이 완악하여 버려진 유대인들의 대신 하나님 백성 속으로 가입됨을 선포하는 특별이적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4:21-223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방언을 표현할 때 항상 ‘말한다’라고 하지, ‘기도한다’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딱 한 번 사도 바울이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고전 14:14)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 13, 14, 20절을 보면, 당시 고린도교회는 이단들이 들어와서 거짓 방언기도 은사를 확산시켰으므로 큰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그 혼란을 사도 바울이 바로 잡는 과정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고전 14:14)라고 한 것이지, 실제로 바울이 방언기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이 표현을 근거로 기독교에 방언기도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그 다음의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전 14:14)도 방언기도를 근거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것에 관해 인간의 영혼은 알지만 인간의 마음이 모를 수 있다는 내용은 사도 바울의 사상이 아니고, 기독교의 인간관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인격을 인간의 존재의 핵심 기능으로 봅니다. 인격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인격 속에 영혼의 영역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알고 인식하지만 마음이 모르는 일이 인간의 인격 속에서 존재한다면, 인격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의 산물이 아닐 것입니다. 방언기도가 인간의 마음이 모르는 영혼의 기도라는 주장은 바울의 신학 사상이 아닙니다.

또한 신.구약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보면, 언제나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지상의 일상 언어로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상의 모든 언어를 만드신 분이므로 지상의 모든 언어를 다 알아들으십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한 하늘의 신비한 언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방언기도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하늘의 신비한 언어라는 주장은 거짓입니다. 

방언기도 은사라는 것은 성경과 기독교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저술에서 ‘청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것은 청중이 모르는 다른 나라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에 대한 책망이지, 절대로 그 시대에 방언기도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예언과 방언, 해석(통역)하는 재능, 그리고 지식(의 은사)은 모두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현세에서 우리는 다만 소망과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안다.” (기독교강요, 3.18.8)

칼빈은 기독교의 방언 은사가 하나님이 사람(교회)에게 말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셨던 은사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경 66권으로 특별계시가 완성-종결되면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직통의 계시적인 말씀도 그쳤으므로, 이제는 방언과 통변, 예언의 은사가 교회에 없습니다.

“공중기도도 종래의 관습 같이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는 헬라 말로,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틴말로 드릴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아는 국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교황주의자들이 조금도 거침없이 방자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사도의 솔직한 비난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외국어로 장구한 기도를 고고하게 드리지만, 그 말의 뜻은 자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기독교강요, 3.20.33)

칼빈이 청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기도하는 것을 책망하는 내용은 언제나 청중이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의 언어를 혼자서 구사하면서 기도하는 행위, 즉 종교개혁 당시 천주교 사제들이 청중들이 알라듣지 못하는 라틴어를 구사하면서 잘난체 하던 행동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고 말하였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기도에서나 개인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마지막으로,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남용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기독교강요, 3.20.33)

칼빈은 고전 14:15절의 ‘영’을 하나님이 교회에 말하는 방언의 은사와 관련지어 해석하였습니다. 필자는 칼빈의 그 시도가 바르지 않다고 봅니다. ‘영’이 방언 은사와 직접 연관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성경의 방언의 은사를 개인기도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위 인용구 후반부의 칼빈의 말에 내용이 난해한 점이 있으나, 칼빈이 성경의 방언을 개인기도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방언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을 받아서 교회에 전하는,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방언 은사를 시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게하면 직통계시 이단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전부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합니다. 이는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하여 발견하는 사실들과는 너무 다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현대의 방언을 사탄의 모조품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2. 거짓 방언기도 은사를 도입한 이단들

누가 이런 방언 기도 은사를 도입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성경의 방언, 즉 그리스도를 대적한 완악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하였던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로 십자가의 비밀을 설명하셨던 계시적인 방언의 은사를 개인의 기도의 수단이라는 신비주의로 변질시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미국의 두 사람 이단들에 의해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찰스 펄햄

 

