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 2장 : 그린햄 부분에 대한 예배적인 글

안상혁 교수(합신, 교회사)의 저서 <언약신학>을 독서하고 연구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이 만든 '행위계약'(the covenant of work, 행위라는 말은 계약이라는 말과 더 잘 어울리므로 행위언약이 아닌 행위계약으로 표기한다) 사상이 성경과 기독교를 훼손하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웨민고백 7, 19장의 행위계약과 대요리문답 20장의 생명언약, 둘 중의 하나는 거짓 사상이다. 생명언약은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 안에서 창조되었고, 아담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기만 하면 그에게 다함이 없는 은혜와 영생이 지속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세워 그 사실을 언약하셨다는 내용이다. 반대로 행위계약은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과 무관하게 창조되어 스스로 적합한 행위(율법 준수)를 통해 영생을 획득했어야 했으나, 아담이 실패하여 회개도 용납되지 않는 영원무궁한 저주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하나가 성경과 하나님에 관한 진리이면 또 하나는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거짓 신학이다. 둘다 성경적 진리일 수는 없다. 

무엇을 수용하느냐에 따라 성경과 신앙 이해가 달라진다. 웨민고백의 행위계약을 진리로 받으면, 필연적으로 1)원죄론, 2)구원론, 3)복음전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게 된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처음부터 행위계약 신학을 정설로 배웠다. 안 교수도 행위계약 신학을 정설로 배웠고, 행위계약을 더 널리 칭송하려고 <언약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지금이라도 안 교수가 행위계약이 성경과 웨민총회 대요리문답의 생명언약 사상과도 다른 거짓 신학임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또한 한국에 사는 안 교수와 우리 모두의 건강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바란다.  오늘은 안 교수의 책 2장에서 발견되는 안 교수의 심각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적인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행위계약은 청교도들의 언약신학이다. 청교도들의 언약 신학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요소가 섞여있다.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고 강조하고 언제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칼빈주의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준비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분은 알미니안주의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에 반응하여 사람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부분은 펠라기우스-천주교, 그리고 알미니안 신학의 가르침과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청교도 신학에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한다. 신천지 이만희 교주에게 20만 명 이상 속아버린 것처럼, 전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청교도 신학에 속았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청교도 신학이 가르치는 타락전 아담과 하나님의 행위계약,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언약을 진리로 받으면 다음의 두 가지도 당연히 받도록 요구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이고 또 하나는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주장은 아담이 영생을 위해 하나님께 보였어야 할 ‘행위’에 대해 실패하여 회개마져도 용납되지 않는 영원한 저주를 받았는데, 그리스도께서 아담을 대신하여 행위에 성공하여 자신과 우리의 영생에 필요한 의를 취득하였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그 의가 전가되어 칭의를 얻었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허무는 것, 즉 예수로 예수를 쳐서 허무는 거짓 사상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친히 의가 되시고자 죄와 무관한 출생으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허물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무슨 방법으로도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친히 죄없는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의 의가 되시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 우리의 구원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니다. 원래 율법은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필요한 의를 얻은 백성들에게 신앙과 삶의 실천 강령으로 주어졌다. 제 아무리 율법을 잘지켜도 구원에 필요한 의가 나오지는 않는다.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 저주받았고,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을 지켜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었다는 주장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거짓  신학이다.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된 아담은 하나님 섬김을 거부하였으므로 회개도 용납되지 않는 영원한 저주에 처해진 것이다. 아담이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무슨 율법들을 지키지 않아 회개가 허용되지 않는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는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사상은 사람의 사변이다. 하나님 백성으로 은혜와 영생 안에서 창조되었던 아담이 하나님 섬김(믿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으므로 하나님이 영구히 저주하셨고, 하나님이 대신 죄 값을 치르시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어담을 다시 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빗나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능동순종 주장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거짓 신학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친히 우리의 의가 되시었다.

능동순종 주장은 우리의 청교도 조상들의 그릇된 사변이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과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신앙이 아니다. 이미 안 교수의 책 <언약신학> 1장 독서를 통해 안 교수가 능동순종 교리에 대한 분별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확인했다.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

청교도들은 아담의 행위계약 거짓 신학에 기초하는 목회의 실천신학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회심준비론이다. 아담의 행위계약의 상태에서 태어나 운명적인 저주에 처한 인간이(청교도 목회자들의 교인들) 그리스도의 은혜언약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청교도 목회의 실천신학이다. 이것도 여전히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하였다고 한다. 사람이 무슨 공로를 쌓아도 그것이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는 못한다고 강조한다. 표면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 이신칭의, 즉 칼빈주의 예정신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알미니안주의가 회심준비론에 들어와 있을 것이라고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알미니안주의가 보인다. 

