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쯔빙글리와 개혁파 교회(2)

츠빙글리의 연속적 성경 읽기와 강해(lectio continua)의 회복

개혁파 교회에 대한 쯔빙글리의 첫째 기여는 역시 성경에로 가고, 처음 신약 교회의 모습에로 다시 돌아 간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성경을 연속적으로 읽고 강해하던 그 처음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이 일은 1세기 신약 교회가 그 예배를 시작할 때 아마도 그에 근거하여,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예배 개혁을 시도했던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의 전통과도 관련될 것이다. 매주 토라와 선지서의 상당 부분을 연속해서 읽던 회당 예배의 전통을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개혁하면서 처음 신약 교회는 구약과 함께 사도들의 글들도 같이 읽어 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구약과 신약으로 확정된 책들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그것을 강해하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 그것이 고대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정확히 그 모든 정황을 알 수는 없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의 설교들이나 역시 알렉산드리아서 활동했던 오리겐(185-254)의 설교들이 연속 강해 설교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도 연속 강해 설교가 예배 중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요한 크리소스톰(347-407)이 안디옥 대성당에서 사역할 때(385-97) 그는 마태복음에 대해서 89회의 연속 강해 설교를 하였고, 요한복음에 대해서 90회 연속 강해 설교를 하였으며, 사도행전에 대해서 44번, 바울서신에 대해서 250회의 연속 강해 설교, 창세기에 대해서 67회의 강해를 하고, 시편과 이사야서에 대해서도 연속적 설교를 했다고 한다. 어거스틴(354-430)도 산상수훈에 대해서 연속 설교를 하고, 요한복음에 대해서 124회의 연속 강해 설교를 하였으며, 요한일서 주석과 시편 주석도 이런 연속적 강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4세기와 5세기에도 예배 중에 성경을 연속해서 강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로마 교회에서 선택적 성구 목록(lectionary)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개 3세기 때부터라고 여겨지고, 어거스틴 때에는 제한된 날을 중심으로 이것이 사용되다가, 5세기 레오 대제(440-461년 재위)와 그레고리 대제(540-604, 590부터 재위) 때에 아주 본격적으로 소위 선택적인 읽기(lectio selecta)가 보편화되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가 1519년 1월 첫째 주부터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에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취리히에서 이전에 한 번도 그리하지 않던 방식으로” 마태복음 강해 설교를 시작하여 간 것은 중세의 관례를 의도적으로 극복하는 아주 획기적인 시도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그는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이 성경을 한 절 한절 강해 설교해 간 것을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그리했다고 한다. 이 때 그의 목표는 “원전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순수한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심령에 넣는 것”을 목적했다고 한다.

이렇게 마태복음에 대한 연속 강해 설교를 마친 그는 사도행전을 강해하였고, 그 후에 서신서들을 강해하였는데, 디모데전서, 베드로전서와 후서, 히브리서, 그리고 1524년까지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의 다른 부분을 강해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사도적 글로 여기지 않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성경을 강해한 후에, 1524년 중반부터 시편 강해를 시작하였다. 1526년 7월 중순부터 모세오경을 강해하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서까지 한 후에 1528년 3월부터 이사야서를 강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취리히 시는 이 방법을 받아들여서 1520년에는 취리히의 모든 사제들이 다 이런 방법으로 성경 연속강해를 하도록 시의회가 결정했다고 한다.

