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교수의 희년의 법과 헨리 조지의 토지법(1)

I. 서론

성경에서 하늘과 땅은 당연히 창조되었다(창 1: 1; 2:4; 시 124:8). 그 가운데 창조의 땅을 나타내는 구약 단어는 10여 가지가 있다.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단어는 주로 “에레츠”("erets", 창 1:1, 2, 10, 11, 12, 15, 17, 20, 22, 24, 25, 26, 28, 30; 2:11, 12, 13)와 “아다마”(“adama", 창 1:25; 2:5, 6, 9)다. 1절의 땅(”erets")은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 ”지구“를 가리키기도 하고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를 가리키기도 한다. 땅은 최초의 인류와 마찬가지로 선하게 창조되었다(창 1:31). 그런데 땅에 저주가 임한 것은 인간의 타락과 관련된다. 하지만 이 타락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섭리(보존과 통치)까지 속절없이 무너진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피조 된 땅은 늘 그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아래 놓여있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을 흙이라 했다(창 3:18). 그렇게 인간은 땅의 흙으로 돌아간다. 땅이 곧 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땅은 성서 신앙의 ‘유일한 중심 주제’는 아닐지라도 중심 주제들 중의 하나다. 땅 없이는 인류 역사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도 이 땅은 결코 주인 없는 공간이 아니라 항상 ‘야웨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a place with Yahweh)요 역사적 공간이었다. 그래서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ggermann)은 “땅이 성서의 용법과 현대적인 용례에서 끊임없이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 사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사실 땅만 흙이 아니요 우리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은 흙이요 흙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닌 규정이 쉽지 않을 만큼 다양한 사회적 함축을 포함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땅”의 복잡하고도 다양한 사회적 함축 속에서 본고는 성경의 희년과 (마르크스 그리고) 헨리 조지의 토지법을 중심으로 창조의 땅의 토지법이 무엇을 지향하는 지 살펴보려고 한다. 
 

II. 희년에 대해 

1. 희년에 대한 오해 

최근 부동산 문제와 관련하여 국내 정치권은 때 아닌 토지 공(公) 개념 공방이 불거졌다. 여당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라는 한 인물을 소개하며 그가 살아 있었다면 땅의 사용권은 인민에게 주되 소유권은 국가가 갖는 중국 방식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헨리 조지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그의 주장이 그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일까? 그가 기독교 신앙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으니 그의 주장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까? 그의 주장이 옳다면 토지만 공개념을 가지는 것은 반쪽만 옳은 것이고 오히려 토지와 자본 모두를 국가 소유로 하는 마르크스주의가 더 완전한 유토피아적 주장이고 성경적 주장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대중들은 가질 수 있다. 이 같은 논리에 동원되는 성경의 개념은 바로 희년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희년의 함축성이 마르크스나 헨리 조지가 생각한 그런 토지법을 함축하고 있는 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펴볼 당위성이 생긴다. 
 

2. 희년과 안식년 

희년(The Year of Jubilee, 히브리어 ‘요벨’'yobel': יובל )은 ‘수양의 뿔’ 또는 ‘나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레위기 25장에 따르면, 희년은 50년마다 돌아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희년은 출애굽 이후 안식년과 관련하여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유대의 법이었다. 애굽의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땅이 없고 자기 법이 없던 민족이다. 그런 민족이 조상 아브라함이 먼 옛날 살던 가나안으로 입성을 할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613 가지 율법 가운데서도 아주 특이한 법을 주셨다. 바로 안식년과 희년의 법이다. 이 두 법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법이 아니었다(레위기 25장 참조). 즉 안식년을 지키지 않는 민족에게 희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내리신 희년의 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 ‘수양의 뿔 나팔’을 불며 그 땅으로 하나님 앞에 안식하게 하는 법이었다(레25:1-2).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 이 법은 창조주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친히 내리신 법이란 점이다. 즉 믿음 없는 이방인들에게 이 법은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낯선 법이었다. 두 번째 희년은 “안식”과 연동된 법이란 점이다. “안식”에 무지한 이방인들에게는 이 사실도 아주 낯선 규례였다. 안식년 준수와 아무런 연관 없이 오직 해마다 토지의 연간 임대 가치인 지대(地代)만 (창조주가 아닌) 세속 정부가 환수하고 다른 조세는 모두 면제해도 된다는 지대조세제(land value taxation)가 헨리 조지 토지법의 근간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신앙의 법인 희년과 지대조세제 중심의 헨리 조지 토지법은 그 성격이 서로 전혀 다른 법이었다 할 수 있다. 
 

