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드러내 주신 것을 배우고 확신하고 가르쳐야 해

신호섭 목사, 고려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몇 달 전 어느 교회의 한 권사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케냐의 데이빗 오워와 미국에 거주하는 자칭 예언자라 하는 홍혜선 전도사의 2014년 12월 한국전쟁 설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한국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고 ‘매우 화가 나신 하나님’은 이 계시를 취소할 마음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이런 저급한 소위 계시와 예언에 미혹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제게 메시지를 보내신 그분은 매우 두렵고 떨린다면서 밤잠조차 자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한국을 떠났으며, 무비자로 미국을 갈수 있는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피해서 말입니다. 참 한심스러운 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급기야 내일(7일 밤) 지상파 방송인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재미교포 전도사의 한국 전쟁 예언을 믿고 외국으로 피난을 떠난 사람들을 통해, 그들을 떠나게 한 한국사회의 불안과 불신에 대한 실체를 방송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사실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피곤한 일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종결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뿌리를 깊이 내린 교인이라면 이런 난리와 소문을 두려워하거나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두려워하고 흔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저급한 신앙체험에 더 권위를 두고 있다는 반증이 아닙니까? 이는 한국교회가 그처럼 허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진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몽땅 어디로 팔아먹었다는 말입니까?

자칭 예언자라 하는 데이빗 오워나 재미 교포인 홍혜선 전도사가 무슨 예언을 했는지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사회관계망(SNS)나 여러 인터넷 매체에서 이 부분을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거짓 예언을 믿으며 불안에 떠는 일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목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그들은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보다 저급한 거짓 교사들의 주관적이며 신학적으로 무식한 체험에 더 큰 권위를 두기 때문입니다.

모세 오경을 마감하는 끝부분에서 모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감추어진 일’과 ‘독단주의’

모세는 여기서 모든 진리가 두 부분 즉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로 구분되어 있다고 기록합니다.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며,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모든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추어진 일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야 합니다. 존 스토트의 말을 빌리자면 감추어진 일에 대해서 독단주의의 자세를 취하면 안되며, 나타난 일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의 태도를 견지해서는 안됩니다. 감추어진 일이 독단주의와 결합되면 심각한 이단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독단이란 사전적 의미는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단함이지만 철학적 의미에서 독단이란 객관적인 연구 없이 주관적인 편견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독단이란 주관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주관주의와 편견의 결과 독단이라는 괴물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신학적 무지가 결합되면 이단적 신념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며, 하나님의 인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아닌 것은 성경 밖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메시지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될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은밀한 혹은 숨겨진 또는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감추어진 일’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알려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됩니다. 칼빈은 이미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것에 대해 과도한 호기심을 발동하는 것은 죄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계시는 느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감정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조장될 수도 있으며 그래서 조작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죄의식과 그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회개를 통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확신하는 과정 없이 죄인은 얼마든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일부 저급한 소위 CCM이나 사람의 감정만을 자극하는 음악 소리, 웅장하고 거룩하게 느껴지는 성당이나 예배당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자신이 신자가 되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심리적 중생, 또는 심리적 소명이라 부릅니다.

죄인들은 언제나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강조하고 과대평가하며 신비롭게 포장합니다. 그것이 개인적 주관주의로부터 출발해 엄청난 교권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느낌이나 감정은 그저 느낌과 감정일 뿐입니다. 피터 불룸필드의 말을 빌리자면 개인적 감정이나 체험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하거나 계시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나아가 사악한 일입니다(『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중에서). 그것은 성경의 예언의 말씀에 인간의 말을 더하는 신성모독적이며 저주스러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직통계시를 받는다거나 미래를 예언한다는 소위 예언가들은 접신에 들렸든지 아니면 신앙상의 경험과 계시를 착각하는 신학적으로 무식한 자이거나 심리적이며 정서적인 우울증 환자 또는 망상주의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다. 풀러신학대학을 졸업했다고 주장했던 홍혜선 씨는 12월 한국전쟁설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예언자가 정확하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 이루어지는 것이냐 안 이루어지는 것이냐. 예언한 대로 전달한 대로 되는 것이냐 안 되는 것이냐는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중략) 어떠한 예언은 예언한 대로 이뤄지기도 하고, 어떤 예언은 예언을 했어도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그 기간이 아닌 다른 때에...”(홍혜선)

