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수련회’, ‘영성운동’이라는 용어들과 개념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 대신 ‘믿음’, ‘경건’ 등의 성경 단어들은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영성이 믿음과 경건을 밀어내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영성 개념의 신학적 유래

‘영성’이라는 용어와 개념은 언제, 어떻게 기독교 속으로 등장했을까? 필자는 나름대로 영성 개념이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서철원 박사님의 저작에서 기독교에서 영성 사상이 등장하게된 배경을 설명하는 내용을 접했다. 지금까지 영성 개념의 유래를 찾으면서 접한 자료들 가운데 서 박사님의 설명이 가장 정확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희랍의 근본사상에 의하면 모든 존재물들은 존재일반이라는 최상위개념에 동참하는 정도에 따라서 위계적인 질서와 위치를 갖는다. 존재일반에 동참의 도가 높으면 더 높은 위치에 있게 되므로 피조물들에게서 시작해서 하나님에게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신학도 피조물에게서 시작하여 존재의 크기의 사닥다리를 따라 올라가 신에게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은 존재일반을 창조한 존재가 아니고, 존재일반에 동참함이 최상이기 때문에 최고의 존재인 것이다. 이 사상을 중세 스콜라주의가 수입하여 자연신학을 발전시켰다.

자연신학은 특별계시에 의해 신학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이성으로 하기 때문에 피조물을 출발점으로 삼아 가장 낮은 단계에서 시작하지만, 피조물들의 성질을 부정하여 신의 성품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이성으로 신학하는 것은 부정의 법(via negativa)으로 피조물의 구조와 본성을 탐구하여 하나님에게로 이르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의 성질을 부정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의 관념에 도달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물질이므로 그 부정은 비물질성 곧 영성(spiritualitas)에 이르고, 유한이므로 그 부정은 무한성(infinitas)에 이른다.”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전집 1: 신학서론>, 75)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자연신학)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주신 특별계시에 의존하는 방법(계시신학)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타락으로 인해 흐려졌으므로 자연신학은 인간에게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충분하고 정확한 지식을 주지 못한다. 오직 특별계시에 의존하여 하나님을 탐구하고, 특별계시의 조명하에 자연을 탐구함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정통 개혁신학의 가르침이다.

서철원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영성 개념은 자연신학의 산물이다. 피조물의 속성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하여 피조물에게는 없는 반대의 속성을 하나님의 본성으로 상정하는 자연신학의 하나님 탐구 방법이 하나님의 속성이 영성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서철원 박사님의 영성 개념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사실들을 조심스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의 성품에 동참하기 위한 영성수련

자연신학이 피조물의 본성인 물질성과 육체성을 극복하고 부정함으로 신의 성품인 영성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육체성(물질성) 부정하는 수련을 통해 영성에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자연신학을 발전시킨 천주교에서 육체를 부정하는 고행, 금식, 그리고 신비적 명상을 통해 하나님과의 합일과 신비적인 하나님 환상 등의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는 영성수련이 수도원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2) 필연적인 종교다원주의 성향

영성을 추구하면 필연적으로 종교다원주의와 친숙해 질 수 밖에 없다. 자연과 피조물의 속성을 연구하고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서 피조물의 물질성의 반대의 개념인 영성을 본성으로 하는 하나님에게 이르게 되는 자연신학의 방식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무관한 이방 종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명상, 금식, 금욕, 침묵 등의 수행으로 영적도약을 이루어 신성에 동참하고 구원과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이방 종교들의 구도의 길(비법) 그 자체가 인간의 영성수련이다. 이방종교의 영성수련 방법은 기독교의 자연신학에서 말하는 영성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고백할지라도 영성을 추구하면 결국 다른 종교들에 대해 친밀감을 가지게 되고, 결국 영성이 종교통합을 위한 Key로 작용하므로 종교다원주의와 친숙해지기 쉽다.
 

3) 영성은 신인합일! 믿음과 경건은 영적연합!

