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과 구약은 함께 읽어야 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둘은 하나의 책 곧 교회의 책이다. 구약이 교회의 책으로 수납된 것은 전체로 그리스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그 전체로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고 가르치고 있다. 전혀 그리스도가 언급되지 않는 부분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록되었고 그리스도 때문에 기록되었다. 다 그리스도 출현의 준비이다.

신약은 구약에서 기원하였다. 신약이 구약과 무관하게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신약의 부분들도 구약의 빛에서 읽고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의 뿌리가 구약이므로 구약과 함께 읽어야 하고 구약의 제시를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구약은 신약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신약이 구학 해석의 문맥이다. 구약의 내용이 신약에 의해 그 의미와 목표가 결정된다. 구약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가 구약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신약에 의해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의 진행된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성취된 책이다. 구약은 그 자체로는 미완결의 책이다. 시작과 진행은 분명해도 결말을 가지지 못한다. 그 결말은 신약에 있고 신약에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내용이 신약의 빛에 의해서 밝아지고 자기 정체를 분명히 한다. 전 구약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이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세계 모든 족속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된다. 그리스도의 구속 후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가 된다. 이것이 구약이 목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 사역으로 이스라엘은 그 존재 목적을 다하였다. 이스라엘은 그 존재 목적을 신약에서 발견한다. 신약이 구약 해석의 문맥이다. 신약의 문맥에서 구악의 본래 의미가 바로 현시되기 때문이다. 신약과 무관하게 보이는 구약 본문들이 신약에서 바른 해석을 만난다.

구약을 그리스도 없이 해석하면 유대주의 율법 종교가 된다. 율법을 삶의 법과 구원의 길로 삼는 율법주의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배제되었으므로 구원이 배제된다. 그러므로 구약의 바른 해석은 그리스도론적 해석이다.

신구약은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희랍어 번역 성경인 70인경 (LXX)이 교회의 성경이 된 것은 구약을 메시아적으로 해석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신약과 교회도 이 메시아적 해석을 계속하였다. 신약은 구약을 바르게 이해하고 자기 자리를 굳게 하기 위해 예표론적 해석을 발전시켰다.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고 신약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리스도가 구약에서부터 역사하고, 신약에서의 성취를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에 나타난 사건들과 구원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시대상황에서 배정된 소임을 수행한 것을 배제하고, 그리스도의 얼굴만을 보려고 하는 것은 결코 바른 해석법이 아니다. 그 시대에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한 소임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사전에 지시하는 것으로 밝혀야 한다. 신약에 연결해서만 예표론적으로 구약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산출하려고 하면 우회적 해석이 되어 그리스도를 잃게 된다. 그 시대상황에서 행한 소임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전 표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약은 그 중심인 그리스도로부터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사역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구원만 신약의 중심으로 보고 다른 부분들은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 성령의 파송과 사역은 다 그리스도로 가능해졌고 정립되었다. 성령이 일으키시는 중생과 믿음만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연장인 것이 아니다. 사도신경의 2조가 3조에 의해 기초되었어도 성령의 존재와 파송은 다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였고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분리된 성령의 오심과 사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성령론은 그리스도론의 연장이다.

성령론은 오순절 후의 그리스도론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얼굴로 일하고 그리스도를 현시한다. 그리스도가 영 안에서 자기의 구원을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독자적으로 만들면 안 된다. 성령은 인격으로는 독자적이지만 그의 사역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제 2 자아 (alter ego)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독자적으로 구성하면 신비주의가 된다. 성령의 구원 적용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연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사람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될 때만 그리스도교 구원이 되고 신비주의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성령을 추구하는 데서는 신약의 성령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의 영을 만나고 인간의 자기 투사를 만난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종말에 관한 부분도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역사의 진행이 완료되었다고 해서 재림이 이루어지고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역사를 주재하고 구원 적용이 완료되면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재림한다. 종말론은 그리스도론의 연장이다. 종말에 이르러 모든 신학도 완성된다. 성경 해석이 거기서 성취된다. 더 이상 성경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모든 해석이 실재가 되기 때문이다. 약속이 실재로서 구체화 되는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종말에 관한 부분들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사변과 공포만 조성된다. 종말에 관한 한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되고 공포가 된다.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이기를 그치게 되어 무섭고 참혹한 신을 만나게 된다. 더 이상 구속주는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종말에 관한 성경의 부분들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론의 연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생활 규범에 관한 성경 본문들도 성경의 중심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열성이 나타나고 율법주의 망령이 되살아난다. 은혜의 종교가 생활영역에 이르러서는 인간 스스로가 자기 삶을 해결하는 자연종교 내지 율법주의가 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보장이고 그 수행자이다. 그 외의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성경의 중심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의 해석은 문자적 의미를 참 해석으로 삼아야 한다

