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낙홍 교수와 에드워즈 1


에드워즈의 신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신사도 운동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현상, 즉 성령의 반복적인 임재, 성령의 엄습으로 인한 특이한 신체적 현상들, 예를들자면 쓰러짐, 몸의 기운이 빠짐, 황홀경 체험 등을 당연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상 또는 의지와 무관하게 밀려오는 상상, 삼위일체 체험, 하나님과의 주관적인 달콤한 대화 등의 신비적인 현상을 당연시 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을 '신령한 조명', '신령한 빛', '신적인 빛'이라고 했다.

오늘 날 신사도 운동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많은데, 에드워즈의 조금 다른 점은 예언과 직통계시가 주장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경의 특별계시는 사도시대로 종결되었고,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자들 가운데 그를 이단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주장하였던 성령의 ‘신령한 조명’, ‘신령한 빛’, ‘신적인 빛’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성경이 가르친 성령에 관한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떠나시기 전에 장차 제자들에게 오실 성령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다.

1)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7)

2)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3) “보혜사 ...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

4) “그가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리라” (요16:8)

5)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6)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고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3)

7)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 16:14)

성령의 사역에 대해 그리스도 같이 잘 아신 분은 없다.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성령과 함께 계셨고, 성령에 의해 성육신하셨고, 자기를 대신하여 성령을 지상에 보내신 분도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떠난 후 성령이 오시어 그리스도가 이미 주신 말씀을 증거하신다고 했다. 칼빈과 서철원 박사 등의 개혁신학자들이 가르치는 신약시대의 성령의 사역도 그리스도가 말한 것과 같다. 정통 개혁신학자들이 말하는 신약의 성령의 사역은 에드워즈의 하나님 직접 체험을 내포하고 특이한 신체적 현상을 동반하는 ‘신령한 조명’, ‘신령한 빛’, ‘신적인 빛’ 주장은 다르다.
 

"성령의 어려운 부분들을 해석할 때는 성경 외적인 다른 것에 의해 해석하거나 교회의 권위에 의거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와 조명에 의존해서 해석한다 "(서철원 박사, 신학서론, 251)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령은 복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 보내졌으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성령의 지배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 지배받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인도는 말씀과 분리할 수 없고, 해소될 수 없도록 말씀과 결합되어 있다."(서철원 박사, 신학서론, 279)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사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외부적인 증명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기독교강요, 3.2.33)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면 즉시 말씀을 폐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展示)를 위해 자신의 말씀을 인류에게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어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기독교강요, 1.9.3)

그리스도와 개혁신학이 가르치는 성령의 조명은 수 천년 전에 주신 계시의 말씀을 지금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성령의 신비적인 현상이 아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성령의 ‘신령한 조명’, ‘신령한 빛’, ‘신적인 빛’은 칼빈과 루터가 기초를 세운 종교개혁 신앙에서는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주장들이다. 에드워즈의 그 주장들은 중세의 신비주의 명상가 버나드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에드워즈처럼 신자가 그리스도를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달콤함’을 강조하였던 원조는 버나드였다. 버나드는 그리스도에 대한 달콤한 감정과 각적 체험이 신자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말씀과 신앙에 대한 확신을 준다고 했다.

비록 버나드가 신인합일의 신비적 체험으로 성경의 신약 성경의 특별계시 현상들 체험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버나드의 신비주의의 주된 강조점은 명상을 통한 신일합일의 황홀경, 즉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달콤한 체험’으로 인한 신자의 신앙의 확신과 삶의 변화에 무게를 두었다. 그것이 버나드의 신인합일 신비주의의 핵심이었다.

에드워즈의 신비주의도 거의 같은 내용과 경험들이었다. 에드워즈도 버나드와 같이 명상하기를 힘썼다. 그 당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게는 ‘명상’과 ‘묵상’이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고, 매일 ‘명상’하기를 힘썼다. 그들의 기록에서 명상에 대한 많은 내용이 등장하는데, 성경의 한 두 구절이나 기독교의 삼위일체 등의 어떤 교리를 소재로 명상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에 대한 이해와 적용을 주시는 성령의 조명과 전적으로 다른 신비적 체험이 따라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감각적으로 달콤하게 체험하기를 자주했고, 하나님과 내면의 달콤한 대화를 오래 나누었다고 자주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감각적으로 직접 맛보았다고 기록했고, 삼위일체의 영광과 비밀을 '환상' 또는 '상상' 가운데 맛보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신비주의 명상에 빠진 위험스러운 영성가였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그의 신앙의 기초는 성경 말씀과 그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이 아니었다. 에드워즈가 말씀과 함께 특별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감각’에 강조를 두었다는 사실은 그를 이단성이 있었던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이미 18세 무렵부터 들판을 걷다가, 또는 한적한 숲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새롭고 특이하고 ‘달콤한 감정’을 느끼기를 자주하였고, 그리스도와의 내면의 달콤한 대화를 나누었고, 환상 같기도 하고 상상 같기도 하는 하나님 직접 체험이 자주 일어났다고 기록하였다.