성경은 말씀을 배우고 실천함으로, 건전한 방식의 기도를 진행함으로, 성경적인 방식으로 성찬을 거행하므로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가 신자들에게 공급되고, 신자와 하나님이 영적으로 연합되어 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영성 사상은 명상, 금욕, 금식, 기도 등의 낮은 수준의 육체성(물질성)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수련으로 인간이 영성을 본성으로 하는 하나님에 가까워진다고 가르힌다. 종국에는 인간과 하나님의 신인합일 신비주의로 기울어지는 위험성이 농후하다.
 

 

역사 속의 영성운동의 실제

영성 개념과 성경의 믿음과 경건 개념은 매우 다르고 이질적이다. 영성이 강조되면 성경적 믿음과 경건의 신앙이 약화되거나 훼손될 수밖에 없다. 영성과 관련된 기독교의 역사와 실제 사례들을 통하여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도록 하자.
 

1)중세의 수도사들의 영성

중세의 수도원 운동을 대표하는 버나드(클레르보의 베르나르/St. Bernard, 1090 – 1153)는 수도사들의 수도원 생활의 목표가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모양)을 회복시켜 그리스도를 닮게하고, 궁극적으로 신인합일 신비체험을 누리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수도사들이 육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멀리하고 침묵과 신비적인 명상에 집중하여 외적으로 다가오고 또는 내면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 환상'을 통해 신인합일에 도달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은 버나드의 신앙과 사상은 믿음, 경건으로 표현되지 않고 언제나 ‘영성’이라고 제시되었다.

그리고 중세 수도사들의 금욕, 신비적인 명상 수련은 인간을 가장 온전하게 성화되게하는 신앙생활이라고 오해되었고, 그런 일에 전념하지 못하는 일반 신자들의 신앙과 삶이 수도사들의 영성수련 생활에 비해 ‘속된 것’(저급한 것)이라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영성이 강조되면 성경적 말씀 실천, 성경적인 기도, 성경적 성찬식이 약화되거나 미신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준다. 
 

2)종교개혁자들과 영성

루터는 원래 천주교의 신부였으므로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사들의 고행, 침묵, 금욕 등에 대해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루터는 버나드를 매우 존경하였고, 그의 이신칭의 신학, 인간의 전적타락, 구원에 대한 인간의 공로주의 거부, 교황과 신부들의 부패성에 대한 비판을 자주 인용하였다. 그러나 버나드의 신비적인 명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근접하여 신인합일을 체험하려는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칼빈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말씀 실천, 기도, 성찬을 통해 신자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합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기도, 명상, 금욕, 금식 등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노력으로 영성에 도달하게 되고, 하나님과 신비적인 합일에 이를 수 있다는 중세의 영성 사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다. 
 

3)회중파 청교도(에드워즈)와 영성

조나단 에드워즈의 관련 자료에도 영성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그 때문에 영성 사상이 근래에 문제가 되었지, 이전 청교도들의 시대에는 문제가 될 요소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그 동안 회중파 청교도를 대표하는 인물 에드워즈가 흠 없는 믿음과 경건의 사람으로 철저히 미화되었다. 그래서 그의 영성 개념도 성경적인 신앙으로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제거한 중세의 수도사들의 영성 운동, 즉 버나드로 대표되는 신비적 명상을 통한 하나님 체험주의를 윌리엄 퍼킨슨과 함께 회중파 청교도의 초기 역사를 대표하는 리처드 십스가 다시 청교들의 신앙 속으로 도입하였다. 그래서 이후 회중파 청교도들은 ‘묵상’이라는 명칭 하에 신비적인 명상을 빠지는 일들이 많았다. 에드워즈도 홀로 조용한 곳에서 명상(묵상)하면서 내면으로 부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 환상, 그리스도의 영광 체험, 그리고 신랑으로 찾아오는 그리스도와의 ‘달콤한’ 내면의 대화는 나누는 신비체험을 했다고 직접 기록으로 남겼다.

