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터툴리안(주후 150년경-215?220?)의 저서들은 둘로 나뉩니다. 초기의 정통 서술과 후기 몬타니즘적 경향의 저술들입니다.

몬타니즘은 2세기 후반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프리기아(Phrygia)에서 열광주의와 계시문학적 종말론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황홀경을 체험한 신비주의 밀교 사제 출신의 몬타누스로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3세기 초 터툴리안이 사는 북아프리카에도 상륙하였으며 터툴리안은 이 운동에 즉시 가담하였습니다.
 

2. 카르타고에서 로마군의 백부장의 아들로 태어나 라틴신학(북아프리카학파)의 아버지로 불리운 터툴리안은 철학에도 비판적이었던 대단히 신앙적으로 열정적인 사람이었지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What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라는 터툴리안의 유명한 말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터툴리안이 헬라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대편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즉 철학에 대항하여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했습니다.

내재(內在)의 철학에 반감을 가진 터툴리안의 이 같은 열정적 초월 신앙은 그가 황홀경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로 이적과 예언 은사를 강조하고 오늘날의 오순절적 운동과 유사점이 많은 몬타누스파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아프리카로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접근한 반면, 터툴리안은 법률이나 정치 등의 실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역사성을 실천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이런 성품이 잘못 발휘되면 도덕률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양극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점에 수렴되기도 합니다. 즉 율법주의가 초월주의자들과 만나면 극단은 서로 통하기도 하는 법이지요.
 

3. 따라서 당시 몬타니즘주의자들의 금욕(결혼 포기, 재혼 금지, 동정성 강조 등)과 금식 그리고 순교에 대한 열망, 깊은 참회 등의 엄격함에 매력을 느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입니다.

그렇게 독신 생활을 찬양한 몬타니즘의 경향을 따라 터툴리안도 독신을 지킵니다. 터툴리안은 일종의 열광적 근본주의자였던 셈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이 분열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고 초월주의자들과 통하는 면도 많습니다.
 

4. 엄격함에 매력을 느끼는 근본주의자였기에 터툴리안에게 있어 처벌은 용서보다 우선하는 것이었지요.
 

5. 오늘날 우리 기독교도 화평과 희락과 자비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강하지요. 터툴리안은 "간음과 우상숭배 죄를 지은 사람들의 회개를 수용하고 사면령"을 내린 카르타고 감독의 결정에 대단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터툴리안이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6. 터툴리안은 도덕적 강경론자, 엄격주의자, 도덕적 근본주의자로서 정통 교회의 처신에 분노하여 열광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몬타니즘으로 돌아섰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터툴리안에 대해 그는 신학적으로 거의 유대인이라고 비난하였지요. 이것이 해답의 실마리가 아닐 까 생각합니다.
 

7. 삼위일체(Trinitatis), 본체(substantia, 실체로도 번역), 위격(persona), 그리스도의 양성(Christi duo naturae), 만족(satisfactio) 등은 그가 처음 사용한 중요한 신학 용어 였지요.


그렇다고 그가 지속적인 바른 신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터툴리안은 <로고스>(말씀)이 본래 하나님의 비인격적인 이성이었으나 창조 시에 인격이 되었다는 주장을 폅니다. 이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 관여한다는 일종의 종속적 견해입니다.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해서도 혼합이 아니라 결합(conjunction)이라는 낯선 용어를 씁니다.

이 같은 신학자가 몬타니즘으로 돌아선 것은 신학 정립의 여명기에 발생한 인류가 가진 안타까운 한계였다고 봅니다.

8. 오늘날도 여전히 바른 신학을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터툴리안의 경우는 초대 교부시대에 당연히 일어난 아쉬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른 신앙과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왜 완벽한 교리를 성경에 직설적으로 기록하거나 초대교회 완벽한 인물을 보내 일치 교리를 만들게 하지 않아 미로 찾듯 난제를 풀어가야 하게 된 것인지 인류는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보아야 겠지요.

 

(삼위일체론만큼 기독론도 어려운 부분이지요. 인간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니니 인간이 이 부분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키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기독론 논쟁이 그런 경우입니다. 둘은 모두 황제의 노여움을 사 감금되었으나, 결국 레오 황제의 주선으로 칼케돈 신조의 골자를 이루는 <통합신조>에서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양성은 연합을 이루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아들, 한 주를 고백한다(생략)”로 정리되었지요.

이것이 칼케돈 신조에서 “혼합하지도 변하지도 않고 구분되지도 않고 구별되지도 않는 두 본성을 지닌 분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두 본성의 구분은 결합의 이유로(연합으로 인해) 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독특한 특성은 보존되고,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존재 안으로 동시에 발휘된다(생략)”로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이 유티케스 정죄와 훗날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성례론 논쟁으로까지 연결되니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닌 인간이 부족한 바벨탑 이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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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