성경의 내용은 구체적인 역사 환경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언어는 하나님의 사역을 역사적 사건과 전개로 제시한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그 언어가 문장과 문맥에서 말하는 사실을 지시한다. 즉 문자적 문법적 의미를 성경본문의 뜻으로 삼아야 한다. 문자적 의미를 벗어나면 그것은 곧 시대사상과 합치하여 성경의 사신 (使信)을 변조하게 된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일반 언어를 도입하고 철학적으로 형성된 언어들을 도입한다. 그러면 자연히 그렇게 차용된 언어의 내용 곧 사상체계도 함께 도입하여, 성경을 그 사상체계로 번역하고 변용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일을 막기 위하여 성경 해석은 교회의 근본 교리들에 부착해야 한다.

성경 해석자는 아무 선입견이나 사전 이해 없이 성경 본문을 문법적으로 단어 뜻에 의해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주석에 의해 본래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당연한 귀결로 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사전(事前) 이해를 가지고 접근하고 자기 당대의 문화에 의해 각색되어 성경을 본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교리의 명백한 가르침에 부착해야 한다. 그럴 때만 문화의의 타협을 면하고 성경 본문의 명백한 뜻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모든 부분이 산문 언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시적 표현과 상징적 언어의 활용이 많다. 그리하여 일상 언어로 표현되었어도 쉽게 내용을 알 수 없게 한다. 이 경우는 명백한 진술들에 의해 그 부분들을 해석해야 한다. 초대교회 때부터 실시된 성경 해석의 원칙을 활용해야 한다. 불분명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에 의해 해석되고 조명된다. 그리하여 성경 전체의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는 상징적 언어로 미래를 예언하고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글자에만 매이면 전혀 성경 본문이 지시하는 뜻을 놓치게 되고 사변을 일삼게 된다. 명백하게 산문으로 기록된 해당 본문들에 의해 성경 전체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아가서는 시문서(詩文)여서 성경 전체 문맥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이런 시 부분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비유적 의미가 가능하고 허용된다. 따라서 우화적 해석이 허용될 수 있다. 단지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관계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성경 해석은 본문이 말하려는 뜻을 나타내야 하고 당대 사상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

해석자가 만나는 유혹은 성경으로 자기 문화체계에 합당한 자리를 배정받게 하므로, 자기의 연구가 학문으로 인정받기 바라는 욕망이다. 그리하여 문화체계의 일부로 성경이 해석되지 않으면 외부세계에서 유입된 생소한 것으로서 현대인이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통상 학문은 이성에 의해 탐구되고 체계화된 지식체계이므로, 이성의 범주로 해석되지 않는 성경과 신학은 지성을 희생함 (sacrificium intellectus)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성경을 자연이성이 받을 수 있는 범주로 해석하는 일을 반복하여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부인하였다.

물론 성경 해석자가 성경에 접근할 때 백지 상대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배운 교리적 지식도 역사하지만 교육을 통해서 배운 일반 학문적 배경과 소속 사회의 문화적 틀을 가지고 접근한다. 특히 과학적으로 훈련되고 세뇌되어 과학적 방법론으로 성경이 해석되어야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또 해석자가 사는 시대의 지배적 사상을 성경 해석의 문맥으로 삼는다. 그 사상을 많은 사람들이 수납하였기 때문에 그 사상체계를 바른 해석의 틀로 여긴다. 성경 본문의 자기주장을 시대사상으로 번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성경 본문의 주장에 정당성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의 자기주장을 존중해야 한다. 성경본문의 명백한 뜻과 주장을 바꾸는 해석을 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신학은 자연이성 (ratio naturalis)에 의해 바르게 수납되고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권위를 갖는다. 명백한 자기주장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주장에 합치하는 해석을 해야 한다. 성경은 문장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자기주장과 상반되는 해석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다. 성경을 존중하는 것은 성경의 자기주장을 인정하고 그 주장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문장들이 말하는 명백한 뜻을 굽히지 않고 실재대로 받아야 한다. 성경이 성경으로서 말하도록 해석해야 한다.(신학서론, 259-66)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철원 박사는 서울대학,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원(Th.M), 화란의 자유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다.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칼 발트의 신학을 지지하는 지도교수 베인호프와 다른 발트의 제자 신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칼 발트의 신학의 부당성을 증명하였다. 발트의 사상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논문 '그리스도 창조-중보자직'을 관철하여 박사학위를 얻었고, 이 논문이 독일 튀빙겐대학이 선정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 논문 100편에 수록되어 한국 교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총신대 신대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 십년 동안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교수사역에 헌신하다 영예롭게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쉬지 않고 연구하시며 <바른믿음>의 신학자문 역을 맡아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