이는 그의 예언이 빗나갔을 때를 대비해서 항상 하는 이단들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예언으로 한국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이 한국 사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만큼 한국교회의 신앙 수준이 저급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가 계속 불거지자 결국 풀러신학대학은 홈페이지에 그들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홍씨는 풀러 신학대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졸업생은 아니었다. 풀러 신학대학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모든 주장은 성경에 비춰 검증돼야 한다. 홍씨의 가르침과 간증은 그녀의 개인적인 관점을 반영할 뿐 풀러 신학대학교의 신학적 입장이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

신학적으로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 풀러신학교 조차 홍씨의 주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천안의 고신대학원의 박영돈 교수(조직신학)는 그의 페이스 북을 통해 “가소로운 입신과 예언”이란 짧은 글에서 이렇게 말힙니다. “구약 같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 예언하는 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그런 인간이 버젓이 활개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미혹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교회의 선생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홍씨의 예언을 “무당들이 하는 입신 따위” 라고 비난합니다.

작년 12월 한국전쟁설은 하나님께서 ‘감추신 일’에 대한 몇몇 독단주의자(저급한 주관주의+신학적 무지+편견)들과 그들의 거짓 예언에 부화뇌동한 일부 한국교회 교인들이 만들어낸 무지몽매한 해프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타난 일’과 ‘불가지론’

말씀한 바와 같이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타난 일”입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신명기 29장 29절에서 계속 말씀하고 있듯이 바로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나타난 일(하나님이 계시하신 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으며 후손들에게 부지런히 그것을 가르치고 교훈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고 오는 모든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일’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것은 성도로서의 직무유기에 해당합니다. 그러한 자는 자녀들이나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바른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줄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결국 이러한 교인들은 감추어진 일에 독단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농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 대부분이 ‘나타난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히 로마서와 요한일서에서는 “우리가 아노니”, “우리가 확신하노니”, “이것을 알라” 등의 표현이 무수히 반복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하며, 확신해야 하며, 교훈해야 하며,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타난 일’ 즉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고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나타난 일의 절정 즉 계시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타난 일’을 부지런히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딤후 3:14-15). 따라서 우리는 몰라서는 안되며 모른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감추어진 일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나약한것도 아니며 무식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연만물에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해서는 안됩니다(시 19:1-2).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결된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핑계해서는 안됩니다(요 15:22).

불가지론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불가지론은 ‘감추어진 일’에 대해 취해야 할 진실한 신자의 자세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감추어진 일에 대해서는 그토록 독단적이면서 나타난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불가지론을 견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했고, 지난 몇 개월 한국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홍혜선이 그러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부화뇌동 하거나 놀아나는 것은 한국교회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추어진 일에 대해 독단주의(저급한 주관주의+신학적 무지+편견)를 취하는 자들이 즐겨 쓰는 말은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다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한 설교자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이렇게 말하는 설교자나 소위 예언자가 있다면 삼가 조심하십시오. 그들을 경계하십시오. 그들을 떠나십시오. 더 나아가 그들의 거짓됨을 나타난 일로 드러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거의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피터 불룸필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한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통하는 특별한 ‘긴급 직통 전화’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것처럼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중에서). 그들은 계시자들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계시(성경)의 해설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 언행을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느낌과 감정은 종교적인 협박의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회나 노회나 총회와 같은 종교회의 석상에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오늘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이 말씀을 주셨는데” 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여기에는 그의 마음(감정)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따라서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그의 마음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교만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재앙이 임할 것이다.” 또는 “이 예언을 전하지 않으면 재앙이 임할 것이라.”라는 메시지를 종종 받곤 하는데 이것은 철저하게 이교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이 말씀을 주셨는데” 라는 말 대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 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큐티를 하고 난 후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 내가 큐티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내게 주셨다.” 라는 말 대신 “성경의 이 말씀이 오늘 나의 마음을 찔렀다.” 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성경 구약과 신약 66권에 완벽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성경을 통해서도 계시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곧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타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는 부지런히 나타난 일에 대해 집중하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나타난 일’(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대의와 정신을 따라 하루 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책 “Christ the Controversialist”에서 독단주의와 불가지론의 균형을 잡는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독단주의와 불가지론의 균형을 제대로 잡는 일은 매우 어렵다. 우리가 감추어진 것의 영역에서 독단주의를 주장하거나 나타난 것에 대해 불가지론을 견지하면 문제가 발생한다.”(존 스토트)

