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교수의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소감 4

김재성 교수(국제신학교 부총장)
김재성 교수(국제신학교 부총장)

김재성 교수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얻으셨다고 주장함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나 있음을 앞의 글들에서 살펴보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다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켜 먼저 의로움을 얻으셔야만 한다는 가르침이 성경에 전혀 없다. 신.구약 66권의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맹랑한 내용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대리속죄가 곧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성경은 우리의 의로워짐의 근거가 죄없으신 그리스도의 대리속죄라고 말한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먼저 의로움을 얻으시고, 그것이 우리에게 물려져서 칭의와 구원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육신의 목적과 구원의 방식에 대해 왜곡하면 누구라도 거짓 신학자로 규정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공로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준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우리에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약신학자였던 메이첸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율법준수)가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고 소개하는 김재성 교수의 말은 맹랑한 소리일 뿐이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8-30)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성경은 그리스도 그 분이 의로우신 분이고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움을 얻으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의로운 사람이 되시고자 아담의 죄와 무관한 출생으로 오셨다. 의의 반대 개념은 곧 죄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아닌자는 의로운 자이다. 죄인이 아닐지라도 적극적인 무엇이 있어야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없는 자가 곧 의인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의를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느나,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는 전제하에 그러하다. 그리스도가 무슨 윤리적인 행동을 하여 우리를 위한 의를 획득했다고 말하면, 기독교의 성육신의 핵심이 무너진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고자 죄와 무관한 방식으로 출생했다. 동정녀의 몸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시었다. 아담의 죄와 관련이 없는 인간으로 창조되신 것이다. 죄와 무관하게 창조된 그 사람에게 성자께서 자기의 인격을 일치시킴으로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죄없는 사람이 되셨다. 간음의 욕구, 살인의 의지, 탐심 등 죄인에게 존재하는 모든 죄와 무관한 의로운 분으로 오셨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래서 성경은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고 말한다. 대체 그리스도가 무슨 좋은 행동을 위해 힘써 의로움을 얻으신 후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사상이 왜 생겨났을까? 중세 천주교의 신학방법(스콜라주의)을 칼빈의 후예들이 다시 차용하면서 생겨난 사변신학이라고 분석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방법을 차용한 스콜라주의의 대표적인 사례가 그 유명한 신존재 증명이다. 이성의 인식의 능력과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을 설명하는 것이다. 

“롬바드(Lombard)와 스콜라학자들(the Schoolmen)처럼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어떤 공적을 쌓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 대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자신을 위해 자신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지상에 내려오셔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존 칼빈, 기독교강요, 2.17.6)

칼빈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무슨 공적을 쌓았다는 주장이나 사상이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나타났다고 언급하면서, 참으로 어리석은 괴변이라고 단언했다. 칼빈주의 신학자인 김재성 교수가 성경적이지도, 칼빈주의적이지도 못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주장을 옹호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김 교수의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658년에 채택된 회중주의 청교도들의 <사보이선언>(사보이 신앙고백서, Savoy Declaration)이 그것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사보이 신앙고백서」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의 근거임을 선언했다. 스코틀랜드 청교도들과 일부 침례교회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전가된다는 교리를 선포했다.”(김재성 교수)

개혁교회의 신학자가 사보이 선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그 내용 가운데 능동순종이 있다고 하여 그것으로 능동순종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필자는 결코 김 교수의 그런 자세에 대해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국의 개혁교회의 신앙을 말살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 바로 그 계열의 사람들, 즉 회중주의 청교도들이기 때문이다.

개혁교회가 사보이선언을 채택한 청교도들의 신앙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단적인 교회정치(회중주의)와 개혁교회 파괴

사보이선언을 채택한 사람들은 회중교회를 설립한 청교도들이다. 그런데 회중교회주의는 이미 1562년 프랑스 개혁교회에 의해 이단판정을 받았었고, 관련된 서적들과 추종자들을 추방했었다(양신혜, 베자, 교회를 위해 길 위에 서다, 익투스, 2020, 324). 청교도신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배현주 목사도 회중주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회중교회주의는 여하한 경우에도 사도 신조가 증거 하는 거룩한 보편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배현주 목사, 사보이선언과 회중주의자)