좀 더 명확한 것은 아비뇽에서 온 람베르(Franz Lambert)라는 탁발 수도승이 마리아 교회에서 마리아와 성자들에 대한 설교를 하자 쯔빙글리 자신이 “형제여, 바로 이것이 당신이 틀린 점입니다”라고 소리친 것과 관련된 일이다. 이 때문에 일어난 논쟁의 결과로 시 의회(City Council)가 정한 위원회가 1522년 7월 21일에 쯔빙글리의 방식대로 성경적 설교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취리히 시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스콜라 신학을 버려 버리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했다. 개블러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이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결정이요, 따라서 아직 모든 사항에 대한 결정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직 교회와 수도원들 전체에 대한 함의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를 성경을 따라 해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일반적 규정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활동했던 종교개혁자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 1478-1541)가 스트라스부르로 오기 전 바젤에 있을 때인 1518년에 이미 로마서 7장까지를 강해한 일이 있다고 하니, 볼프강 카피토와 쯔빙글리가 성경에 대한 연속적 읽기와 강해를 다시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카피토와 쯔빙글리의 이런 시도는 1523년 바젤의 성 마가 교회에서 이사야서를 강해한 요한 외콜람파디우스(John Oecolampadius, 1482-1531), 스트라스부르의 마토이스 첼(1477-1548) (4복음서와 마태복음 강해), 카피토(선지서 강해), 부쳐(1491-1551, 시편과 로마서, 마태복음, 요한복음, 베드로전서, 에베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요한 칼빈(1509-64)과 함께 이런 연속적 읽기와 설교의 회복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속적 성경 읽기와 강해”(lectio continua) 중심의 예배는 또한 중세의 교회력을 중심으로 한 예배를 개혁한 것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중세의 이 시도는 성경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으므로 교회력을 따라서라도 신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을 추체험(追體驗)하면서 그 의미에 동참하도록 하려던 것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성경을 가르치지 않은 것을 보충하려는 시도였다면, 성경을 차례를 강해해 가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사역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나가며 그 의미에 동참하게 하는 일은 개혁파 교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본래 처음부터 교회가 하던 일에로 돌아간 것이라는 점에 종교개혁(re-formation)의 한 의미가 있다. 처음부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차례로 공부해 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계속해서 성경을 강해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접촉한 결과로 복음과 바른 성경적 가르침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다른 개혁자들과 함께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구원하는 것이며, 인간은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한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그런 “기독교인의 삶 전체가 회개이다. 도대체 언제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복음에 근거한 삶,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한 삶의 모습을 정확히 하여 반(半)-펠라기우스주의를 극복하고, 동시에 이 세상에서 완전에 이르는 일이 가능하다는 완전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바울을 인용하면서 “칭의가 우리 공로로부터 온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의미하며(갈 2:16), 구원이 행위 탓이라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롬 4:4, 11)”라고 말한다. 또한 “(마 16:19이 말하는) 열쇠는 사람이 복음을 신뢰하도록, 곧 자기 자신을 내 버리고 부인하면서 오직 하나님 아들의 의와 공로에 우리의 모든 신뢰를 두게 만드는 믿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개혁자들과 함께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존해야 함을 쯔빙글리는 강조한다. 그는 심지어 “가장 큰 하나님 모독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이다. 바로 여기에서 노골적인 모독이 나온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내신 구원의 방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새 사람이다.

이 새 사람에 대해서 쯔빙글리는 이렇게 말한다: “새 사람,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판을 두려워하지만 그리스도를 덧입고(롬 13:14 참조), 매일 매일 자라서 장성함에까지 이르며(엡 4:13 참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다. 그러한 변화를 사람들은 감지한다!” 여기 루터와 칼빈의 이해와 일치하는 구원의 이해, 그리고 후대의 개혁 신학이 좁은 의미의 중생, 칭의, 성화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이 논의가 무르익기 이전의 형태로 그러나 성경적 입장에서 차례대로 잘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는 종교개혁 시기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그런 오해가 나타날 가능성이 없다.

쯔빙글리의 다음 말을 들어 보면 이것이 아주 명확하다: “우리가 성경에서 행위를 강조하는 곳을 가보면” “그 분 자신이 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 분의 행위인 그것을 우리 행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다. 이로부터 우리들은 우리들의 말은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것인 한 선한 것이고, 우리들의 것인 한 옳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나오는 우리의 어떤 것에 그 어떤 공로(meritum)도 돌릴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능력으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우리가 또 공로를 벌어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주께서 다 하셨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monergism). 성경적으로 사유하면 그 어떤 ‘신인협력주의’(synergism)도 있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배워 말하는 쯔빙글리와 개혁파 목회자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공동체”를 회복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만 기초를 둔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다른 개혁파 지도자들과 함께, 교회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개혁파 교회는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일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였다. 천주교회와 고교회의 성공회, 그리고 후에는 일부 루터파까지도 의식(ritual) 중심의 예배를 하였다면, 개혁파 교회는 쯔빙글리와 다른 개혁자들의 강조를 잘 받아들이면서 말씀 중심의 교회를 이루었다. 이런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해석하며 구체적으로 적용해 가는 해석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에 대한 취리히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취리히의 성경주의”라는 고트프리트 로셔(Gottfried W. Locher)의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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