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용어는 ‘성경공부’ ‘제자훈련’이라는 말들이다. ‘요리문답’(Catechism)이라는 말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용어이다. 어떤 사람에게 요리문답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혹시 옛날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의 식당에서 발달했던 음식들을 만드는 비법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이 정도로 현대의 교인들에게 종교개혁 시대의 요리문답은 생소하다.

서철원 박사님의 신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을 소개하는 글의 서두를 이처럼 조금 황당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여전히 요리문답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요리문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목회자들의 모르니, 일반 신자들이 요리문답에 대해 알 턱이 없다.

요리문답이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 ‘카테케오’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고, 그 뜻은 ‘가르치다’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지 가르친다는 의미 외에 가르치는 방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앉아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 방식을 함의하고 있는 단어이다. 누가복음 1:4절(‘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에서 이 단어가 발견되고, 사도행전 18:24-25절, 갈라디아서 6:6절에서도 이 단어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요리문답이 작성되었던 종교개혁 시대에는 지금처럼 책과 칠판 등의 교육 도구가 흔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교육 수준도 낮았고, 지금의 PPT와 같은 전문적인 지식 정보의 전달 및 교육의 도구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마주 않아 나누는 대화가 가장 주된 교육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 신학을 전파하기 위해 성경의 중요한 내용들을 주제별로 선별하여 질문하고 답하는 대화 형식의 신앙 교육 교제를 작성했다. 그것을 요리문답이라고 한다.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1542년), 독일의 칼빈주의 개혁자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가 작성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작성한 소요리문답(1648년)과 대요리 문답(1648년)이 종교개혁 사대에 탄생한 가장 대표적인 요리문답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의 아쉬운 점은 청교도주의가 최고로 만연하였을 때 탄생되었으므로 그릇된 청교도 신학이 가미되어 있다는 점이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 후반기부터(15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전된 청교도 개혁운동은 원죄, 아담의 첫 언약, 칭의 등에서 성경과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으로부터 위험스러운 이탈을 이루게 되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는 한 그대로 영원히 사는 완전하고 순전한 사람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대신 아담이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여 자격을 얻어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을 얻어 완전해 지기로 하나님과 계약했다는 가르침으로 기독교 신학의 시초를 놓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죄와 무관한 의로우신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흠 없는 피를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속죄의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칭의가 이루어졌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청교도 신학으로 무너졌다. 대신 그리스도가 사람을 대신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심으로 영생의 자격이 되는 의를 얻으셨다는 기형적인 신학을 주장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국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종교개혁 종파들의 연합을 의도하였으므로 이런 그릇된 신학을 주장하는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들도 참가하였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 그들의 의견도 존중되었다. 그리하여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탄생된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에 청교도 개혁운동의 그릇된 신학이 가미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은 청교도 개혁운동의 신학이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전에 탄생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이 나오기 80년 전에 탄생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신학의 변질의 위험성이 적은 요리문답이라고 할 수 있다.

서철원 박사님의 신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은 칼빈보다 더 칼빈 같은 분이라고 평가받는 저자의 개혁신학이 가미되어 우르시누스의 원 저작이 더욱 풍성하게 해설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정독한 독자로서 서평 및 독서를 권고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말들과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고서 어쩌면 “조금 평이한 내용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센세이션한 내용을 전달하는 신학 서적들이 주목받고 인기를 누리는 분위기 속에서 지난 수 십 년을 보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신앙은 점점 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과 멀어지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렘 6:16)

참된 신앙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 이미 하나님이 주신 말씀, 지금도 살아계신 성령이 조명하여 알려주시는 옛날의 그 말씀에 집착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참된 신학은 하나님이 옛날에 주신 그 말씀들의 의미를 성령의 조명 하에 바르게 해석하여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경을 가르치고 해석했던 방식을 따라 이 시대의 한국 교회의 상황 안에서 가르치는 것이 참된 신학이다.

돌아보면 인기를 누리는 모든 센세이션한 신학들은 ‘옛적 길 곧 선한 길’에서 벗어나서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들이었다. 옛적 길에 집착하고 벗어나지 않으면 “평이하다”, “고루하다”하며 밀치고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청교도 개혁주의’라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개혁신학의 최고봉으로 자리 잡았다. 청교도와 개혁신학이 동등하다는 것도 아니고 개혁신학 안에서 청교도 사상이 최고의 엘리트 신학이라고 한국 교회에 각인되었다.

정이철 목사
정이철 목사

그런데 청교도 신학은 아담의 상태와 원죄에서부터 성경과 기독교를 파괴하였다.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한 영원히 살도록 완전하고 순전하게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의 언약으로 그 사실을 보장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했다. 대신 아담이 스스로 완전한 행위로 자격을 얻어 영생을 당당하게 취득하기로 하나님과 계약했다고 가르쳤다. 기독교 신앙의 첫 단추가 이렇게 끼워지면 그 다음의 모든 것들이 제 위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경과 사도들과 칼빈과 같은 위대한 선생들이 가르친 신앙의 내용과 해석을 버렸기 때문이다.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버리고 새로운 다른 길로 나아갔다.

