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를 다녀오고, 두 달 쯤 지났는데, 세 군데서 나를 스카웃하기 위해 연락이 왔다. 군포에서는 집사 10여 명이 자기 차를 판돈을 가지고 와서 교회를 개척하자고 했고, 서울에서는 성도 4-5천명 된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오라고 했다. 다른 한곳은 가정집으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성도들이 있는 인천 지역이었다. 그곳은 내가 전도사로 있었을 때 함께 했던 성도들이 있는 곳이며, 후일에 개척 제의가 들어 온 세 곳 중 내가 선택하게 된 곳이다.

누군가가 “목사님 목회 성공 요인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한다. “일꾼을 잘 만나야 합니다.” 개척 당시 나에게는 신실한 일꾼이요, 동역자들이 있었다. 하흥수, 김기풍 장로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만난지 15년이 되었는데, 이전 교회에 전도사로 있을 때 만난 사람들로 선교를 떠나기 전부터 나에게 개척을 하자고 했었다.

그때는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잡지 못해 개척하지 않겠다!”고 떠났는데, 일 년에 두세 번씩은 꼭 집에 찾아와서 “전도사님은 저희랑 같이 가야 될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개척에 소명이 없다. 나는 개척 안 한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확고하게 “당신들하고는 더욱 안할 테니까, 절대로 찾아오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후로도 계속 “전도사님 얼굴만 보고 갈게요.”하면서 선물을 건네주고 가며, 명절 때마다 찾아 왔다.

그러던 어느 해,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서는 “저희 다니던 교회 그만 두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 집에 찾아와(현재 만수 3지구 현대아파트) 설교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가지 않겠다”며 매몰차게 거절했지만, 그들은 더욱 간곡하게 “한번만 해주세요, 그리고 저희는 흩어질게요.”라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부탁이 너무나 간절해 한번만이라는 생각으로 인천 가정집으로 향했다.

교회를 세우려는 열정으로 가득한 그 사람들에게 창세기 12장 1~3절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자”란 내용의 메시지를 전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사...” 나타나신 하나님, 임재하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만났듯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가나안땅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무턱대고 전도하고, 헌신하고, 교회를 세우고, 주님께 생명을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 곳에 하나님의 덮으심이 있었다.

당시 그분들은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킬 야망을 갖는 메시지를 기대했겠지만, 나는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했다. 우선순위가 사역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으로 가자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일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서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메시지를 듣고,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뜨거운 관심과 열정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설교를 또 해달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매주 성경공부하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30명의 성도가 아파트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성령의 불이 임하는 가운데, 달고도 오묘한 말씀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밤이 새는 줄 몰랐고, 자다가 일어나서 다시 말씀을 전하기를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인천에서 개척이 시작되었다.
 

1996년 5월 12일, 성산교회 설립 모습과 고광종 목사 안수식 장면
1996년 5월 12일, 성산교회 설립 모습과 고광종 목사 안수식 장면


가정집에서 주님의 덮으심과 함께 시작된 성산교회는 한 달 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차게 되었다. 결국 1996년 5월, 각 가정에서 200만원, 그리고 장모님(古엄춘희 권사)이 1000만원을 더해 2천만 원을 모아 보증금 500만원에 월 35만원의 남동구 만수 1동 지하 35평의 귀한 성전을 얻게 되었다. 환경은 참으로 열악했다. 옆은 오락실이라 말씀을 전할 때마다, “뿅뿅..뻥, 탕탕.”하는 소리가 방음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옆벽을 타고 흘렀고, 지하 하수도가 터져 예배당으로 역류해 역겨운 냄새로 진동할 때도 있었다. 또, 바퀴벌레, 하루살이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가 일쑤였다.

더욱이 35평 중 3분의 1은 식당, 그 중의 반은 유아실로 사용하고, 나머지 3분의 2를 본당으로 사용해야 할 만큼 공간이 부족했고, 의자 살 돈도 부족해 어느 학원에서 버린 의자를 주워 다 예배를 드려야했다. 그러나 성도들의 열정과 믿음만큼은 비할 데 없이 크고 높았다. 나는 주일 대예배를 칠판 강의로 세 시간씩 전했고, 저녁예배 또한 3~4시간 동안 말씀을 전했다. 수요, 금요 예배 때도 쉴 새 없이 말씀만 전했는데, 그 시간은 부흥회를 연상케 할 정도로 뜨거웠다.

환경은 열악하고 공간은 아주 비좁았지만, 지하 예배당에 말씀을 통해 엄청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울, 일산, 안산, 안양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문에 소문을 듣고 찾아와, 지하로 옮긴지 2년이 채 못 되어 성도수가 80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 당시 설교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많은 목회자가 사역을 통한 건물 중심의 목회를 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은혜를 통한 관계중심의 목회를 하자. 교회 건물보다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일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질 것이다. 우리는 건축하지 말자, 하나님이 최고의 멋진 건물을 건축해 놓고 5년 후 우리가 자연적으로 부흥하면, 그 건물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건축에 관해 염려하지 말고, 오직 은혜만 받자, 기도도 전도에도 너무 치우치지 말고, 은혜만 받자. 하나님께서는 전도, 헌신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교제하며 나누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율법을 통해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잘 보이려 했던 성도들이 구원받은 것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누리며, 밤새도록 예배당에 모이기를 힘썼다. 지하 예배당에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또한 정신병원에서 치료 못한 사람들도 왔다.

한 번은 강화도에서 80세 되신 앉은뱅이 점쟁이가 말하기를 "스물 두 살 된 자기 손녀딸이 있는데, 삼일 후에 데리고 간다"고 했는데, 정확히 삼일 후 그 손녀딸이 정말로 약을 먹고 죽고 말았다. 장례식을 치러달라는 부탁을 받고 장례를 치르고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며칠 후 그 점쟁이 할머니는 이번에는 아들을 데려 간다고 했다. 지목된 아이가 겁이 나 어찌 할 바를 모를 때 이모를 통해 나와 연결이 되어 심방을 가게 되었다. 후에 듣게 된 일이지만, 그때 점쟁이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성산교회 목사님 오시니까 나 장독 뒤에 숨어 있다가 목사님 돌아가면 나올거야."라고 하더란다.

내가 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에게 “걱정하지 말라”하며 복음을 전하니, 울면서 ‘하나님 아버지, 왜 이제 날 찾아 왔소’하며 슬퍼하셨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후 자연스레 귀신도 빠져 나갔다. 이 곳 지하 예배당에는 정신 지체, 우울증, 귀신 들린 자 등 정신적으로 어떤 문제를 지닌 자일지라도 복음으로 교제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섬김이 있었고,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영혼이 살아나며, 질병이 치유되고, 가정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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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종 목사는 인천성산교회(예장 합동)의 담임목사(1996년~현재)이다. 건강한 성경적 신학에 기초한 목회를 매우 중시한다. 특히 신자들에게 성경적 구원론을 교육하고 전파하는 일에 점심으로 힘쓰는 목회자이다. 또한 교회의 복음을 허무는 여러 이단들에 대해 앞장서 대처하는 목회자이다.
총신대학교 대학원, 총신 목회 대학원,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총신대 강사,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 인천상담소장,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협회(세이연)위원, 유사종교피해방지대책 범국민연대 상임위원이다. 저서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 <두 가지 신앙>, <목회자를 향한 양의 신앙고백>, <시편 23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