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종교 전문인 ‘크리스천 월드’가 1993년에 발표한 세계 50대 교회 중 한국에 23개가 있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대단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93년 이후에 보인 한국교회의 자화상은 아니다. 즉 정치적 입장, 역사관, 불륜, 성폭행, 학력, 위조, 전별금, 횡령, 사기, 우상화(교주 현상), 세습, 이단 등에 특히 대형교회(성인 출석 300명 이상)와 초대형교회(성인 출석 1000명 이상)가 관련되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기독교의 사회적 이미지와 전도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개독교, 목레기).

이러한 비참한 현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교회란 무엇이고 특히 ‘참된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기에 개혁주의 관점에서 논한다면 교회의 정의에서 반드시 이해가 되어야 할 단어는 3가지로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가족(familia Dei), 신자들의 어머니이다,

그렇다면 이 3가지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도바울, 교부들, 칼뱅의 교회 이해의 핵심 단어로 ‘그리스도의 몸’이란 교회의 주인이 인간이 아닌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고전 12:27 ; 엡 4:11-16)이시기에 세습 및 교단의 세습금지법으로 인해 행하는 악한 행동인 낙하산 청빙(이미 내정하고 형식적인 청빙)을 하는 것은 ‘교회론적 이단’이고 ‘하나님의 가족’은 교회는 이 세상에서 중시하는 학연, 지연, 혈연을 넘어 신앙으로 동일한 아버지(주님의 기도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이고 ‘신자들의 어머니’란 신앙생활은 반드시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만 바른 믿음(산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무교회주의(지역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사실상 하지 않는 것으로 가나안 신자도 해당)’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다수의 신자들은 모르기에 ‘참교회’가 아닌 ‘거짓교회’를 다니는 비참한 현실에서 16세기 교회개혁을 하면서 작성된 대표적인 2개의 신앙고백서인 ‘아우구스부르크신앙고백서(1530년)’와 ‘벨기에신앙고백서(1561년)’는 바른 기준으로 ‘참교회’는 반드시 바른 설교와 바른 성례전이고 벨기에서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여 권징을 주장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너무나도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국교회 이해 결여에는 신학자와 목사들의 책임이 크고 이제라도 예방을 위해서 ‘교리교육(Catechism)’을 중요시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목사들에게 ‘연장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불어 바른 목사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 기준은 2가지로 ‘바른 설교’와 ‘청빈한 삶(목사가 노동자의 평균보다 급여를 많이 받는 것은 잘못된 방법으로 물질적 타락 가능성이 있고 기독교 역사가 증명)’이고 사도들, 교부들, 루터, 칼뱅, 웨슬리 그리고 참신자들로 삶의 방식은 청빈이었다.

그리고 특히 개혁주의를 추구한다는 국내의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과 ‘선교적 교회론’을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개혁주의(오역이고 바른 번역은 칼빈주의)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즉 ‘교회성장학’은 철저하게 인본적 이해에서 나온 개념으로 복음주의를 추구하는 풀러학파(풀러신학대학원은 개혁주의가 아니기에 신학적 충돌, Fuller 출신들은 비칼빈주의자)에서 주장하는 이론이기에 개혁주의 교회론에서 추구하는 전도적 이해하고 너무 다르다.

