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목사님! 또 하나의 의문은 로이드 존스목사님의 청교도신앙에 관한 책 <부흥>을 보면, 부흥이란 개념에 관하여 우리가 많이 오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진술되어 있습니다. 부흥이라는 것에 관한 초점은 부흥을 일으키는 성령을 인간이 오라 가라 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만, 부흥에 대한 소망을 늘 가슴페 품고 기도하는 우리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자체를 그 차원에서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신사도운동을 추구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내용은 일찍이 얼핏 들어서는 알고 있습니다 ... <신앙감정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답변>
스데반황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그리스도 보혈교회 성도님이시군요. 좋은 교회입니다. 성도님의 질문의 내용을 제가 최대한 이해하려고 추리하였습니다. 추리하면서 문장도 조금 손질했습니다. 질문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았습니다. 

1)로이드 존스의 부흥 신학에 대해
2)에드워즈의 설교를 부흥을 사모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3)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에 대하여

제가 질문의 요지를 잘 파악했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는 본인의 마음에 있는 내용을 선명하게 표현하여 읽는 사람에게 의미가 잘 전달되도록 신경쓰시면서 표현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파악한 것들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엉뚱하게 파악했을지라도, 제가 이미 파악한 중요한 것들에 대해  기술하므로 유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로이드 존스의 부흥 신학에 대해

저도 로이드 존스의 책 <부흥>을 잘 읽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극히 강조합니다.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 속으로 펠라기안주의를 끌어들이고 부활시킨 찰스 피니는 부흥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임을 부정하여 기독교 신앙에 큰 왜곡을 초래하였습니다. 피니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것이 부흥을 일으키는데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부흥은 사람이 하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피니는 회개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하였지만, 인간이 회개를 함으로 부흥을 일으키는 성령이 일하시게 준비한다고 함으로 사람에게 이끌리는 성령으로 격하시켰습니다. 

피니의 주장에 의하면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요건들을 사람이 준비하면 뒤를 이어 하나님이 일하시어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성과 전적인 은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너뜨렸습니다. 피니가 그런 부흥 사상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아담의 원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어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였고, 스스로의 구원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능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자연적 인간의 상태에 대해 비성경적인 낙관주의 관점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피니에 비하면 로이드 존스는 인간의 전적타락, 구원에 대한 전적무능을 확실히 강조하였고, 구원과 부흥이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하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성경적이고 훌륭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이해와 진술에는 우리가 결코 받을 수 없는 위험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령의 단회적 강림(사도행전 2장) 부정

신약의 성령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심각한 오해의 상태에서 <부흥>을 저술했습니다. 부흥은 오직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점을 잘 강조했으나, 곧 이어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기독교를 파괴하는 수준의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신약의 성령은 구약의 성령과 같은 분이면서 동시에 다른 분입니다. 신약의 성령은 구약의 성령과 달리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이루신 속죄를 지상의 신자들에게 적용시키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대신하기 위해 오신다고 지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

신약의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구속을 지상의 신자(교회)들에게 적용시키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을 ‘주의 영’, ‘예수의 영’, ‘예수’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어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우리가 의로워졌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의 원래 계시던 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지상의 신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성령을 자신의 이름으로 파송하여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요청을 따라 성령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상에 파송하셨습니다.

성령의 지상 강림은 역사적으로 단회적입니다. 유월절에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순절 날에 자기의 이름으로 성령을 지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상에 오신 날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입니다. 신약의 성령은 그날 지상에 강림하셨습니다. 이후 시대마다 주기적으로 성령이 지상에 하늘에서 더 강림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오순절-신사도운동은 시대마다 성령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강림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얻는 신자 개인에게도 성령이 단회적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임하신다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에 대한 신앙이 아니므로 결룩 다른 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성령은 쓰러짐, 몸이 떨림, 몸이 마비됨, 기진맥진하게 만듬, 혀가 괴상한 소리를 내게 함 ... 등의 괴이한 일들을 일으킵니다. 성령에 대한 신앙이 성경에서 벗어났으므로 성경의 성령을 모조하는 거짓 영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도 시대마다 성령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강림하여 부흥을 일으켜 주신다고 강조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은 성령을 더 부어주심’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령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더 부어짐으로 부흥이 일어난다고 가르쳤습니다. 개인에게도 성령이 반복적으로 임한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성령세례가 한번이 아니고 반복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부흥은 교회에 성령이 더 부어지고, 개인들에게 성령세례가 더 많이 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성령을 이렇게 모욕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가르친 이유는 조나단 에드워즈 때문일 것입니다. 에드워즈도 성령을 그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령 이해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더 임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의 부어주심을 구하자고 늘 강조했습니다. 오순절 운동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오순절 성령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순절 운동의 조상이 요한 웨슬리의 완전성화 사상이라고 이해되었는데, 이제부터는 에드워즈의 성령과 부흥 사상이 오순절 운동의 조상이라고 이해를 달리해야 합니다. 실제로 에드워즈(1703년 출생)와 동갑내기였던 영국의 웨슬리는 에드워즈가 신대륙에서 출판하는 책들을 정독했고, 자신의 내용을 조금 편집하여 영국에서 자시 출판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게하였습니다. 웨슬리에게 에드워즈의 영향이 컸습니다.

