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진실시리즈(2)

요한복은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이적’이 나온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쯤’되는 사람들이 먹고 열두 바구니를 남겼다. 그것을 경험한 오천 쯤 되는 사람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6:14b)고 열광한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 하므로’ 예수님은 산으로 떠나셨다가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아마도 사람들은 밤새 예수님을 찾은 것 같다. 결국 다음 날 가버나움으로 배를 타고 가서 예수님을 만난다. 이들은 밤새 예수님을 찾아다니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흥분에 찬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가 오셨고 이제 이방인들의 압제는 끝이 나고 다윗 왕국이 회복되어 열방을 통치하며 ‘잘 먹고 잘 살’ 세상이 열릴 것이었다. 이들은 생명을 내놓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고 재산을 내놓으라면 다 내놓을 수 있었고 사람이 필요하다면 온 가족이 모두 예수님의 손발이 되어 드릴 헌신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때의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사랑은 어떤 말로도 표현해내기 힘들 것이다.

이런 흥분과 기쁨을 안고 이들은 가버나움에서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의 흥분과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니,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사라졌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6,27)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떡’(6:41)이라고 말씀하신다. 한참동안의 문답이 이어진 후 결론이 내려졌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6:60).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6).

이 기록의 정황상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보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떠나갔다. 열 두 제자만 남은 것으로 되어 있다(6:67-70참조).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보았던 ‘오천 쯤’ 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수 천 명은 되었던 것 같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보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던 사람들이 막상 진정한 복음을 듣자 썰물처럼 물러갔다. 더구나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필자는 이들을 ‘밤새 교인’이라 명명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을 상징한다. ‘밤새 교인’은 예수님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은 사람들이다.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대단히 뜨겁다. 대단히 열심이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데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런데 이들이 ‘하늘 복음’을 듣는 순간 그 뜨거운 사랑과 열심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오히려 그 때부터 예수님의 대적이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상황이 되었을 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사람들이다.

만일 이 때 예수님이 ‘하늘의 떡’과 함께 ‘육신의 떡’도 약속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 ‘밤새 교인’들은 예수님을 평생토록 따라다녔을 것이다. 물론 ‘육신의 떡’을 위해서. ‘하늘의 떡’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상관없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냉정하셨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키신 분이다. 육신의 떡을 왜 못 주시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떡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그 분은 ‘하늘의 떡’을 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육신의 떡’에 대한 약속을 전혀 하지 않으신다. 인간적으로는 아쉬울 수도 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분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육신의 떡 좀 주시면 안되는가? 그런데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다 내쫓으신다.

이 일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여러 번 내쫓으셨다. 누가복음 14장 25절은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라고 말씀한다. 허다한 무리가 몇 명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수의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따라다닌 중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33)

제자의 자격에 관한 말씀은 마태복음(10장, 16장)과 마가복음(8장)에도 나온다. 누가복음의 기록이 이해하기 쉽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기 위해 치를 대가를 계산해보도록 망대와 전쟁 비유를 드신다. 그런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소위 ‘부자 청년’의 예에서도 이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19장), 마가복음(10장), 누가복음(18장)에 공히 기록되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청년은 어렸을 적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하신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이 청년은 그 요구를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성경은 그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것까지 기록한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 청년을 설득하거나 타협안을 내놓지 않으셨다. ‘못하겠으면 그냥 가라’이다.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나왔고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로 ‘소유를 다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말은 영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특히 부자 청년과 같이 영생에 관심이 있고 열심을 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아야 한다. 청년에게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 그래도 괜찮아. 일단 나를 따라 와. 나에게 배우다 보면 서서히 그 재물도 포기하게 될거야. 우선 10%만 가난한 자에게 주고 시작하면 어떨까?” 이러셨으면 청년의 반응이 어땠을까? 아마도 기꺼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밤새 교인’들에게 육신의 떡에 관한 어떠한 타협도 아니 하신 것처럼 이 청년에게도 전혀 타협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영생에 관한 문제이다.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밤새 예수님을 찾으며 ‘죽도록’ 사랑했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다. 평생을 율법을 지켰다고 영생을 얻는 것도 아니다. 밤새 교인들은 다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했다. 전설에 의하면 청년은 나중에 회개하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믿음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이다. 가능성은 반반일 수 있다. 나중에 ‘회개’하고 하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본 후 진정한 하늘복음을 듣기 전의 ‘밤새’가 평생 이어진다면 어찌될 것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위치한 곳은 ‘밤새’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보았거나 그것을 ‘정안수’ 떠놓고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직 하늘 복음을 접해본 적이 없다. 전해지지 않는데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필자가 [새로운 유대교, 새로운 장로들의 유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 잘 믿으면”이라는 성경에도 없는 종교적 기준 위에 서 있다. 그곳에 구원은 없다. 예수님을 너무 너무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말라. 진짜 예수님을 만나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는 말과 함께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끔찍한 진실이다.

 

그루터기 장로교회(아리조나) / 한모세 목사(thdh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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