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6)

글을 시작하며

옥성호는 지난 2018년 1월에 출판한 <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를 찾아서>에서 바울이 쓴 서신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복음서마저도 바울의 영향력에 의해 복음서 기자들이 쓴 허구의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옥성호의 <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를 찾아서>와 함께 <신의 변명>, <진리해부>를 빠른 시간 안에 성경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할 예정이다).

옥성호는 이 책에서 복음서가 허구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의 여러 곳을 헤집고 다닌다. 예수님의 하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12:17)1)라는 말씀도 옥성호가 신약성경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증거들 중 하나이다. 옥성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로마가 유대 민족에게 매기던 세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조금만 안다면 차마 이런 말이 예수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제국이 원한다면 위안부를 보내자고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2)

옥성호는 만약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정말로 하셨다면 그는 친 로마주의자임에 틀림이 없는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예수님은 물론이고, 그의 부친 요셉까지도 철저한 반 로마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옥성호에 의하면 반 로마주의자인 요셉이 신약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일찍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친 로마주의자 바울의 음모에 의해 감추어졌다는 것이다3)).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 로마주의자로 인식하면, 바울이 예수와 다른 기독교를 만드는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바울의 영향력 아래 있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한 것처럼 소설을 써서, 예수님을 친 로마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허접한 소설은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의 의미를 잘 몰라서 생겨난 비극이다.

이런 비극은 기성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에 대한 이 시대의 기성 교회들의 일반적인 이해는 아래와 같다.

"유대인들은 황제와 하나님 모두에게 바쳐야 할 의무가 있다. 셋돈에 황제의 화상과 문구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황제에 대한 의무가 있었다. 가이사의 화폐가 환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유대에서 황제 치하에 있던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으로 세금을 인정하고 마땅히 바쳐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신 내용에 암시되어 있는 바이다." (헤르만 리델보스, 마태복음, p. 638)

"첫째로, 인두세는 로마 황제네게 내야 한다. 이것은 둘러대지 않는 분명한 대답이다. 이것은 또한 젤롯주의를 거부하는 대답이다. 로마인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분은 이 대답 때문에 젤롯에 의해 살해당하실 수도 있었다. 둘째로 예수님은 로마 당국을 인정하셨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마태복음, p.766)

이 시대의 기성 교회들의 이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서 살 때에는 세상 나라의 권세에도 순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인정하셨고,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도 찬성하셨다”일 것이다. 이런 이해 때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롬13: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이 함께 따라 나온다.

그러나 이런 기성 교회들의 일반적인 이해도, 옥성호의 허접한 소설 <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를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의 의미를 잘 몰라서 생겨난 실수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막12:13-17에 기록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는 먼저 이 이야기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농부의 비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농부의 비유’에 의하면, 소작농들은 ‘소작료’를 내지 않으려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능욕했고, 또 죽였으며, 끝내는 주인이 보낸 그의 아들까지 죽였다. 이 비유에 이어서 이들이 예수께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고 물은 것은,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들이 주인에게 소작료(소작료도 일종의 세금이다)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면, 유대인들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괜찮은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내는 소작료와 로마에 내는 세금, 그리고 성전에 내는 세금 등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소작농이 부담해야 하는 소작료는 보통 소출의 40%정도였으며, 나쁜 주인을 만난 자들은 소작료를 소출의 50%까지도 지불했다고 한다. 또 유대인이라면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성전에 내는 세금(성전세, 인두세 등)과 십일조 등이 있었다. 이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내야 하는 세금도 있었다. 이들이 로마제국에 내야 하는 세금은 곡식은 소출의 1/10, 과실은 소출의 1/5, 또 인구조사 때마다 14-65세까지의 모든 남자가 내야하는 인두세 일인 당 한 데나리온, 그리고 물품을 가지고 항구나 성문, 관문 등을 통과할 때 부담해야 하는 통행세(물품 가격의 2~5%정도) 등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세리들은 로마제국이 부과하는 세금보다 훨씬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서,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경제적인 여건은 최악이었다. 하층민이 전체 인구의 90%가 넘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성전에서의 희생 제물의 상당수는 비둘기였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는 그들의 질문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들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까닭은 로마제국에 내야하는 과도한 세금 때문이다’라는 서글픈 변명이 깔려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도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을 반대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제국의 적으로 옭아매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물론 반대의 답변에도 함정은 있다. 만약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찬성한다면,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자격을 잃게 될 것이며, 백성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함정을 꿰뚫어 보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교묘한 언어유희(word play)로 대답하심으로써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바차리이까 말리이까”라고 한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대답 속에서 예수님의 교묘한 언어유희(word play)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대답하신 이 말씀의 바른 의미를 영원토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질문에서 사용한 “바치는 것”(막12:14), “바치리이까”(막12:15)의 단어이다. ‘바치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dou/nai”(두나이)의 원형은 “di,dwmi”(디도미)이다. 또 ‘바치리이까’로 번역된 헬라어 “dw/men”(도멘)의 원형도 동일하게 “di,dwmi”(디도미)이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그들이 사용한 “di,dwmi”(디도미) 대신에 “avpodi,dwmi”(아포디도미)를 사용하셔서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바치라’로 번역된 “avpo,dote”(아포도데)의 원형은 “avpodi,dwmi”(아포디도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바치다’의 의미를 “di,dwmi”(디도미)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바치다’의 의미를 “avpodi,dwmi”(아포디도미)로 대답하셨다는 말이다. 여기에 놀라운 예수님의 언어유희가 숨어있다.

