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 2장 : 윌리엄 퍼킨스 부분에 대한 네 번째 소감

안상혁 교수(합신, 교회사)의 저서 <언약신학>을 독서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신앙이 기독교에 해를 미치고 있고, 특히 그들의 개혁운동의 신학적 동력원 '행위계약' 사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저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안 교수의 책 2장의 윌리엄 퍼킨스에 관한 부분에 대한 네 번째 소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퍼킨스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를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로, 택자를 언약 안에 있는 자들로 이해한다.”(안 교수의 말/ 113 페이지)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따라서 이들은 언약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되었다. 한편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거절하기로 작정하셨다. 이들은 언약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생으로부터 단절되었다.(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스의 말/ 113 페이지)

청교도 신학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가르쳤다. 구원 받기로 택하심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초대된다는 퍼킨스의 말을 아주 그럴싸하다. 퍼킨스의 말은 한 서기관의 구원에 대한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 같이 어려운(모호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 13:34)

감히 예수님 앞에서 모세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질했던 한 서기관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You are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서기관이 구원을 받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라는 뜻인가? 그 서기관이 구원으로 가는 길 근처에 있기는 해도 아직까지는 구원과 무관한 상태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구원이 사람의 율법에 대한 지식들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마침’(롬 10:4)을 통하여 얻는다. 그런데 구원의 마침은 사람이 모든 율법 조항들을 완전하게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가 없고 완전히 의로운 속죄의 피가 하나님께 드려져야만 율법의 마침이 이루어 진다. 죄와 무관한 출생으로 오신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율법의 마침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서기관은 율법에 대한 지식이 많기는 했으나 율법이 지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무관했으므로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단지 구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서기관이 구원과 멀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 

“퍼킨스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를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로, 택자를 언약 안에 있는 자들로 이해한다.”(윌리엄 퍼킨스)

퍼킨스의 이 말도 그 서기관의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원한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고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주신 언약이었다. 그러나 퍼킨스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초대된 사람은 선택을 받은 사람일 뿐이지 아직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퍼킨스와 청교도들은 선택된 사람에게 언약이 주어지고, 그 사람에게 요구되는 언약의 조건(구원을 위한 사람의 조건, 역할)을 잘 수행하여 언약이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사람의 반응과 행위에 의존하게 된다.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예정이 아니고 그 사람이 예수 믿고 바르게 행할 것임을 아시고 예정하신다는 예지예정론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런데 퍼킨스와 청교도주의자들은 이 사상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비판하기는커녕 칼빈의 예정론과 조화를 이루는 언약의 일방성과 쌍방성의 통합이라고 설명한다.

“퍼킨스는 언약의 일방성과 양방성 모두를 통합시키려고 노력한다”(안상혁 교수)

“퍼킨스의 저작인 <황금사슬>(A Golden Chaine)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은혜 언약과 하나님의 선택 교리 사이의 조화이다.”(리차드 멀러)

같은 내용이 2장의 후반부에서 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회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퍼킨스에 따르면 (믿음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러한 회개에 앞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한다. ‘그 어느 누구도 회개를 자신의 힘에 의지하거나 자기의 힘으로 이행할 수 없다.’(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스의 말/ 122 페이지)

퍼킨스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라는 조건을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지금 모든 청교도 목회 교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구원받으려는 신자들이 스스로 더 경건하게 살고, 더 회개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청교도 목회 교회의 신자들이 특히 더 경건하게 살고, 회개하려고 노력하고, 율법준수에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이만희의 신천지 신자들이 14만 4천명에 들어가려고 더 힘써 전도하고 헌금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원에 사람의 회개가 조금이라도 작용한다는 가르침은 펠라기우스 신학, 천주교의 신학, 알미니우스 신학이다. 결코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신앙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람의 개념으로 순서를 말 할 수는 없으나, 사람의 회개가 있기 전에 먼저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구원의 이야기를 보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언하셨다는 것은 곧 그 병자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그 중풍병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으로 초대받은 후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오기 전에 충분하게 회개하였었는가? 성경에는 그런 사실을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성경은 오직 그 병자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찾아왔고, (성경 본문이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어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에게 찾아왔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병고침과 죄사함을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면 중풍병자는 회개와 무관한 사람이었을까? 성경 본문에 중풍병자의 회개에 대한 명확한 진술은 없으나, 그가 구원을 받음과 더불어 (영혼이 살아남과 함께) 구원의 열매로서 회개와 성화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사람의 시간 개념으로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먼저 복음(그리스도)과 성령의 역사로 영혼이 살아났고 동시에 믿음과 회개와 성화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의 구원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상태로 예수님을 만났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오직 예수를 믿음만으로 구원 받았다. 그 전에 미리 회개하여 구원 언약의 완성을 준비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믿으면 그 즉시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이 주어진다. 사람이 자기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먼저 회개하여 구원 언약의 조건을 준비해야 한다는 모든 이론들은 비성경적이다.