에드워즈의 설교들로 구성된 <구속사>라는 책을 보면, 그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신앙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약의 성령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지상의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분, 그래서 신약의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고 ‘그리스도의 영’이시고, ‘또 다른 예수’라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성령을 구약의 에녹의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자주 지상에 출몰하여 부흥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시대마다 부어진다고 보았고, 자신이 일으킨 신대륙의 대각성(1740-42년) 부흥도 하늘에서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에드워즈의 성령 신앙은 심각한 오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역사하는 성령은 거짓 영이었지 결코 성경의 성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대각성 부흥의 모습이 실질적으로 신사도운동 부흥과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열매를 통하여 거짓 선지자인지 하나님의 종인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에드워즈의 대각성 때문에 신대륙의 교회들은 더 무질서해지고 파괴되었지 결코 더 성경적이고 신실한 교회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드러내는 학자들보다는 에드워즈를 미화하는 학자들이 거의 전부였으므로 에드워즈의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 신학도 에드워즈와 동일했습니다. 성령론으로만 보면 로이드 존스는 거의 신사도 수준입니다. 지금까지 로이드 존스를 칭송하는 사람들만 많았지, 그의 이런 점을 사실대로 지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의 심각한 이단성들을 지적한 사람은 저일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 사상 속에 귀하고 좋은 점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좋은 점들 때문에 로이드 존스의 거짓된 성령 이해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고 함께 섞여서 흘러 다니고 있습니다. 밥 그릇에 99% 좋은 밥이 들었지라도 그 속에 1%의 독이 베여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먹는 밥이 아니고 쥐를 잡는 독약(쥐약)입니다. 로이즈 존스의 성령 이해의 이단성이 명확하게 지적되지 않으면 그의 다른 모든 좋은 점들은 결국 1%의 강한 독을 먹이는데 사용되는 도구일 뿐입니다.

(2) 심각한 성령모독

로이드 존스의 성령 이해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는 심각한 성령모독 성향입니다. 에드워즈를 자신의 최대의 스승으로 여겼으므로 에드워즈의 성령론과 부흥사상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성령을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않고, 부흥과 하나님의 일을 진전시키는 일종의 하나님의 원리 또는 능력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므로 성령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내면적으로, 주관적으로 직접 경험하기도 했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과 내면적인 달콤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등의 신인합일 신비주의 체험도 많았습니다.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로 자신의 아내와 많은 사람들에게 쓰러짐, 몸의 기진맥진, 괴이한 웃음과 통곡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격변, 히스테리 증상들이 나타났고, 1734-35년 부흥의 끝에서는 사람들의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자살극이 벌어졌습니다. 성령이 이상한 신체적인 현상들을 일으켜서 교회와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사람들이 자살 충동에 시달리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대각성(1740-42년)이라고 알려진 에드워즈의 대표적인 부흥 때에도 이상한 성령들로 인해 괴상한 신체적인 현상들이 많이 나타났고, 뉴잉글랜드의 전체 교회들이 악영향을 받아 무질서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속한 교회를 힘들게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괴이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며 떠돌았습니다. 어느 때보다 교회들이 찢지고 갈라지는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에드워즈의 대각성의 이단성 논쟁으로 인해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은 양분되었고, 그 당시의 신학교였던 하바드, 예일이 에드워즈 측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이 새로운 또 하나의 신학교(1746년)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 자신에게서 나타난 열매도 아주 나빴습니다. 지금이라도 에드워즈의 부흥과 성령 이해에 대해 객관적이고 올바른 연구 조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에드워즈의 영향을 크게 받은 로이드 존스도 성령을 극히 왜곡하는 주장을 했습니다. 특별한 부흥의 때에는 평소와 다른 특이한 성령의 역사가 자주 일어난다고 매우 강조했습니다. 부흥의 때에는 쓰러지는 등의 신체의 물리적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주장했고, 부흥의 때에는 예언의 은사도 나타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방언의 은사도 부흥의 때에는 나타날 수 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가 어디서 보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로이드 존스는 에드워즈의 부흥이 일어날 때 기도하는 에드워즈의 부인 사라의 몸이 저절로 떠올랐다는 말도 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사람들에게서 신체적인 히스테리 현상이 예사로이 일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의 성령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에드워즈의 대각성 때에 역사한 거짓 영을 기독교의 성령이라고 믿었고, 에드워즈를 지극히 존경했으므로 에드워즈를 통해 나타나는 일들을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진리로 수용했습니다. 로이드 존스에게 좋은 가르침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 그의 이런 유형의 위험스러운 내용들은 지적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로이드 존스에 대한 부정적인 말은 금기시 되었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그의 성령 이해의 심각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한 사람은 바로 저일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부흥을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강조한 것은 좋았으나, 성령의 성품과 사역에 대해 저질적이고 엉뚱한 소리들을 했으므로 잘 분별하고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로이드 존스의 책들은 독이 베여있는 좋은 밥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2)에드워즈의 설교를 부흥을 사모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3)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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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