이 사실은 에드워즈와 회중파 청교도들의 기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영성이라는 용어가 단지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믿음, 경건을 대신하는 차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회중파 청교도들과 에드워즈에게 비성경적인 영성 사상이 존재했고, 환상체험, 쓰러짐, 황홀경 등의 신비주의 현상이 에드워즈 자신과 그의 영향을 받은 신자들에게 자주 나타났다. 믿음과 경건이 강조되지 않고 영성이 강조되는 곳에서 여김 없이 건전한 믿음이 훼손되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4) 오순절-신사도 운동과 영성

1900년대 초에 아주사 거짓 부흥을 통해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면서 영성 사상은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했다. 인간에게 반복되는 성령(재)세례는 그 자체로서 인간을 거룩하게 성화시킨다고 주장되었다. 성령(재)세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되고, 신랑 예수와 더욱 친밀해진다고 주장되었다. 성령(재)세례를 반복하여 받으면, 인간이 육신의 죄성으로부터 초월되어 영성에 이르게 되고, 그 증거로 (거짓된) 방언기도와 예언, 환상, 쓰러짐 등의 신체적 현상이 나타난다고 이해되었다.  

오순절 운동의 성령(재)세례주의는 또 다른 현대적인 형태의 영성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중세의 버나드와 수도원 신비주의자들이 침묵과 명상을 통해 힘들게 추구하였던 신일합일 신비주의가 오순절 성령운동을 통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더 쉽게 구현되는 것이다. 오순절 운동이 더욱 더 강력한 신사도 운동으로 변하면서 거짓 성령을 매개로 인간에게 영성을 부어주는 신비적 체험이 더 강조되었다. 특히 성령운동과 감정을 자극하는 CCM이 어우러지면서 사람들은 거짓된 영성의 세계로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반대로 말씀실천, 건전한 기도,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은 약화되고 있다.
 

5)천주교-관상기도와 영성

천주교 신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중세 천주교의 신비적 명상을 관상기도라는 이름하에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에게서 영향 받은 리챠드 포스터(Richard Foster, 1942-now) 등이 천주교의 신비적 명상을 개신교 속으로 이끌어 왔다. 한국에서는 강준민, 이동원, 홍정길, 최일도 목사 등이 앞장서서 천주교의 신비적 명상과 개신교의 기도를 혼합시키는 관상기도를 도입하였다. 관상기도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침묵인데, 침묵은 중세 때부터 신비적 영성가들이 인간의 육체성과 물질성을 초월하여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지 위해 가장 중시했던 것이다. 관상기도 도입자들의 글에서 믿음, 경건이라는 단어들 보다 영성이 더 중시되고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성이 주장되면서 성경적 믿음, 경건, 기도가 훼손되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이방 종교들의 수련에서도 침묵이 동일하게 중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설명해 준다. 
 

6)종교다원주의(WCC)와 영성

지구상의 모든 종교들의 연합을 추구하는 WCC가 기독교 내에서 성령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중심에 서면서 급속하게 활기를 얻었다. 성령(재)세례 신비주의는 기독교 내부의 종파들간의 벽을 허물어 WCC의 깃발 아래 하나가 되게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다. WCC “성령이여 오소서! 창조를 새롭게 하소서!”(7차 캔버라 총회)라는 구호 등으로 성령이 지구상의 모든 종교들 속에서 일하는 영이라는 인식을 확대시킴으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간의 벽을 허물었다. 기독교의 성령의 보편적인 영성으로 대체시키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이 공통의 영의 역사를 따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WCC는 기독교의 성령을 모든 종교에서 가능한 영성의 이미지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고, 실제로 4차 나이로비 총회에서 영성 개념이 대두되었다.
 

맺는 말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의미(의도)없이, 그냥 유행을 따라 영성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라고 하였다. 꼭 음행, 탐욕 등만 멀리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성경적인 신앙과 성도의 하나님 섬김을 훼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경계하고 그 이름 조차 부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유행하는 ‘영성’이라는 말도 멀리하고, 그 대신에 ‘믿음’, ‘경건’이라는 성경의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더 사용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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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