3. 희년의 상징성?-인간의 진정한 자유 선포와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렇다면 희년의 상징성은 어떠할까? 안식년은 힘써 6년을 일하되 7년째에는 땅을 완전히 쉬어야 되는 법이었다(레25:3-4). 이때 파종과 포도원을 가꾸는 일은 모두 금지되었다. 저절로 자란 곡식이나 가꾸지 않은 포도송이도 추수는 금지되었다(레25:5). 이들 안식년에 저절로 자란 농산물은 거두지 않을 뿐이지 방치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안식년에 자란 이들 농산물들은 이스라엘의 종들과 품군과 이방 나그네와 가축과 들짐승의 몫이었다(레25:6-7). 여기서 안식년 제도의 중요한 함축적 의미를 한 가지 찾을 수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방 나그네들과 가축과 들짐승까지 포함한 모든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이다. 혹시 구속사적 모형을 떠나 희년에 어떤 사회적 함축성이 있다면 희년은 바로 약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라는 연장선상에 있는 절기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거나 안식년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희년 준수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지킬 수도 없는 율례였다. 

사실 안식년 율례는 이스라엘조차 지키기 쉬운 법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우리 인간이 가진 보편적 죄성(罪性) 때문이다. 유대 랍비들이 안식년 때에도 우기 후에는 땅을 갈아엎는 일을 허용하고 대신에 안식년 직전 여름에 쟁기질하는 것을 금하는 방법으로 금지 계명을 어기고 타협한 것은 안식년 규례가 지키기 쉬운 법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희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이 안식년을 일곱 번 바르게 지킨 다음, 곧 49년이 지난 다음 50년째가 되는 해의 대 속죄일인 7월 10일 전국적으로 수양 나팔을 불며 이 날을 거룩한 해로 정하고 땅에 사는 모든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율례였다. 안식년과 대 속죄일을 지키고 양각 나팔을 불지 않는 희년이란 희년이 아니다. 헨리 조지의 토지법에는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도, 안식년도, 대 속죄일도, 참된 자유함도, 양각 나팔도 당연히 없다는 점에서 헨리 조지의 토지법에 희년의 상징성을 덧입히는 논리는 바른 신앙과 신학적 적용이라 보기는 어렵다 하겠다. 
 

4. 희년과 믿음 

희년은 안식년과 관련된 법이요, 반드시 수양 나팔을 불어야 하는 법이요, 50년마다 돌아오는 법이요, 대 속죄일과 관련된 법이라는 점 말고도 몇 가지 규례가 첨가되어 있었다. 

먼저 희년에는 안식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안식년처럼 파종과 경작과 추수가 금지된다. 경작 금지는 안식년 포함 희년까지 2년이 연속되므로 유대인들은 파종하여 거두는 3년차 수확 때까지 도합 3년을 경작 없이 지내야만 했다. 이 규례를 준수한다는 일이 과연 믿음 없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랍비들이 비유대인들이 만들어낸 과학적 자료들을 인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도 문자적으로 성경의 규례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6년째 되는 해에 추수할 때까지 묵은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복을 내려 대풍년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게 경작 없이 3년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경작 없이 하나님께서 3년을 먹여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보통의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히12:6).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 더 복된 이유다. 희년 속에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믿음의 요소가 담겨있다. 헨리 조지의 토지법에 믿음으로 3년 경작 금지나 3년 토지세 면제 제도 같은 것을 적용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헨리 조지의 토지법이 믿음으로 지키는 희년의 상징성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외에도 희년 속에는 613 가지 율례 가운데 (336) 무엇을 사거나 팔 때에 부당한 이익을 남겨서는 안 되며(레25:14). (337) 땅을 사고 팔 때 속이지 말며(레25:14) (338) 말을 함부로 하여 이웃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며(레25:17) (339)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하며(레25:23) (340)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하며(레25:24) (341) 성곽 안에 있는 집을 판 경우에는 일 년 안에는 언제든지 다시 살 수 있으나, 일 년이 지나면 그렇게 할 수 없고 희년이 되어도 집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레25:29, 30).