칼빈도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칼빈은 회개가 구원이 임하기 전에 사람 편에서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칼빈은 회개가 중생과 더불어서 시작되는 성령의 역사이므로 회개를 중생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를 한 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3.9)

칼빈에게 중생 이전의 사람의 회개에 대한 주장은 전혀 없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전에 먼저 사람이 회개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미친 짓’이라고 책망했다.

“호세아의 권고는 이 점을 알려준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용서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비극의 수단으로 덧 붙여서, 사람들이 죄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 잡아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회개로부터 시작하려는 자들의 미친 짓에는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들은 새로 개심한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참회하라고 명령하고 이 기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한다.”(기독교강요, 3.3.2)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도 성령의 역사를 따라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중생이 일어나고, 중생과 함께 회개가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결코 회개가 중생을 위해 사전에 사람에게 요구되는 조건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복음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셔서 거듭나게 하신다. 거듭남과 동시적으로 성령의 권면을 따라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을 하게 된다. 믿음고백과 함께 회개한다. 믿음고백과 회개는 언제든지 같이 가기 때문이다.”(구원론, 66)

성경과 개혁신학은 택하신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고, 회개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진다고 가르친다. 이 일들의 순서를 사람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으나, 결코 중생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즉 언약이 완성되기 위한 조건을 사람이 회개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퍼킨스와 청교도들이 언약의 완성을 위해 사람이 수행해야 할 회개를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사람이 회개할 수 있다고 가르치니, 여러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있다. 퍼킨스의 말을 다시 읽어보자.

“회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퍼킨스에 따르면 (믿음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러한 회개에 앞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한다. ‘그 어느 누구도 회개를 자신의 힘에 의지하거나 자기의 힘으로 이행할 수 없다.’(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스의 말/ 122 페이지)

퍼킨스는 분명히 회개를 구원을 위해 사람이 이행해야 할 조건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회개는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행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으로 초대된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회개해야 한다고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과 종교개혁 신학에 역행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퍼킨스가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하여 사람이 회개하도록 준비된 후 사람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 회개한다고 주장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는 혼동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청교도 언약 신학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의 이론이다. 사람이 회개를 하여 구원을 얻지만, 하나님이 미리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었으므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는 주장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혼동에 빠졌고 결국 이 가르침의 속아버렸다.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먼저 주신다고 함으로 여전히 구원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아래 있는 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구원론을 파괴하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에게만 구원에 대한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표방하고, 뒤에서 펠라기우스 신학, 천주교 신학, 알미니안 신학으로 후려치는 청교도 신학의 함정이다.

하나님 편의 은혜와 사람 편의 경건, 선행, 회개가 상응하여 구원을 완성한다고 가르치는 모든 비성경적인 신학들의 공통점이 있다. 사람이 회개가  자기의 구원을 이룩한다고 하지만, 그 앞에 깔아두는 교묘한 포석이 있다. ‘선행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 자기의 구원을 도모하도록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 신학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천주교 신학에서는 그것을 ‘초기 도움의 은총’이라고 하고, 펠라기우스 신학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알미니안 신학에서는 그것을 ‘선행 은혜’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과 똑 같은 개념을 청교도 신학의 아버지 퍼킨스와 그 후배들이 주장한다. 안 교수의 구원론도 결국 그 같은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회개에 앞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한다. ‘그 어느 누구도 회개를 자신의 힘에 의지하거나 자기의 힘으로 이행할 수 없다.’(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스의 말)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가지고 따지자면, 언제나 회개가 다른 모든 은혜에 앞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안 교수의 말/ 123)

우리는 지금이라도 이 엄청난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청교도 개혁주의의 구원론과 펠라기우스 신학, 천주교 신학, 알미니안 신학의 구원론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협력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거짓 신학의 유전자를 청교도 신학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준비된다고 할 뿐이다. 청교도들이 전파한 신학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신자들이 구원을 위해 더 경건하고, 더 율법을 지키고, 더 회개에 힘쓰는 증상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맺는 말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의 역사로 그 사람에게 믿음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이 중생하고 동시에 회개와 성화가 일평생 동안 이어진다고 가르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택하심을 받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택하신 자에게 전도자를 보내어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고백이 나타나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중생된 신자에게서 회개와 성화가 일평생 동안 이루어지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는 거짓된 이론으로 예수 믿게 만든 퍼킨스와 청교도들, 지금 그대로 따라하는 청뽕(청교도 히로뽕)맞은 사람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일까? 진리를 전파하는 성령의 성품이 왜 그들 안에서는 달라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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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