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 목사와 한국청교도사상가들의 토론 2

한국청교도사상가들(한청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단체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측과 반대하는 정이철 목사의 가상적인 토론을 위해 만들어낸 가상적인 명칭이다.

정이철 목사의 주장 2>
“그리스도 또는 그 누구라도 율법으로 영생의 자격(의)를 얻는다는 주장은 성경과 기독교에서 찾을 수 없는 거짓된 이론이다. 율법에게는 영생의 의를 제공하는 기능이나 자격이 없다!”

한청사의 반박>
“칼빈은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의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가르쳤다. 율법을 지키는 의로움이 구원과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대체 왜 율법을 주셨겠는가? 칼빈은 다음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의 길이고, 만일 율법을 100% 정확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것으로 영생의 의를 얻었을 것이라는 것처럼 가르쳤다.

‘누구든지 율법을 성취할 자에게 주어질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구해야만 한다. 또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라고 율법 안에서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약속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다 ...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짐을 지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목시키셨으니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자들인 것처럼 우리에게 은혜로운 공로를 얻어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가?’(기독교강요 2.17.5)

‘바울은 두 가지를 가르친다.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모든 점에서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또 하나님 앞에서 감당함으로써 의로움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에 복속되어야 했으니 그의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하시기위한 의도였다 ... 그리고 바울은 율법에 의해 정죄되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저주를 감당해야 한다고 덧붙인다.’(칼빈의 고린도주석)"

필자는 칼빈의 신학의 약점이 율법에 대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강요>를 읽다보면, 마치 칼빈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고, 혹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킴이 가능했다면 그것으로 영생의 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뉘앙스를 보게되어 당혹스러웠다. 과연 칼빈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을까? 정말 칼빈은 사람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면 그것으로 영생의 의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을까?

율법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율법에게 사람에게 의를 주는 기능이 단 0.1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죄인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영생을 얻게하는 의이다. 물론 율법을 지켰을 때 도덕적이고 상대적인 의를 얻는 것은 가능하다. 성경은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과 신약의 사도들에게서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의 의를 얻을 수있는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신약 성경은 인간의 범죄를 설명하고 규정하기 위해 율법이 보내어졌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율법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게하려고 주어졌다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

신약 성경은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의를 얻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율법에게는 그런 기능이나 능력이 처음부터 없다고 한다. 율법의 지적과 정죄에 합당한 더러운 죄인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의 의를 얻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비록 칼빈이라고 해도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면, 성경의 권위 아래 우리가 그의 주장을 교정해야 마땅하다. 칼빈이 한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고 추종한다면 복음에서 벗어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8:5)

만일 칼빈이 위 구약의 구절을 율법준수를 통해 영생의 의 획득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했다면, 그것은 칼빈의 오류이다. 모세는 위 구절을 통해 단지 사람의 도덕적이고 상대적인 의를 말하였다. 이전 가나안 땅의 주인들처럼 동성애, 수간, 친족과의 성관계 등의 죄악을 범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지 않을 것임을 말했을 뿐이다. 이 구절이 신약의 사도들에게 율법으로 영생의 의 획득 교리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롬 10:5)

신약에서 바울 사도가 모세의 그 말을 인용함으로 마치 율법준수에서 영생의 의 획득이 가능한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바울의 그 다음의 말을 보면, 율법준수의를 통한 영생의 의 획득이 불가능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설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으니라”(갈 3:1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모세의 그 말을 인용함으로 마치 그리스도를 믿음 외에 율법준수를 통한 영생의 의 획득의 길이 있는 것같은 오해에 빠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앞뒤를 자세하게 보면, 바울은 율법이 지적하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율법을 지켜 의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영원히 죄용서와 영생의 의를 받지 못한다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모호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속히 바른믿음으로 돌아서야 한다.

“칼빈이 언급한 모호한 내용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의 의를 획득하는 한 방법이 옛날부터 성경과 기독교에 있었으나 사람이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대신 율법을 지켜 영생의 의를 획득하여 전가하신 능동적 순종의 교리는 성경적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의 의를 얻는다는 신앙은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거짓 신학은 청교도 운동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교리이지, 우리가 따라야 할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다져온 옛날의 선한 길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렘 6:16)
 

 

특히 (고)박윤선 박사를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귀히 여기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 영생의 의를 획득하는 방법이 있다는 거짓 신학에 기반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 사상을 고집한다는 것은 더욱 더 안타까운 일이다. (고) 박윤선 박사님도 필자와 같이 율법에게는 처음부터 영생의 의를 주는 기능이 없었다고 가르쳤다.

“율법은 본래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님(소제목). 갈 3장 10-12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율법이 제정된 것이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함이 아님을 잘 밝혀준다. 구약 자체가 인간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소망이 없음에 대하여 역설하는 동시에,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 사실을 고조한다.”(박윤선, <계시의존 사백>에서)

“후대에 들어온 율법은 성질상 은혜 언약과 고체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 여기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함은 인생들로 하여금 그 범죄한 것이 많음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뜻이다(롬 4:15, 5:20). 그러면 율법의 목적은 새로운 구원 방법을 제시함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에만 있다.”(박윤선, <계시의존 사색>에서)

서철원 박사의 율법의 기능에 대한 해석도 이러하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은 이러이러한 것을 행하면 범죄하고 지적하고 교훈한다. 그러므로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율법이 알려준다. 내 양심에 가책을 일으켜서 죄를 알도록 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한다 ... 율법은 살리고 구원하는 기능은 없고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을 갖는다. 사람은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와 명령을 지킬 수가 없다. 그련데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저주한다. 이 정죄와 저주가 어떠한 것임을 율법은 밝힌다."(하교리 해설, 48-49)

칼빈도 율법의 기능을 이렇게 가르쳤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무력에서 생기는 죄악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오점들을 보여 주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의를 따라가는 능력이 없을 때에, 인간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악의 뒤를 곧 따라오는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인정하는 범행이 중대한 것일수록 우리의 책임을 묻는 심판도 더욱 엄중하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한 사도의 발언은 여기 해당한다"(기독교강요 2.7.7)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율법은 우리 개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과 처음부터 관련이 없었다. 율법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고 오직 죄인들을 대신하여 의로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보이기 위해 주어졌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가 율법 조문들을 지켜서 의를 얻었다는 것은 거짓 신학이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죗값을 갚아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됨으로 우리의 구원이 일어났다고 가르쳐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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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