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진 목사: 창세기 토라포션(13): 봐이쉴라흐" 강의 소감 1

한명진 목사님의 설교 영상 하나를 차근차근 들으면서 저의 소감을 말해보겠습니다. 젊은 목회자가 대게 재미있게 말을 잘 합니다. 듣는 분들이 지루하지 않으니 좋겠습니다. 저는 그런 재능이 없는데, 아주 좋은 재능을 타고 나신 분입니다. 한명진 목사의 다음의 강의의 앞부분만 녹취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2분 24초부터)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영적인 이유로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니예요, 대부분 혼적인 이유로 오락가락해요. 영이 활성화되어 있으면 광야 한복판에 던져 놓아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곳으로 인도해 놓아도, 영이 잠들어 있으면 ‘내가 여기 왜 있지?’하고 해멘다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 안의 영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계속해서 말하는 거지만, 토라를 교육해서 우리 안의 육신의 작용들, 혼의 작용들이 아니라 영의 작용으로, 우리가 영으로 보고 영으로 판단하고 영으로 느끼고 영으로 말하고 ...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고난과 핍박과 환란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요 ... 그런데 혼이 작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그것이 복 인줄 몰라요. 그것이 축복인 줄을 몰라요. 이해되십니까?”

‘영이 활성화되어 있으면’이라고 했는데,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성경적 개념으로 ‘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구성 요소는 영과 육입니다. 영과 육의 뗄 수 연합(결합)으로 인간의 존재의 핵심인 인격이 발생하고 유지됩니다.

한명진 목사님께서 말하시는 ‘영의 활성화’가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의 활성화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인격적 존재로 살고, 인격으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고 발견하고 표현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영혼이 육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언제나 인격적 존재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인간의 영의 기능만 더 활성화시킨다는 사상이나 주장은 이방 종교인들이 가르치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를 터득하여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고, 미래를 보고, 다른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는 능력이 이방 종교인들이 말하는 ‘영의 활성화’입니다. 사실은 접신을 통한 거짓 세계의 영적인 능력을 부리는 것입니다.

“영이 활성화되어 있으면”

“영이 잠들어 있으면”

“영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표현하는 한명진 목사님의 사상과 신앙의 개념에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반역죄 안에서 죽은 영혼의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태어났으므로 모든 사람은 죽은 영혼의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죗값을 사하여 주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에 연합되어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돠어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태어나서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는 오직 죄를 짓기만하는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생명을 얻고 죄를 이기게 하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기 전, 죄를 법으로 알고 죄를 짓기를 좋아하면 살았던 우리를 ‘옛사람’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기뻐하는 우리의 존재를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옛사람’, ‘새사람’이라는 성경적 개념은 모두 우리를 인격적 상태와 연관되었습니다. 옛사람은 죄에 포로되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악된 인격의 상태로 사는 모습을 말합니다. 새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적용하시는 성령의 임재로 죄를 이길 수 있고, 죄에서 해방되어가고 있고, 그리스도를 닮아 성화되어가는 인격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이 성숙해지고 변화되어가는 것을 ‘영의 활성화’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필연적으로 왜곡하게 됩니다. 아마도 평소에 ‘영적인 기도’, ‘영의 기도’를 강조하였을 것이고, 또한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방언기도를 영의 기도로서 당연시하고 강조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영의 활성화’라는 개념은 기독교에 없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 생각, 의지,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기독교안의 영적 성장입니다.

“혼이 작용하는 사람들”

한명진 목사님은 영이 활성화되는 것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혼이 작용하는 사람을 말했습니다. 대게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성령이 영(혼)을 통해 역사하시고 사탄과 인간의 죄성이 혼을 통해 일한다는 이분법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혼을 죽이고 영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거기에다 여러 종류의 금욕, 금식 등이 첨부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혼과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혼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따로 존재한다는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 혼, 육으로 구성되었는가(삼분설), 영과 육으로 구성되었는가(이분설)에 관한 매우 난해한 신학적 논쟁의 내용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대부분의 학자들과 교회들이 이분설, 즉 인간이 영과 육으로 구성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단 사이비들에게서 이분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과 맞지 않은 신비적인 주장을 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을 혼이 떠난다고 말하기도 하고 영혼이 떠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과 혼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성경 구절에서 영과 혼과 육으로 인간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전 인격을 풍성하게 표현하려는 의도하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3분 52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세요. 하나님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사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 오늘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내 노력과 열심히 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고, 영으로 선포하고 영으로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한 거예요.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다 역사하십니까? ... 고구마 먹다가 목에 걸렸는데 물을 못 마신 것 같이 답답할 때가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의 열심과 상관이 없다니까요. 영과 상관이 있는 거예요. 영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끊임없이 영을 갈망하고 영을 구하고 영 안에서 걷고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것, 그러기 위해 자꾸 영을 깨워야 해요. 영이 잠들면 안 되요. 할레루야!”

