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선 전도사의 천국간증, 전쟁 예언은 가치없는 해프닝

예언은 그리스도인들과 불신자들 모두에게 언제나 많은 관심을 받는다. 예언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항상 악영향을 미쳤다. 데이비드 오워라하는 아프리카 흑인 예언자가 한국에 와서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이 터진다고 예언했을 때, 온 나라의 교회들이 요동하였다. 그 때문에 전체 사회적인 불안감이 고조되자 공영방송의 뉴스에서도 그 내용이 언급될 정도였다. 수년 전에 미국 뉴욕의 한 대형교회에서는 담임 목사가 아이합이라는 곳의 예언자들게서 일반 목회자의 차원을 넘어서는 ‘사도적인 지도자’로 부르셨다는 예언을 받았었다. 그 사실을 수요 예배시간에 모인 성도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함으로 인해 그 교회가 소용돌이이 빠지게 되었고, 미국의 전체 한인 교회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 예언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는 CBS 뉴스 장면

잊을만하면 또 다른 예언 해프닝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 이번에는 홍혜선이라는 여자 전도사가 한국에 곧 전쟁이 난다는 예언을 하여 파장을 일으키는 모양이다. 얼마전에 “ ...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는 뜬 구름을 잡는 식으로 예언을 했는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 전쟁이 터진다는 그녀의 예언으로 인해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예언이라고 하는 것에 빠질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어려운 상황, 불안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마음이 약해져 예언의 늪에 쉽게 빠지게 된다. 신앙이 어느 정도 성장한 사람도 큰 고민이 생기고, 암담한 상황을 만나면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을 찾아가서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예언이라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내용을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은 심히 위험하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예언을 듣고서 마음의 안정을 얻기도 하고, 어려운 시기를 넘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어려운 지경에 처한 사람들이 예언에 대한 미련과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여 주시는 예언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님에도 예언이 많다는 것은 심각한 사실을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조하는 미혹의 영이 꾸미는 거짓이거나,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으로 지어내는 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저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귀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귀신과 교제하는 행위라고 경고하였다. 결국 예언도 같은 문제이다. 하나님이 직통으로 말하시는 것을 받아내는 ‘예언의 은사’라는 것은 없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은 많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언자들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곧 미혹하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다. 성령을 가장하는 귀신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듯이 귀신이 준 말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귀신숭배이다. 우상숭배가 꼭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만은 아니다. 귀신이 하는 말을 듣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이 죽었나? 왜 하나님이 말하지 못하시겠는가?”

예언에 대해서 주의하라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더 순수해 보이고, 더 참된 믿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고, 성경을 바르게 요약하는 신학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성경에 ‘예언’, ‘예언의 은사’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여 지금도 예언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 것은 무지이다. 성경에 사도라는 단어도 있고, 선지자라는 단어도 있다. 그렇다고 현재의 교회에도 사도, 선지자 직분이 있다는 것인가?

예언하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하고, 예언을 받지도 믿지도 말아야 한다. 예언을 추종하면 반드시 미혹하는 귀신과의 교제에 빠져 엉뚱한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직접 예언하거나, 다른 사람의 예언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인생을 마친 경우는 거의 없다. 장구한 교회의 역사가 이것을 조용히 증언한다.

성경은 두 종류의 예언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전한 예언이다. 또 하나는 신약 초기에 존재했던 예언자(선지자)들의 활동(예언의 은사)이다. 성경이 말하는 이 두 종류 예언의 특성과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면, 이번에도 논란을 일으킨 홍 아무개 여전도사의 전쟁 운운하는 예언 따위로 인하여 부끄러운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 구약의 예언

기독교의 예언은 곧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계시, 곧 성경의 말씀이 예언이다. 세상에서는 장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예언이라고 여겨지지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보내는 말씀이 예언이다. 물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 속에도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장차 이루실 일들에 관한 말씀이다. 단순히 점장이들이 귀신의 영감을 받아 앞 날을 일어날 밀을 알아맞추는 식의 예언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언이 선지자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을 통해 임하였다. 하나님이 직접 모든 백성들이 듣도록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죄악된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명기 18장 16-18절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불행히도 백성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지도 못했다. 두러움에 빠진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간청했다.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데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신 18: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먼저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자신들에게 전하여 주기를 원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이 좋다고 여기셨고,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여 먼저 그에게 말씀을 주셨다. 구약의 선지자는 그렇게 등장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 18:17,18)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선지자는 가감하지 않고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없이 믿었다.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때부터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백성들을 미혹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주지 않은 말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죽이라 명하셨다(신 18:20). 거짓 선지자임을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는 그가 전하였던 내용이 과연 성취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화의 말씀아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신 18:22).

다음의 말씀들은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예언이고, 선지자가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 '예언한다'라고 표현되는 행위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해 보내시는 말씀이 예언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네 얼굴을 암몬 족속에게 돌리고 그들에게 예언하라”(겔 25:1,2)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민수11:25)

“그 녹명된 자 중에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박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민 11:26)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대하 18:9)

구약 시대에는 환상, 꿈, 직접 들리는 음성이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언을 전달하여 주시는 특별한 방식이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이 전하고 기록해야 할 예언을 주셨다(민 12:6,7). 그러므로 누구든지 꿈, 환상, 유체이탈 등의 방식으로 하나님, 천국, 하나님의 멧세지를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오도하는 것이다. 
 