청교도 회심준비론은 구원을 위해 율법의 저주를 가장 먼저 교인들에게 적용하고 실천한다. 죄인에게 율법의 저주를 선포하고, 죄인들을 향하여 펄펄 끓어오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증거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죄인들이 심각하게 낙심하고 절망하여 되려 스스로 죽어나기 시작한다. 그때 하나님이 구원이 아닌 단순 ‘영적각성’을 죄인의 영혼에 일으키신다. 영적각성을 받은 죄인은 스스로 자기의 비참한 영혼의 운명을 깨닫고 더 절망하고 신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천로역정의 주인공처럼 자기 영혼의 구원의 길을 찾고자 스스로 몸부림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시도한다. 

청교도 회심준비론이 심각한 이단사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를 체험하지도 못한, 즉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죄인의 영혼이 여전히 죽은 상태에서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해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특히 율법준수에 힘쓰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자기에게 부어주기게 되기를 소원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영혼이 죽어 있는 죄인이 하나님을 믿으려고 스스로 노력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은 바로 죄인들을 그런 상태로 이끄는 어마어마한 거짓 부흥이었다. 죄인들이 영적각성을 받아 구원을 사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힘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계속 회개하고, 계속 예배드리고,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적용하여 자신이 회심되기를 미친듯이 고대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만 속하기 때문이다.

굉장한 칼빈주의와 엄청난 알미니안주의가 청교들의 목회에서 성공적으로 배합되었다. 영적각성을 받은 죄인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에게 구원, 즉 성령의 회심 체험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고대하면서 기다렸다. 하나님이 불현듯 일으켜 주시는 성령의 회심체험에 이르게 되면, 천국을 얻은 듯이 기뻐했고, "이제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다!"며 감격하였다. 그것은 행위계약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체결된 은혜언약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누리는 복락이다.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대각성 운동은 바로 이것을 추구하는 위대하고 놀라운 거짓 부흥이었다. 에드워즈가 자신의 부흥의 이야기를 기록한 <놀라운 회심 이야기>를 보면 거의 전부 이런 내용들이다.

무엇이 이런 사변적이고 비성경적인 신앙 이해를 잉태했을까?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영생을 두고 맺어졌다는 행위계약 사상이다. 행위계약 사상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올라타서 은혜언약으로 넘어가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은혜언약으로 넘어가는 방법은 오직 아담 대신 행위에서 대신 성공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가 이루신 행위에 근거하여 영생을 얻는 은혜언약의 수혜자가 된다.

청교도들이 이렇게만 가르쳤어도 기독교가 크게 훼손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행위계약 하의 사람들을 그냥 곱게 은혜언약으로 넘어가게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 사람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을 사람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사람이 그 조건들에 부합해야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언약 신학을 수립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정하셨고, 때가 이르면 그를 그리스도 앞으로 부르시고, 그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도록 먼저 은혜를 주시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고백하게 하심으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사람에게 무슨 자격이나 조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조건을 갖추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혜택을 누린다는 언약 신학은 기독교의 핵심을 파괴하는 이단 사상이다.  

칼빈은 그런 구원론을 가르친 적이 없는데, 청교도들은 교묘하게 칼빈을 왜곡했다. 청교도들의 행위계약 신학은 근본적으로 칼빈의 신학에서 벗어난 거짓 사상이다. 그러나 사탄의 묘한 영감을 받았던 그들은 칼빈의 예정 신학과 청교도들의 언약 신학이 같은 구원의 진리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한다고 이만희 같이 모략하였다. 청교도들 속에 사탄의 영감을 받은 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고, 그들의 화려한 언변들로 인해 칼빈의 예정 신학과 청교도들의 사람과 하나님의 역할이 동시에 강조되는 쌍무적 언약 신학이 같은 구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라는 모략이 상당히 통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자유주의 신학교와 감리교 신학교에서 배운 후 칼빈신학교의 교회사 교수가 되어 마차 플러신학교의 피터 와그너처럼 성공한 리차드 멀러이다.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에서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즉 사람의 노력, 자질, 조건이 1도 개입되지 않는 구원이다. 칼빈의 예정신학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택하심과 불가항력적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적각성을 받아 스스로 교회 다니고,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구원의 길을 찾아간다는 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이 칼빈주의 교회에 설 자리는 1도 없어야 정상이다. 

칼빈의 예정신학과 청교도 언약신학(행위계약-은혜언약)은 정반대의 신학이다. 그러나 리차드 멀러는 칼빈도 구원을 위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쌍무적인 조건과 역할이 요구되는 언약 신학을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도모지 납득되지 않는 거짓 주장을 다음과 같이 남발하였다.