찰스 펄햄 - 외국말 방언

1901년, 아주사 거짓 부흥의 이론적 기초를 수립했던 찰스 펄햄이 한 여학생에게 안수기도하여 분명한 기록으로 설명되는 최초의 방언이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펄햄 자신에게도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때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세례가 교회에 다시 회복되었다고 선언하면서 방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곧 이어 내 목이 살짝 돌아가더니 나에게 성령의 영광이 임했고, 나는 스웨덴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언은 계속 다른 나라의 말로 바뀌었다.” 1)

2,000년 동안 사라졌던 방언을 최초로 다시 나타나게 만든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 펄햄은 자신에게 나타난 방언이 기도하는 방언이 아니라 성경의 방언처럼 외국어, 정확하게 스웨덴 언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 캔자스 시티 타임즈(Kansas City Times)의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이 학생들은 그 언어들을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그 나라의 원주민들이 그들의 방언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 학생들처럼 성령세례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어디든지 가서 배우지 않은 언어를 구사하면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2)

현대의 방언기도 은사를 도입한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사람 펄햄은 분명히 자신에게서 배운적 없는 외국어 은사가 나타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실제 외국어 은사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방언이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였으므로, 펄햄도 실제 외국어 방언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외국어로 보이는 방언을 실제로 받고 펄햄은 자신이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자신을 마지막 시대를 도입하는 세례 요한이라고 선전하면서 영원한 이단의 길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윌리엄 세이모어와 그의 부인 제니


윌리엄 세이모어 - 외국어 방언

펄햄이 허접하게 수립한 초기 오순절 운동 신학을 따라서 현대의 방언기도를 본격적으로 전파한 사람은 윌리엄 세이모어였습니다. 그가 일으킨 아주사 거짓부흥(1906년)을 통해 현대의 방언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그 역시 성경의 외국말 방언이 다시 나타났다고 오판하였습니다. 아주사 거짓부흥의 주도자 세이모어가 당시 남긴 기록을 통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질병을 치료해 주시며 세상의 모든 언어들을 말하게 하신 하나님을 우리 모두 높이고 경배합시다.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3)

이 내용은 아주사 부흥 당시 세이모어가 ‘고귀한 고난’(The Precious Atonement)라는 제목으로 했던 설교의 일부이며, 그가 출판했던 「사도적 믿음」1권 1호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아주사 부흥 당시 세이모어는 자신이 일으킨 방언은 기도하는 신비의 언어가 아니고 각종의 실제 외국어들을 주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만일 형제 자매들이 영어로 말하지는 않고 하나님이 주신 방언으로만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리고 모든 설교자들이 방언으로만 설교하고 통역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어로 말하는) 예언의 은사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통역한다면, 그것들은 예언의 은사와 같습니다.” 4)

위 내용은 세이모어가 ‘성령의 은사’(Gift of The Spirit)라는 제목으로 했던 설교의 일부이고, 자신이 발행했던 「사도적 믿음」1권 5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일으킨 방언이 사도행전의 방언처럼 실제 외국말 방언이고, 그것을 통역하는 순간 자국어로 주어진 예언과 같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 청년이 회심했고, 방언들을 받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는 결핵을 앓았으나 의사로부터 다 낳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언의 은사와 함께 많은 외국어 방언의 은사를 받았고, 여러 나라의 외국 말(‘영서’라는 거짓 은사를 의미)을 쓰는 은사도 받았고, 외국 선교지를 향한 소명을 받았다.” 5)