서철원 박사님의 사상과 신학은 언제나 ‘옛적 길 곧 선한 길’에 머물러 있다. 성령론, 구원론, 인간론 등 모든 부분에서 서 박사님은 변함없이 ‘옛적 길 곧 선한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도 서 박사님의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따르는 가르침을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이 책에서 서 박사님은 사람의 원죄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내 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다. 창조주에 대한 반역은 영원한 멸망과 죽음과 영원한 고통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반역이 무효화되기 전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반역죄를 무효화할 길이나 방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나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고통밖에 다른 것이 없다. 너무도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한 번 범함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졌다. 나는 죽고 멸망하고 영원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 ... 주 예수께서 피 흘려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다. 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 그 피로 내 죗값을 다 지불하사 내 죄와 반역을 무효화하였다. 이렇게 나를 내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셨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 46)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나님만이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고 해방하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되사 그렇게 하셨다. 사람이 되사 신인으로서 일하사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신인이 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어 피 흘리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만으로 나를 구원하셨어도 말로 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신인으로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고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셨다.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신비이고, 감사와 감격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 47)

구약의 율법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은 이러이러한 것을 행하면 범죄하고 지적하고 교훈한다. 그러므로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율법이 알려준다. 내 양심에 가책을 일으켜서 죄를 알도록 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한다 ... 율법은 살리고 구원하는 기능은 없고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을 갖는다. 사람은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와 명령을 지킬 수가 없다. 그련데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저주한다. 이 정죄와 저주가 어떠한 것임을 율법은 밝힌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48,49)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설할 때 하였던 말들이고, 사도들이 성경을 해설할 때 했던 내용들이다. 새로운 것을 구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평이하고 고루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우려된다. 특히 ‘옛적 길 곧 선한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고 바른 가르침을 싫어하면서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는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미워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모든 신학들을 성경에 비추어 그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한국인 신학자의 탁월한 안목을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교만한 말로 들리겠으나) 필자는 종교개혁 시대의 대부분의 문헌들 속에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불충분 또는 오류들이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 시대의 문헌들에 대해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문헌은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 외의 모든 기독교 문헌들은 성경과 같지 않고, 그 시대의 상황과 신학의 한계 안에서 저술되었다. 그래서 최고의 청교도주의자였던 로이드 존스까지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의 종교개혁 시대의 문헌들을 계속 성경에 비추어 연구하여 수정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에 비추어서 웨민신앙고백서 등의 종교개혁 시대의 문헌들을 연구하고 고치려는 자세를 가진 신학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자세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성경 이해와 안목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서철원 박사님은 다르다. 서철원 박사님의 저작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중요한 문헌들에 담겨진 오류들과 기존의 개혁신학에서 정설로 여겨지고 있는 그릇된 해석들에 대한 교정이 이루어짐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도 그와 같은 작업이 계속 이루어진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기존의 개혁신학에서는 믿음이 지식, 찬동, 신뢰로 설명되었고, 우르시누스도 방식으로 설명했다. 서철원 박사님은 우루시누스의 원 저작을 해설할 때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확신있는 신학으로 교정을 시도했다.

“믿음의 요소를 지식과 찬동과 신뢰로 제시하는 것은 합당한 신학이 아니다. 지식과 찬동을 믿음의 요소로 정한 것은 토마스의 견해를 그대로 개혁신학으로 옮겨온 것일 뿐이다. 믿음은 믿음고백으로 성립한다. 믿음고백을 해야 믿음이 믿음으로 성립한다. 그리고 신뢰는 믿은 후 언제 이루어지는 확신인가? 신뢰를 믿음으로 요소로 정한 것은 로마교회의 가르침, 곧 처음 믿음은 잠재 신앙이고 이 믿음이 사랑의 선행으로 활성화되면 견신이 된다. 이 견신이 신뢰로 바꾸었을 뿐이다.”“피 흘려 죄용서를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통을 신성의 힘으로 감당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신성의 힘으로 감당하신 이유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122)

“개혁신학이 믿음의 요소를 승인 혹은 찬동을 설정한 것은 로마교회의 신학 위에, 사변을 함으로 나온 것이다. 믿음은 믿음 대상에 대한 찬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고백을 해야 믿음이 이루어진다. 개혁신학이 사변적 사고로 교회생활에서 기쁨과 감격을 제거하였다. 피 흘려 죄용서를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통을 신성의 힘으로 감당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신성의 힘으로 감당하신 이유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123)

“신앙 대상의 지식은 연구하고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복음 선포에서 온다(롬 10:17). 복음 선포를 받으면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로 믿음고백을 하게 하신다. 이 믿음고백으로 믿음이 믿음으로 확립된다. 이 믿음고백으로 확실히 믿기 때문에 감사와 감격이 나온다.”“피 흘려 죄용서를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통을 신성의 힘으로 감당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신성의 힘으로 감당하신 이유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123)

더 많은 말로 이 책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책의 내용에 대한 소감을 말할 수 있으나, 지면의 한계로 인해 그리할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독자들이 이 책을 차분히 읽고 잘 소화하면 성경적인 신앙 이해가 확고해지고, 센세이션한 현대적인 신학 이야기들에 현혹되지 않고 하나님이 언제나 기뻐하시는 ‘옛적 길 곧 선한 길’(렘 6:16)에 머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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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