그리고 ‘선교적 교회론’은 사실상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영향에서 나온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가 아닌 “세상을 위한 교회”의 추구인데 교회 안에 카페(한국교회 안에 1000개 이상의 카페교회가 존재, 심지어 어떤 보수 장로교회는 프랜차이점 카페도 운영), 미니 도서관, 사회복지 시설, 어린이집, 문화 교육 시설, 노인대학을 운영(이러한 일들은 교회의 본연의 일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행할 일)하고 예배의 특정 장소로 학교의 강단과 움직이며 예배하는 형식을 하는 것(포스트모더니티의 영향으로 인본주의)은 정통적 교회론의 관점과 개혁주의 교회론으로부터 비판받아야 하고 신학적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비정통적이고 비개혁주의적 방법들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이 시대에 인기가 많고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이 세상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로 거룩의 본질인 ‘예배공동체’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바르게 제시하여 20세기에 선교의 혁명적 방향을 제시한 신칼빈주의자인 존 파이퍼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선교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그 목표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선교가 아니라 예배다.”라 한 것을 ‘선교적 교회론’을 주장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명심하고 반성하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로 자신의 정체성(예배공동체)을 재확립하고 중대형교회가 되는 방법 추구가 사실상 현대 사회의 특징인 조직의 체계화와 거대화이기에 올바른 성경적이고 신학적 사고로 반대하며 저항하고 ‘작은 교회’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논하는 작은 교회란 목사 1명이 목회하는 교회로 중대형교회처럼 부목사를 두어 목회 아닌 목회를 하게 하는 것(주일에 설교하지 않는 부목사는 사실상 목회라 할 수 없고 담임목사는 주일에 설교자로만 있는 것이 문제)이 아니라 철저하게 출석 신자와 담임목사의 인격적 관계(설교자와 회중이 반드시 인격적 관계가 되어야 바른 설교도 가능)를 중시하는 것이고 이러한 목회는 초기교회부터 강조된 것이고 개혁주의 교회에서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1개 교회의 1명의 담임목사만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목회는 신자들과 인격적 관계가 중심이기에 심리학자 수잔 핑커와 로빈 던파의 주장대로 “인간 관계의 최대가 150명인 것을 제시”한 것은 사실상 맞는 것이고 체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대형교회는 담임 목사와 신자들의 인격적 관계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이러한 교회는 ‘순기능’을 하는 교회가 아닌 ‘역기능’을 하는 교회로 결국은 괴물이 되는 것을 기독교 역사와 사건들이 잘 보여 주었다.

그래서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사회적 문제만 아니라 중대형교회는 정통적 교회론을 파괴하는 사악한 행동인 ‘교회 버스 운행’을 하여 지역 교회를 파괴하고 ‘지성전’을 만들어 교회를 프랜차이즈화하고 ‘위성예배 및 녹화 설교 사용’으로 예배의 본질을 파괴하고 ‘각종 인본주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교회를 엔터테인먼트화를 하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종류의 헌금들’을 만들어 신자들이 사실상 물질만능주의를 추구하도록 만들고 결국은 ‘세습’을 하여 교회론적 이단을 만들어 세상이 교회를 기업처럼 여기도록 만들어 개독교와 목레기의 주범이 사실상 중대형교회들이 많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신학적이고 신앙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가를 보면 가장 우선적으로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칼뱅이 주장한 “교회의 우수성은 다수로 구성되지 않고 순결에 있다.”와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였고 역사학자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작은 교회>의 저자인 루스 터커는 “교회의 존재 가치는 크기가 아니라 깊이다.”라고 한 표현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즉 칼뱅이 말한 ‘순결’과 투커가 말한 ‘깊이’는 사실상 바른 설교와 바른 성례전이라 할 수 있고 세상 가치관(“숫자가 진리를 앞선다.”)에 물든 목사와 신자들이 깊이 반성해야 할 핵심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중대형교회는 세상 가치인 조직의 체계화와 거대화가 아닌 조직의 유기체(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교회의 주인)와 신앙공동체적 가족화(담임목사와 신자의 인격적 관계로 담임목사는 출석 신자를 다 인격적으로 알며 기도)를 추구해야 하고 실천적으로 2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는 반드시 ‘분립 개척 선교(출석 신자들을 작은 교회로 파송 또는 부목사나 목사를 청빙하여 출석 신자들과 함께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를 하는 것이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섬기는 실제적인 방법이고 중대형교회는 정통적 교회론을 파괴하는 사악한 행동(앞에서 언급)을 회개하고 중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올바른 행동이 교회의 4대 속성인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지키는 자세인데 안타깝게도 지켜지지 않았으나 지금부터는 신학교육을 통해서 지키고 중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은 회개하고 바른 신학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단은 정신을 차리고 ‘세습금지법을 의무화’하고 신학대학원의 ‘교역자 양성의 비학위 과정을 폐지’하고 ‘무인가 신학을 폐지’하여 위탁 또는 협동 신학교육을 하고 ‘교역자 연장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스 터커가 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작은 교회>를 반드시 목사와 신자들 그리고 신학생들에게 읽기를 강권하는 이유는 이 시대에 올바른 교회 이해에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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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옥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개혁신학연구원, Knox Theological Seminary(D.Min.), Grace Theological Seminary(D.Miss.Pro.)에서 공부하였고, <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등 6권의 저서와 1권의 공저를 출판하였다.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강사였고, 현재는 경북 영주의 바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바른성경아카데미(RBA) 원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 실천하려고 연구하는 실천신학자이고, 또한 장례지도사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고 있다. potentia-dei@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