이 내용은 「사도적 믿음」1권 1호에 실린 세이모어의 글 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배우지 않은 외국어뿐 아니라, 외국어들을 손으로 쓰는 은사, 즉 거짓된 영서 현상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펄햄과 세이모어는 현대의 방언기도 은사를 발휘하는 모든 은사주의자들이 인정하는 방언의 조상이고 선구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외국어 방언이었고, 마침내 고대했던 외국어 방언이 나왔으므로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왜 그들은 실제 외국어 방언을 추구했을까?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오순절 성령강림과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령의 세례가 일어나던 날, 외국에서 온 여러 유대인들이 뜻을 알아듣는 실제 이방인들의 언어들의 방언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펄햄과 세이모어는 외국어 방언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다시 교회에 회복되는 징조로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그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자신들의 방언을 실험해 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을까요? 아주사 거짓 부흥이 일어난 해는 1906년이고, 그 당시에는 미국 사람들도 외국에 가는 일이 흔치 않았습니다. 오순절 운동 역사신학자 빈슨 사이넌(Vinson Synan)의 연구에 의하면,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Los Angeles의 ‘불타는 떨기나무 선교회’(Burning Bush Miassion)의 선교사 알프레드 가르(Alfred Garr) 목사가 성령세례와 방언을 받은 후 인도에 가서 자신의 방언을 실험하면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습니다.6) 자신의 방언이 인도의 말처럼 들릴지라도 그 나라의 사람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방언기도 은사를 전파한 오순절 교회들은 자신들의 방언의 조상으로 펄햄과 세이모어로 여기고 있으나,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였고 기뻐하였던 것은 "방언기도 은사"가 아니고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게 하는 은사"였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상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만 온 땅에 가득하고 점점 더 늘어나고, 현대의 방언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펄햄과 세이모어가 그토록 소망하고 기뻐하였던 배운적 없는 외국말 방언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요? 현대의 방언은 처음부터 사탄의 속임수였던 것입니다.
 

 

3. 현대의 방언기도는 기독교를 고치는 마귀의 무기

역사적 증거들은 성경의 방언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방언이지, 결코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 기도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방언 기도의 물결은 점점 더 크게 넘실거리며, 온 세상을 덮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정통 신학과 성경적 신앙에 대한 기준이 무너졌습니다. 방언기도에 대한 성경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기독교의 역사와 주요한 역사적 인물들에게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특성과 시대에 따라 기독교의 모습이 달라지고, 나타나는 은사도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괴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오직 성경에만 답이 있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이고 천국에 간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참 믿음 안에 남아있는 소수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오직 은혜를 입어 말씀 안에 남아있는 소수가 하나님 백성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눈에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참 은혜를 입어 복음에 남아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보이지 않는 참 교회의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을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결정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 다니고 목회하는 사람들이 모두 천국 백성이라면, 구원받는 자가 소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겠지요. 구원의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없다고 하셨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수 만, 수 천 명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들이 한국에만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이 거짓말을 했을까요?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믿을 수 없어도, 성경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예수께서는 지상의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성공하고 유명해진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자신의 원수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거나 무관한 사상으로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원수의 길을 간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11,12)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지 않는 거짓 교인들이 회개하지 않고 지옥의 길을 안전하게 가도록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도우시고 형통케한다는 성경의 말씀은 거짓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현대의 방언기도가 이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는 사람은 반드시 죽기 전에 돌아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성경대로’(고전 15:3, 고전 15:4, 약 2:8) 믿는 신앙이 아니면, 결국 거짓 믿음이고, 구원 얻는 참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이 없는 거짓 믿음일수록 세상에서 그 모습이 화려하고 성공적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 결과는 구원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참 백성의 은혜를 입었다면, 남들이 무엇을 하던지 우리 자신들은 진리의 길을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영광의 주를 기쁘게 뵈올 것입니다.

--- 미주 ---

1) Roberts Liardon, The Azusa Street Revival (Shippensburg, PA: Destiny Image Publishers, 2018), p. 75.

2) Synan, Holiness-Pentecostal Movement, 102. Hank Hanegraaff, Counterfeit Revival (Orange, CA: New Century Schoolbook, 1997), 141-42.

3) Roberts Liardon, 113.

4) Ibid., 118.

5) Ibid, 133.

6) Synan, Holiness-Pentecostal Movement, 102. Hank Hanegraaff, 1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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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