에드워즈의 그것은 중세의 신비주의 명상가들이 추구하였던 신인합일 이단현상과 동일한 것이다. 왜 에드워즈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중세 신비주의자 버나드의 사상이 청교도 조상 리처드 십스를 통하여 청교도 세계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보스톤에서 리처드 십스의 초상화를 서재에 걸어두고 목회했다는 존 카튼이 십스의 명상의 영향을 받아 뉴일글랜드에서 실천하고 전파하였다고 한다. 존 카튼의 신학은 다른 청교도들의 오류에서 많이 개선한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 여전히 청교도들의 오류와 한계를 답습하기도 했다. 그래서 동료 청교도들도 그의 신학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칼빈과 루터는 버나드의 건전한 교리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명상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신비주의와 명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서 종교개혁 신학에는 에드워즈처럼 그리스도와 달콤한 내면의 대화를 즐기거나,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환상 또는 상상을 즐기는 신비주의 영성이 자리잡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에드워즈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칼빈의 책을 그 다지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에드워즈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배우기보다는 존 카튼 등의 선배 청교도들의 신학을 배우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서 칼빈의 신앙과는 전혀 다른 신비주의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의 에드워즈 전문학자들, 백금산, 이상웅, 양낙홍, 김남준, 강웅산 등은 에드워즈의 위험한 신비주의 성향을 문제 삼지 않았다. 문제 삼기는커녕 오히려 에드워즈의 신비주의 이단성을 교회사 2,000년을 통틀어서 최고의 영성의 대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추켜세웠다. 사실 ‘영성’이라는 말도 개혁교교회의 학자들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 직접체험에 대한 열린 자세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명상을 통한 하나님 직접체험, 즉 버나드와 에드워즈 등이 추구했던 신인합일 신비주의가 영성이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거짓 성령이 주는 거짓 은사, 즉 방언, 기름부음, 환상 등으로 맛보는 하나님과의 인간 영혼의 합일의 길이 영성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추가되었다. 청교도들이 영성을 추구했던 것은 그들에게 버나드에게서 유래한 신인합일주의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즈에게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하나님 환상’ 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개되는 하나님에 대한 상상’, 그리고 ‘하나님과의 달콤한 대화’, ‘신랑으로 신자에게 다가오는 그리스도와의 달콤한 체험’ 등은 칼빈과 서철원 박사 등이 가르치는 정통 종교개혁 신학의 성령의 조명이 아니다. 만일 지금 개혁교회의 학자들이 에드워즈가 체험한 그런것이 신자의 건전한 신앙을 강화시켜주었다고 가르친다면, 오늘 날의 신사도 운동, 관상기도 등을 개혁교회들은 무슨 핑계를 대고 배척하고 책망할 것인가?

그러나 한국교회의 개혁신학자들은 이와 같이 위험한 에드워즈 등의 청교도들의 신인합일 신비주의와 그것을 체험시키는 에드워즈가 주장한 거짓 성령의 역사, 즉 에드워즈의 ‘신령한 조명’, ‘신령한 빛’, ‘신적인 빛’ 주장에 대해 전혀 성경적인 방어막을 쳐서 교회를 보호하지 않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에드워즈 연구자인 양낙홍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말씀의 나타나는 신적 탁월성(the divine excellency)에 대한 진정한 지각(a true sense)’ 혹은 ‘이해’(apprehension), 그리고 ‘그것들의 진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a conviction of the true and reality of them)이라고 대답한다” (양낙홍, 191)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 더 좁혀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과 사역’들에 대한 ‘영적이면 구원을 얻는 확신들’은 그것들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에 대한 안목이 생겨야 비로서 얻을 수 있다. 신령한 빛이 영혼에 비쳐 우리의 영안이 영릴 때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학실히 이해하고 ‘보고’(see), ‘지각하고’(sense)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이성적으로 믿는’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감각이 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사변적으로 판단(speculative judging)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신가를 감지(sense)한다는 것이다.” (양낙홍, 191-92)

양낙홍 교수는 에드워즈가 ‘신령한 조명’, ‘신령한 빛’, ‘신적인 빛’라고 명명하고 주장한 신비적인 성령의 역사들을 통해 성경 말씀에 대한 탁월한 체험과 확신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에드워즈가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몸으로 감지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에드워즈가 체험한 그런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은 없었다. 누가 그랬었는가? 양낙홍 교수의 말은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신비주의 이단성을 옹호하는 위험한 말이다.

“신적 조명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깊은 영성의 표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비주의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계시의 객관성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신자 개인이 그 계시를 내면적으로 깨닫는 주관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은 에드워즈를 비롯한 청교도 신학의 주요한 특징들 중 하나다. 성경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에드워즈 주장은 ‘마음 눈’이 열려야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단지 인간의 지성과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옳은 것이다.” (양낙홍, 202)

양낙홍 교수는 명백한 에드워즈의 신비주의 이단성을 계시의 개관성을 개인적 차원의 계시의 주관성으로 상승시키는 특별한 하나님의 특이한 은혜였다고 오도하였다. 개혁교회의 역사에서 에드워즈 이전과 이후에 그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건전한 신앙생활을 했던 신앙의 사람은 없었다. 성경 66권의 확립 이후 성령의 역사는 오직 기록되어진 계시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를 깨우치시고, 그리고 시대를 달리하는 현대의 교회들이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게 하시는 역사하심이다. 양낙홍 교수의 주장은 자칫 이중계시, 즉 성경저자들에게 주신 1차 계시, 그리고 후대의 특별한 성경 독자에게 주시는 해석과 확증으로서의 2차계시라고 오해될 수도 있는 내용이다.

“그것은 사실상 개혁주의 전통의 초기부터 존재해 왔던 성경관이기도 하다. 청교도들을 비롯한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성경의 ‘자증성’을 통해 그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내적으로 확신했다. 성경 말씀 자체가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임을 확증해주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양낙홍, 202)

성경의 자증성이란 성경의 권위와 그 내용의 진실성이 오직 기록되어진 성경 자체에 의해 확립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이 성경의 권위와 진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에드워즈와 같은 특별한 독자에게 신비적인 2차 계시와 비슷한 방식으로 역사하여 성경이 믿어지고 확신되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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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