그 외에도 (342) 제사장 가문인 레위 사람의 땅과 집에 관한 규정(레25:32-34), (343) 가난한 사람에게서 이자를 취해서는 안 되는 규정(레25:36, 37), (344) 가난하여 종이 된 동족(同族)을 노예 부리듯 하지 말 것(레25:39), (345) 동족인 종은 팔 수 없고(레25:42), (346) 동족인 종을 심하게 부려서는 안 되며(레25:43), (347) 종이 가나안 사람인 경우에는 그를 영원히 부릴 수 있다(레25:46). 그리고 (348) 이교도들에게 동족이 종으로 팔려갔으면, 값을 치르고 그를 다시 되돌려 와야 한다(레25:53)는 10여 가지 율례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이렇게 모세가 시내 산에서 계시로 받은 율례인 희년의 법과 단순한 땅의 토지법이요 경제법 체계인 헨리 조지의 토지법과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것이다. 
 

5. 희년을 경제법이나 토지법이라 볼 수 있나? 

희년은 신앙 없는 세상 사람들이나 성경을 겉핥기식으로 아는 미숙한 신자들이 제멋대로 아전인수식으로 이해하는 그런 단순한 토지법이 전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 애굽의 노예로 체념하며 살다 모세를 얼떨결에 하나님의 선지자요 지도자로 인정하고 애굽에서 탈출한 집단이다. 희년은 땅이 없던 이들 이스라엘 민족이 앞으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창조주 하나님이 보내신 수장으로 모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치열한 전쟁 수행을 통해 이방 가나안 족속들을 점령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린 율례를 따라 안식년과 연계하여 지켜야 되었던 쉽지 않은 규례였다. 희년의 내용이나 은혜 시대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디에도 토지법만 바꾸면 모든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는 실마리는 없다. 희년이나 예수님이나 토지법 문제가 ‘메시지의 중심’은 당연히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희년을 포함한 모든 율법에는 참된 인간 영생과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죄만 깨닫게 만드는 도구일 뿐임을 분명히 한다(롬3:20). 여호와께서 엄하게 명한 율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희년을 제대로 지켰다는 역사적 기록이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희년을 토지법이나 경제의 법으로 치환하는 것은 결국 영생과 구원의 십자가의 도(道)보다 땅의 법에 천착하는 누(累)를 범할 수 있다.
 

6. 희년(율법) 아닌 성전 재건(주님의 오심)으로 완성된 율법(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스라엘의 솔로몬 성전은 주전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철저히 훼파되었다. 성경은 유대 백성들이 안식년을 비롯한 절기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불순종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간 근본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정치 지도자 스룹바벨과 종교 지도자 여호수아를 따라 극적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들 지도자들에게 과거 선조들이 지키지 못했던 “절기 준수”(희년 등)가 아닌 “성전 재건”을 명한다. 유대 전통적 가르침을 전하는 미쉬나(Mishna)도 공식 견해로 바벨론 포로 이후 희년은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학개 선지서에 기록된 이 계시의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 무너져버린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한 새 성전의 영광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는 것은 보이는 새 성전(보이는 땅의 법)이었을까? 학개서 마지막 장(2장) 마지막 구절(2절)에 그 실마리가 있다. 스룹바벨이 받은 참된 복은 보이는 성전이 주는 복이 아니었다. 온 우주의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가 누리는 복이었다. 조금 나은 토지법이 조금 나은 땅의 복을 누릴 수는 있다. 하지만 솔로몬이 잠시 누린 세상 영광은 들의 백합화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보이는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니다(롬8:24). 세상의 토지법이란 그저 잠시 잠간 보이는 소망일뿐이다. 그리고 그 희년의 법조차 실현된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토지법으로서의 희년이 아닌 참된 희년으로서의 온 세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진리를 담은 책이다. 그것이 바로 희년이 주는 참된 자유요 사랑인 것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희년의 법은 세상의 땅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희년이라는 말을 남발하여 그리스도교를 왜곡하면 절대 안 된다. 희년 전의 제 49년 7월의 속죄일과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영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무슨 세속적 토지법을 지향하는 법이 전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희년(레27:21)은 이 세상의 끝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주 안에 있는 자들이 부활과 변화를 받아 참되고 영원한 본향인 천국에 들어가고 회복될 것을 상징하는 모형으로 결코 그림자에 불과한 땅의 규례에 적용할 율법으로 주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땅과 토지는 어떤 사람이나 정부 권력의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다. 세속의 토지법인 헨리 조지의 토지 세법과는 더더구나 다른 것이다. (다음에 계속이어진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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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