2. 신약의 예언

신약 교회의 설립자들과 성경 저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받던 방식으로 계시하셨다.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언을 기록하였고, 때로는 꿈, 환상, 음성 등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계시를 경험하였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러 가기 전에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과 음성(행 10:9-16)을 경험하였다. 바울에게도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도록 하나님의 환상(행 16:9,10)이 임하였고, 환상 가운데서 음성을 듣기도 했다(행 18:9,10, 23:11).

구약의 예언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왔다면, 신약의 예언은 신약 교회를 설립한 사도들을 통해서 왔다. 마가, 누가와 같은 사도가 아닌 사람들을 통해서도 신약의 예언이 기록되었으나,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이니, 실질적으로 사도들을 통해 신약의 예언이 기록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신약 시대의 초기에 잠시 등장했던 또 다른 종류의 선지자들의 활동은 전혀 별개로 보아야 한다. 그들을 통해서 성경에 기록된 예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예언자(선지자)였던 아가보의 다가오는 흉년에 관한 예언(행 11:28)이 이루어졌다는 성경의 언급을 제외하고서는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경에 포함된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점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신약의 선지자들의 사역의 다른 점이다.
 

3. 특별계시의 종결

하나님께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 예언을 주셨다는 사실이 지금 현재에도 예언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약 교회가 설립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데 필요한 예언이 이미 기록된 성경으로만 충분하고, 더 이상 추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어떠한 형태이건 하나님의 직통의 말씀을 받는 예언의 은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리이다. 누구든지 성경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통으로 받는다 하면 이단이다. 누구라도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 주장하면 가짜이고 사이비 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수반되는 음성, 꿈, 환상을 경험한다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원수에게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부정직하게 남을 속이며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자들이다. 대부분이 성령을 가장하는 간교한 귀신에게 속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귀신에게 미혹되어 환상을 보고, 꿈을 꾸며,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주 인용한다. 지금도 계시를 수반하는 꿈과 환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함께하신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꿈, 환상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계시를 주실 때 동반되는 특별한 현상이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하셨던 성령이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지상에 최초로 임하시던 날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행 2:16)라고 설교하였다.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위의 말씀들은 신구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기록자들에 의해 저술되어다는 것, 신구약의 기록된 예언으로 우리가 믿고 신앙생활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가 충분하고, 종결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언이 임했다는 것은 그 모든 내용의 근원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뜻이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직접 기록된 말씀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록된 예언인 66권의 신구약 성경만이 신적기원을 가지는 말씀이며,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고, 우리의 신앙의 모든 교훈과 책망의 근거가 된다. 다른 말씀은 없고, 더 이상 추가되는 말씀도 없다.
 

4. 신약의 예언의 은사(?)

홍혜선 씨와 같이 점장이처럼 예언하면서 지금도 그런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한시직이었던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그 근거로 삼는다. 사도행전에는 예언의 은사를 가졌던 사람들의 예언이 언급되어 있다. 아가보와 같은 선지자들의 예언이 사도들의 예언과는 다르게 존재하였고, 지금까지 그런 종류의 예언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사도행전에는 선지자였던 유다와 실라(행 15:32)에 대한 언급이 있고,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한 내용(행 10:28, 21:10)도 언급되어 있다. 예언하였던 빌립 집사의 네 딸에 대한 언급(행21:8)도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도 예언하는 성도에 대한 언급(고전 12:10)이 있고, 예언하는 선지자에 대한 언급(고전 12:28,29)이 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예언을 전한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서 예언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의 핵심은 무엇일까? 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이 사도들을 통해 주신 예언은 절대적인 예언이나,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예언은 상대적인 예언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선지자들도 신.구약 성경을 주신 성령의 역사로 예언하였으나, 그 내용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거나, 의식 속에 심어지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는 오류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0,21),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 14:29)라고 했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회를 요동시키는 엉터리 예언자들의 활동은 성경이 간접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범주안에 들어있다. 그래서 현대의 예언자들의 예언을 교회는 잘 분별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예언으로 인해 성경의 완전성, 충족성, 절대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고 한다. 현대의 예언의 위험성 때문에 예언을 배척해야 한다면, 성경공부도 그릇된 길로 빠질 수 있으므로 마땅히 성경공부까지도 폐지시켜야 할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는 지경이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