“di,dwmi”(디도미)와 “avpodi,dwmi”(아포디도미)는 둘 다 기본적으로 “주다”(give)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주다’의 의미로 두 단어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두 단어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 그들이 질문한 “di,dwmi”(디도미)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굳이 “avpodi,dwmi”(아포디도미)로 대답하신 이유는 두 단어의 차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시는 언어유희(word play)를 위해서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두 단어의 미묘하나 분명한 차이를 살펴보자.

“di,dwmi”(디도미)는 ‘주다’의 기본 의미 외에 ‘(임금 등을) 지불하다’, ‘(세금 등을) 바치다’, ‘(빌린 것 등을) 갚다’의 의미로 쓰인다, 이럴 때 사용된 “di,dwmi”(디도미)는 ‘의무’에 대한 행위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본문 막12:15의 “바치리이까”(dw/men/도멘/원형: di,dwmi/디도미)와 마20:4(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에서 “주리라”(dw,sw/도소/원형: di,dwmi/디도미)와 눅20: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에서 “바치게”(dw,sw/도소/원형: di,dwmi) 등이 있다.

이에 비해 “avpodi,dwmi”(아포디도미)는 ‘주다’의 기본 의미 외에 ‘(은혜에) 보답하다’, ‘(은혜 또는 원수를) 되갚다’의 의미로 쓰인다. 이럴 때 사용된 “avpodi,dwmi”(아포디도미)는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딤전5:4(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에서 “보답하기를”(avpodido,nai/아포디도나이/원형: avpodi,dwmi/아포디도미)이다.

이렇게 “avpodi,dwmi”(아포디도미)의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자명해진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답의 의미는 “가이사에게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은혜 입은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은혜 입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답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을 반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가이사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유대인들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가이사에게 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가이사에게 은혜 입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바쳐야 할 세금도 없다는 말이다. 물론 유대인들 중에 가이사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과 사두개인들, 헤롯과 헤롯 당원들. 그리고 일부 바리새인들과 세리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가이사에게 은혜를 입었으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다르기 때문에 로마제국에 물리적으로 대항하시지 않았을 뿐이지, 결코 불의하게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들이 질문한 함정을 피하시기 위해(십자가의 시간표에 따르시기 위해) 예수님은 언어유희를 사용하셔서 로마제국에 내는 세금을 교묘하게 반대하셨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언어유희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눈치 챘기 때문에 기이하게 여겼던 것이다.
 

글을 마치며

옥성호가 주장한 것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 기자들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또 기성 교회들의 이해처럼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으로 “로마제국의 통치를 인정하셨고,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도 찬성하셨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이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으로 롬13:1-7과 벧전2:13-17을 가지고 오면 안 된다. 왜냐하면 롬13:1-7과 벧전2:13-17은 ‘정당한 권세’가 전제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일차적인 독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로마제국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불의한 권세였던 것과는 다르게,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롬13:1-7에서의 로마제국의 권세는 그들에게 정당한 권세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벧전2:13-17도 전후문맥을 보면 당연히 정당한 권세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과 롬13:1-7과 벧전2:13-17은 배경과 그 성격과 의미가 전혀 다른 말씀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특히 성경 말씀을 가지고 책을 쓰는 사람들)은 성경 원문의 의미와 그 원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삶의 정황과 전후문맥 등을 신중하게 잘 살펴서, 성경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김성로의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김요한의 <지렁이의 기도>, 유석근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그리고 옥성호의 <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 <신의 변명>과 같은 허접한 소설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서점가에 진열되는 슬픈 일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 각 주 ---

1) 옥성호가 <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를 찾아서>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은 마22:21이다.

2) 옥성호, 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를 찾아서, p. 254.

3) 옥성호, 신약성경이 숨긴 야고보를 찾아서, pp. 237-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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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