“칼빈과 볼링거는 모두 하나님의 전적이고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을 구원의 근원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인간의 채임은 언급함에 있어서는 쌍방적 언어도 모두 사용하고 있다. 개혁주의 언약론은 하나님이 베푸신 전적인 은혜를 선포하고 인간의 책임과 순종이 은혜 아래 있으며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함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예정론과 결코 대립하지 않으며 어떠한 긴장 관계도 보이지 않는다.”(리차드 멀러의 <칼빈 이후 개혁신학>/ 40-41)

칼빈도 사람과 하나님의 쌍무적 조건에 근거한 영생 계약의 신학을 가졌다면, 청교도 신학의 대표적인 알미니안주의인 회심준비론도 칼빈주의 신학이라고 주장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칼빈의 예정 신학의 핵심에 있는 불가항력적 은혜 개념이 구원을 위해 작용하는 사람의 노력과 역할을 조장한다고도 주장될 수 있다. 리차드 멀러는 정교한 거짓 신학작업을 통해 그렇게 주장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칼빈과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의 차이점은 미미하며, 개혁주의 사상에 대한 16세기와 17세기의 신학적 표현들 사이의 연속성은 더욱 뚜렷하다.”(리차드 멀러의 <칼빈 이후 개혁신학>/ 48)

지금 한국의 신학교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상혁 교수(합신)를 비롯한 리차드 멀러의 제자들이 스승에게서 배운 대로 가르치고 책을 쓰면서 종교개혁 신학과 신앙을 왜곡하고 있다. 겉으로는 구원에 관하여 칼빈의 예정신학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사람의 노력과 조건에 근거하는 구원을 주장한다. 그들은 칼빈의 예정 신학에서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개혁주의 언약 신학에서는 사람과 하나님의 쌍무적인 조건과 역할로 설명된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개혁주의 언약 신학이란 칼빈의 신학이 아니고 청교도들의 언약 신학이다.

특히 멀러 교수의 제자들은 칼빈의 예정 신학에서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속한 것으로, 그러나 개혁주의 언약 신학에서는 구원이 인간과 하나님의 쌍무적인 계약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한다. 현재 고신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리차드 멀러의 제자인 우병훈 교수의 언약 신학에 대한 가르침에서 그런 사상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성경을 보면, 어떤 곳에서는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들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런데 또 성경에서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저는 이것을 예정과 언약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일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약속으로서, 그 약속에 신실하게 반응할 때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우병훈, 그리스도의 구원, 12-13)

우병훈 교수는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신실하게 반응할 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게 개혁주의 언약 신학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대체 영혼이 죽은 사람에게 구원을 얻기 위한 무슨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을까? 구원 받기 전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사람이 무슨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펠라기우스-천주교-알미니안 신학이 하는 말이다. 개혁신학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이런 소리를 예사롭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멀러의 제자들이다.

“예정론은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결정하시며, 인간의 노력은 구원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언약론은 구원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근거하며, 인간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고 언약적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우병훈, 그리스도의 구원, 13)

칼빈의 예정 신학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불가항력적 은혜로 설명되어 진다. 그런데 언약 신학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하여 성실하게 순종하여야 언약의 축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구원은 사람이 하기 나름이라는 의미이다.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는 전혀 맞지 않는 사상이다. 칼빈의 예정 신학과 청교도 언약 신학을 억지로 통혼시킨 멀러의 토사물이 그의 제자들을 통해 한국의 장로교회들 속에 흐르고 있다.

왜 청교도들이 회심준비론을 중시했는지 파악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행위계약 하에 있는 사람을 은혜언약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청교도 목회의 실천신학이 회심준비론이다. 청교도들은 회심준비론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조건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사람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원은 결코 사람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주권에만 속한다고 이만희 같이 모략하였다. 칼빈의 예정론이 개혁주의 언약 신학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종교개혁 신학에서 벗어나서 청교도 언약 신학이라는 거짓 사상을 만들었을 뿐이다.   

비성경적인 행위계약 사상을 성경적 진리로 받으면 반드시 1)그리스도의 능동순종, 2)청교도 회심준비론 목회 기술을 함께 수용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을 진리로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과 신비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청교도 회심준비론 목회 기술을 좋게 여기는 사람을 개혁교회의 목사로 보아서는 안되고,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의 정상적인 교수로 보아서도 아니된다. 그런 사람들의 교회와 신학교는 장로교 간판을 내리고 회중교 간판으로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

안 교수의 <언약신학>1장 독서 소감의 글에서는 행위계약을 지지하는 안상혁 교수가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에 대한 비판적 개념을 전혀 가지지 못했음을 보았다. 이제 2장 독서 소감을 통하여, 안 교수가 청교도 회심준비론에 대한 어떤 비판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불행히도 안 교수는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에 대한 비판적 개념을 일체 보이지 않았다. 장로교단 신학교의 교수로서 심각한 일이다.  오늘은 이 정도의 설명으로 마치고, 다음에 행위계약 사상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회심준비론 목회 기술에 대해 안 교수의 실제적 개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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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