에언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이용하는 성경구절은 바로 이 내용이다. 모든 엉터리 예언자들이 부작용과 혼란을 초래한 후 돌 팔매질에 처해지지 않고 유유해 피해가는 근거가 바로 이 말씀이다. 초대교회 당시부터 예언에 대해서 분별하여 잘 받으라고 했으니, 오늘 날에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엉터리 예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예언을 믿는 따르는 사람들에게들에게, 그런 모호한 예어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의 “분별할 것이요”라는 문구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사도 바울과 다른 저자들이 기록한 성경의 원본을 본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바울과 다른 저자들이 기록한 성경의 원문을 필사한 사본들을 통하여 지금의 성경이 구성되었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 일반 목회자들은 권위있는 성경의 사본을 직접 본적도 없고, 보아도 뭐가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탁월한 학자들이 연구하여 알려주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매우 권위있는 성경학자 팔머 로멋슨(Palmer Robertson)의 책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제로 발견조차 안 되는 추상적인 표현을 토대로 한다. ‘말한 것을(분별할 것이요)’라는 이 말은 원어 성경에는 없는데, 본문을 번역한 이들이 첨가한 것이다. 신약 성경에 대한 고대 사본들 가운데 단 하나의 문건도 이 말을 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사실이 지닌 충분한 의미를 주목해야 한다 ... 그루뎀은 자신의 저서에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예언을 다루는 스물한 페이지를 이 한 구절을 다루는데 할애하였다. 그루뎀은 이 부분에서 ‘말한 것을 (분별하라)’라는 말을 여러 번 언급하여, 번역자들이 삽입한 표현을 자신이 본 관점으로 해석한다.”

‘분별하라’라는 말 때문에 수많은 거짓 예언의 사례들이 어쩔 수 없는 성경적인 현상으로 용인되었다. 그런데 권위있는 신약성경의 고대사본들을 조사한 팔머 로벗슨의 연구에 의하면 ‘분별하라’라는 말은 그 어떤 사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성경 번역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번역자들이 임으로 추가한 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지금의 예언 사상의 가장 중요한 근거되는 말이 애초부터 성경에는 없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 북한 남침이 임박했다고 예언하는 홍혜선 전도사의 집회 홍보지

그리고 ‘분별’이라는 그 단어도 예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이 단어는 선 지자들이 전하는 말의 내용을 분별하라는 말이 아니다. 선지자들 가운데 누가 먼저 말하고, 누가 그 다음에 말할 것이지에 대한 ‘질서’를 세우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분석해 보면, 이 단어는 항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떠한 구별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15장 9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을, 야고보서 2:3,4절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를 구별하는 뜻으로 쓰였다. 고린도전서 6장 5절에서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구별하는 의미로서 쓰였다. 즉 누가, 바울, 야고보 세 사람의 성경 저자들이 모두 이 단어를 어떤 사람의 말의 내용의 진위를 구별하라는 차원에서 쓴 적이 없고, 항상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어떤 구별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오늘 날의 예언운동의 부작용을 감싸주는 말씀으로 악용되는 것에 동의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신약 초기에 잠시 존재했던 아가보와 같은 예언자들의 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이 성도들에게 했던 말은 하나님이 직통으로 주시는 말이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신약의 선지자들은 먼저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를 잘 이해하고서, 기독교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혼동하고 있는 다른 약한 신자들과 교회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하게 보면, 신약의 예언자들은 자기가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이 정확한 사실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언하는 사람은 자기의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했다. 자기의 믿음의 분량안에서 남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약의 초기에 잠시 존재했던 예언자들의 사역이었다. 

이러한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 즉  말씀전파활동은 ‘성령의 영감’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근거하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이라고 하면서, 점치는 것과 유사한 행위를 한다. 성령의 조명은 주어진 계시의 말씀(성경)이 모든 시대의 모든 상황에 처한 교회들에게 올바르게 적용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이다. 갑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면서 특별한 느낌이 왔다고 하면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둘러댄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방종교인들의 점과 유사한 행위이다. 성령의 조명은 오래전에 주신 성경의 말씀의 참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이 주어질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한 교회들과 신자들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되도록 성령께서 이해와 적용을 돕는 역사이다. 개인의 마음을 터치하여 특별한 깨달음과 음성을 주는 사역이 아니다. 

신약 시대의 초기에 예언하였던 선지자들은 구약의 말씀과 당시 사도들을 통해 주어지고 있던 신약의 예언을 누구보다 먼저 공부하고 잘 이해하였던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를 중심으로 설립된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깨닫고,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했던 약한 사람들을 가르쳤던 사람들이다. 이후 성경이 교회들에게 주어지고, 성경의 말씀으로 교회를 인도하는 장로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러나 예언운동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당시 세상 지식인들의 강의와 연구 방식을 선호하게 되어, 직통으로 주시는 성령의 예언이 배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우긴다. 

'전쟁이 날 것이다!'
'기근으로 하나님이 치실 것이다!'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소리를 하면서 지금도 예언자들의 활동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이비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날 접하는 모든 유형의 예언들은 기독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많은 교회들 안에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방언이라는 소리를 풀다가 스스로 통역하면서 "사랑하는 내 딸아! 네가 바로서야 네 남편과 아들이 바로서지 않겠느냐? 나는 네가 나의 말을 듣기를 원한다 ... " 이런 유형의 예언에 현혹되지 않도록 성도들에게 예언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야 한다.  
 

정이철 목사 /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담임
                 바른믿음(good-faith.ne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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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