그러면서 스토트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것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성숙함의 표시라고 말합니다(『논쟁자 그리스도』중에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것과 몰라야 하는 것을 모른다고 말해야 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아는 것과 알아야만 하는 것을 확실히 알므로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자들을 향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설교에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교훈하신바 있습니다(마 5:37). 우리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라고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여호와의 이름으로 헛되게 맹세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치 않을 것입니다. 데이빗 오워나 홍혜선 씨의 예언은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우리에게 명령한바와 같이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는 말씀에 집중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1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이런 종류의 거짓 예언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또 계속해서 반복하여 여러분을 미혹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거짓 예언을 바르게 분별할 만큼 장성한 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들을 양육하기 위해 부지런히 계시된 말씀을 충실히 해설하고 설교하기를 소원합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 성도들 역시 그저 나 하나 간신히 예배드리는 신앙에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12월 한국전쟁설이라는 해프닝은 한국 교회가 말씀 안에 강하게 뿌리 내리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신호섭 목사 소개>

 호섭 목사는 고려신학교 신학원(M.Div)을 거쳐 20세기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강해설교의 거목으로 알려진 마틴 로이드존스 박사가 설립한 영국의Lond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Dr. Hywel Jones와 Philip Eveson 목사와 같은 로이드 존스 박사의 후예들을 통해 청교도 신학과 설교학을 전수받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싱클레어 퍼거슨(Dr. Sinclare Ferguson) 교수의 지도하에 청교도 신학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교리(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in Puritan Theology, Th.M. thesis, 2006)에 대해 연구했다이어2009년에 도미하여 미국 미시시피 잭슨에 소재한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21세기 신교회 운동인 이머징 교회 운동의 영향에 대한 연구(The Emerging Influences: A Look at the Influence of the Emergent Church Movement on Korean Theological Studnets (2012)로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1999년부터 고려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현재는 고려신학교 교학처장으로 재직중이며 조직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다박사과정 중 2011년부터2012년까지 뉴올리언즈 한인교회(New Orleans Korean Church)를 목양했고 현재는 귀국하여 개혁교회연구소와 올곧은 교회를 개척하여 올바르고 곧으며 진실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 건설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힘쓰고 있다.

 

2013년 미국 남침례교의 Paul Washer 목사의 한국 사경회와 2014년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y)의 R. C. Sproul Jr.의 한국 사경회에 통역을 맡았고 성서유니온(Scripture Union)의 주최로 영국 강해설교학의 콘힐트레이닝센터(Conhill Training Center) 학장인 David Jackman 박사의 강해설교 세미나 통역을 맡았다.

신호섭 교수와 avid Jackman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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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호 선교사는 고신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았으며, 현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와 NGO Good Partners(김인중 목사, 이사장)의 파송을 받아 우간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천주교와 오순절 운동 신학 류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성경적 복음을 우간다의 원주민들에게 전하고자 애쓴다. 우간다의 낙후된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과 함께 의료 봉사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고, 늘 기독교의 세계적 동향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