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3 - 11절 강해

당신은 확실히 그리스도인인가요? 그렇다면, 본문 9절의 바울의 절실한 기도는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바울은 본문 9절에서, “내가 기도하노니. . .”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미 빕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3절 -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절 -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1:3-4) 이라고 하면서, 
바울은 이제 더 절실한 기도 제목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9절 - “내가 기도하노라!”

그의 “기도중의 기도”가 필요한 절실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울과 함께 이미 “복음에 교제”하고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어떠한 삶으로 그들의 “복음의 교제”를 증거할 것인가를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이미 종말의 시대에 살게 될 성도들에 주신 말씀의 반영이라 하겠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대속이 가까웠음이라.”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에 합당하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누가복음 21 장).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 이시니라” 라고 고백한 바울은 이제 그의 기도 내용의 첫 번째 제목이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히” 할 것을 기도하고 있다. 이것이 종말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1.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자라가게 하라.

사랑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고, 가장 큰 주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러면,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하라”는 뜻은 무엇인가? 성서적 사랑은 반드시 일정한 규율과 법도가 있다는 것이다.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이라는 뜻이고, 감상적이 아니라 이지적이라는 뜻이다. 무질서한 사랑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성서적 사랑은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 이기 때문이다 (롬 13:10). 성서적 사랑은 무슨 충동적인 감정의 절정이 아니라 최고 질서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1:9) 라는 말씀은 “사랑에 관한 하나님 계시 전체”를 요약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1) “성서적 사랑이란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서”라는 의미가 있고
(2) 하나님 백성의 “하늘나라의 삶의 예비”라는 의미가 있다.
(3)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도의 삶만이 곧 “복음에 참여한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사랑”과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6-40).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계명”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 14:21-24).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0-21).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옥게 갇힌 자를 돌아보고, 병든 자를 간호해 주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불신자들도 행하는 일들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영광”의 문제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성서적 사랑을 베푸는 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신문, TV에 광고하지 않는다. 성서적 사랑을 베푸는 참 성도는 자신의 이름이 나가지 않게 최선을 다한다. 사랑을 베푸는데 최선을 다 하는 정도로 자신의 이름을 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법도”이다. 이것이 지식과 총명을 좇아 사랑하는 길이다.

또 다른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법도는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치 말아야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규율이다. 예를 들면, 성경은 긍정적인 명령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고, 부정적인 명령으로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긍정적인 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아내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등의 말씀이 있다.

사랑에 대한 부정(否定)적인 명령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사랑하라”는 것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다만 세상 사람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사랑하라” “사랑하지 말라”는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영생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사랑하라” “사랑하지 말라”는 교훈을 지키지 않는 것은 영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에는 영생과 관계가 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 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6-48).

성서적 사랑의 개념에 대한 가장 분명한 교리는, 마 10:37-39 절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 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지지 않고 나를 좇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상 본문의 말씀은 “기독교인의 사랑”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바울은 이러한 말씀을 좇아, 곧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사랑하라는 것이다. 성서적 사랑이 세상 사람의 사랑과 다른 점은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하라는 요구이다. 사랑할 대상은 더욱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을 대상은 더욱 멀리할 것이다. 성경은 자기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현대 일부 교회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자기 존중” (self-esteem) 메시지는 우리가 마땅히 경계해야할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영광과, 서로의 영광을 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날 길이 없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 . .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0-42, 44).

바울이 간절히 기도하는 동기와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동기와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주장 중 하나는 “사람이 자기를 먼저 사랑하지 아니하면,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는가?”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성경에서 사랑치 말라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라는 모든 것으로부터는 멀어지게 된다. 그러한 자는 돈을 사랑하게 되고, 명예를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과 함께” 멸망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간절히 “다시”기도하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를 위해서이다.

“너희 사랑이 지식과 총명을 따라 자라.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두 번째, 하나님 백성이 “하늘 나라의 삶을 예비”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날까지.” 곧 종말 때까지. “사랑”과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이 다음과 같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9-13).

우리는 분명하게 사랑과, 종말과, 구원은 한 덩어리의 하나님 계시임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지식”은 정보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지식, 깨달음”을 뜻하는 지식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오직 영적인 것들을 뜻할 때 사용되며, 하나님의 지식, 종교적 지식, 영적 지식, 교리적 지식”에 만 적용되는 용어라고 한다 (제임스 보이스, 빌립보서 강해에서).

“총명”이라는 말은 “지각(知覺)”을 뜻하며, 따라서 “깨달음” “인식(認識)” 등의 의미 이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감각을 통하여 “인지(認知)” 할 수 있는 기관(器官)들의 명칭에 사용된다. 그 반대말들을 보면 분명한 대조로 그 의미가 선명해 질 수 있다. 그 반대말들은 “무지” “경험부족” “오해” “무식” “오리무중” “어리석음” “천치” “불합리” “불건전” “비논리” “정신이상” “무감각” 등이다.

바울은 “너희 사랑이 지식과 총명을 좇아 더욱 자라가라”고 기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확실한 구원의 증거가 되며, 구원을 주신 목적, “하나님께 영광”의 길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길이 없으며, 그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오직 이러한 삶을 산다.

 

정태윤 목사 / 복음주의 형제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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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윤 목사는 정태윤 목사는 미국 달라스에 있는 서남침례교회의 목사이다. 정태윤 목사는 현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안타까워는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주의 형제회’를 조직하여 매년 복음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천주교의 심각한 배도를 설명하는 데이비드 헌트의 책「짐승위에 탄 여자」을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하였고, 그 외에도 「진정한 복음」,「참 복음과 거짓복음」, 「로버트 채프만: 사랑의 사도」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