한명진 목사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도 좀 이상한 개념을 말하시네요.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내 노력과 열심히 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고, 영으로 선포하고 영으로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한 거예요.”(한명진 목사)

노력으로 기도하지 말고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선포하고, 영으로 부르짖으라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기도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거리가 매우 멉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즉사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이전처럼 적대시하지 않고 받아주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을 받는 것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입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의 도우심의 상태 안에서 잘하건 못하건, 유창하건 덜 유창하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영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영으로 선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영으로 부르짖는 것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중언부언하지 말로 진실하게 인격적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한 목사님의 말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신비적이고 주관적인 주장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혀와 입술을 딱 잡아서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것일까요? 히로뽕에 취한 사람처럼, 성령(?)에 사로잡혀서 “이 세상은 간데없고 하나님만 보이도다!”하는 무아지경으로 들어가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영으로 선포를 하다니요? 우리가 무엇이길래 선포를 한다는 것인가요? 선포한다는 것은 기도하다가 이런 말이나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심장병은 떠나갈 지어다!”

“나에게 집적거리는 귀신은 떠나갈 지어다!”

우리는 절대로 이런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세워진 특별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를 대리하였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선포할 때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입장에서 했던 행동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의 심장병을 치료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한명진 목사님의 다음의 말도 이상합니다.

“고구마 먹다가 목에 걸렸는데 물을 못 마신 것 같이 답답할 때가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의 열심과 상관이 없다니까요. 영과 상관이 있는 거예요. 영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끊임없이 영을 갈망하고 영을 구하고 영 안에서 걷고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것, 그러기 위해 자꾸 영을 깨워야 해요. 영이 잠들면 안되요.”(한명진 목사)

고구마 먹다가 목에 걸린 것처럼 답답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살지 않아서, 영으로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영을 갈망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도 너무 이상합니다. 영 안에서 걷고 영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도 좀 웃기는 주장입니다.

지금 한명진 목사가 우리 인간의 영을 따라야 한다는 것인지, 하나님의 영(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의 영(혼)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면, 더 이상 상종해서는 안 되는 사이비입니다. 그러나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한명진 목사가 하나님의 영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 해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의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말씀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기록된 성령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 직접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성령이 반드시 그 사람을 인도하고 그 사람과 함께 합니다. 한명진 목사가 과연 이러한 뜻으로 신자들이 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던가요? 걱정스럽습니다.

“(5분 03초) 옆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시다. ‘당신의 영이 잠들면 큰일 납니다’ ...시작! 영이 깨어있어야 해요! 육신이 병들어 있어도 영이 깨어있으면 할렐루야! 그런데 육신이 병들어 있어도 영이 잠들어 있으면 놀렐루야가 되는 겁니다 ... 이번에 DDC 갔는데, 사람들이 예배 때 졸고 그러더라구요. 그때 유명한 강사들이 왔는데 ... 내가 좋아하는 찬양 인도자들이 왔고 ... 그런데 그 와중에 사람들이 좋고 헤롱거리고 여기가 삼층천인지 이층천인지 모르고 ... 그런데 제가 강단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눈이 동그레집니다. 얼마나 웃겨놓았는지 ....”(한명진 목사)

영이 잠들었다! ... 이런 표현은 정말 주관적이고 신비적입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이미 영혼과 육체가 떼거나 불리되지 않는 결합으로 인해 죽는 순간까지 인격으로 삽니다. 육신과 분리되는 영을 느끼거나 우리 자신이 우리의 영혼을 살펴볼 수가 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영이 잠들었는지, 잠들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거듭난 성도로서 신령한 삶을 살거나 신령하지 못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올바른 사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이 잠들었거나 영이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를 재미있게 하는 것은 배울 만한데, 가르치는 내용이 매우 사이비적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바르게 형성되어 있지 않아 보입니다. 구약의 토라에 대해 안다는 것과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안다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은 그리스도 당대의 토라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후에도 토라 전문가들이 기독교를 가장 멸시했습니다. 토라를 알면서 신구약과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심각한 이단이 됩니다. 

이 글을 한명진 목사에게 전해주시고 가급적 반론하시면 <바른믿음>에 올려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한 목사님께서 위 영상을 삭제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계속 영상을 녹취하면서 소감을 말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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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