사보이선언을 작성한 회중주의 청교도들의 문제는 단지 교회정치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교회를 더럽히는 각종의 이단 신학들이 등장했다.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이 불법화되면서 가장 먼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모두 회중주의자들이었다. 처음 신대륙의 역사에서 약 100년 동안에는 오직 회중교회들만 존재했다. 대서양을 건너온 장로교인들도 갈 곳이 없으므로 회중교회에 출석했고, 그래서 신대륙에서는 회중주의 청교도 신학이 장로교회 신학과 섞일 수밖에 없었다. (신학적인 면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잉글랜드의 회중주의 청교도들을 얼마나 경멸하기도 했었는지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회중주의 청교도들의 문제는 단지 교회정치만이 아니었다. 핍박을 받지 않고 번성했던 신대륙의 회중교회들이 신대륙의 교회를 더럽히는 이단의 온상이기도 했다. 유니테리언주의, 자유주의신학이 회중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이후 몰론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 신대륙을 더럽혔다.

회중주의 청교도들의 문제는 단지 교회정치만이 아니라 기독교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신학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능동순종 교리에 대한 강력한 집착이었다. 논쟁의 달인들있었던 그들은 웨민총회의 소수였음에도 강력하게 논쟁을 이끌었다. 능동순종 거짓 신학의 원인이 되는 행위언약 사상이 이미 1590년대 초에 퍼킨스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전체 영국에 먼저 전파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잉글랜드 장로교회주의 청교도들에게도 그것이 확산되었다. 그래서 행위언약이 웨민고백에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웠고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능동순종 신학까지도 웨민고백에 넣은 일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경과 공교회의 역사에서 찾을 수 없는 새로운 교리적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격론이 벌어졌다. 다수가 지지했을지라도 또한 다수의 장로교회주의자들이 반대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양측이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게 함으로 타협했다. 웨민고백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얻었다는 능동순종 신학을 공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을 로버트 래담은 자신의 책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칭의에 관한 조항에 대해서는 트위트, 가테이커, 리차드 바인즈 등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이 의를 전가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에 반대했는데 휘틀리가 이를 주도하였다. 시행된 투표결과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 편을 지지했으며, 반대는 3,4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몰리나이우스(Molinaeus)와 틸레누스(Tilenus) 사이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관한 논의는 ‘내 영토에서 하지 못한다.’는 제임스 1세의 요구가 낭독되었다. 제임스는 이것을 어떤 공회도 다루지 않았고 교부나 스콜라 학자도 다루지 않은 새로운 것이라는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주의를 주었다.”(81 페이지)

“많은 신학자들(발언자들 가운데 대략 1/3)이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 칭의로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리챠드 바인즈는 자기는 그것을 가르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 토론은 일곱 차례의 총회에서 계속되었고, 이 총회들 가운데 하나는 스코틀랜드 위원들의 요구에 응하여 였렸다. 결국 승인된 개정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과 만족이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진술되었다. 이러한 진술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고수하는 대다수를 만족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뉜다는 개념, 즉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의 전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을 피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또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충족시키는 것과 동일시되도록 했다. 이러한 진술은 양측으로 하여금 그것을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하는 타협안이었다.”(194 페이지)

<사보이선언>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사상을 기술하였으므로 그것이 정당한 신학이라는 김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옳지 않다.

1)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신학을 지지하는 내용이 없다. 한 줄도 없다. 모든 신학의 표준은 성경이고 모든 신학의 정당성과 진위를 결정하는 심판자는 성경이다.

2)다수의 장로교회주의 청교도들의 소수의 회중교회주의 청교도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웨민고백은 사실상 능동순종을 공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양측의 화합을 위해 절충안을 택하여 서로 자신들의 입장에서 만족하였다.

3)사보이선언은 회중교회주의 청교도들에 의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가 궤멸된 후 존 오웬, 토마스 굿윈 등의 회중주의자들에 위해 회중교회를 위한 신앙고백서로 작성된 것이다. 청교도 연합군은 국교회 군대를 무찌르고 난 후 곧 바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내전에 돌입했다.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다수였던 장로교회주의자들이 잉글랜드 의회를 장악하고서 모든 상황을 이끌었으나, 정작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 크롬웰과 그의 병사들 대부분이 회중교회주의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국교회 군대를 무찌르고 찰스 1세를 사로잡은 후 장로교회주의자들과 회중교회주의자들 사이에 잉글랜드의 권력을 놓고 싸워야만 했다. 회중교회주의자들로 구성된 크롬웰의 군대가 두 번이나 잉글랜드 의회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크롬웰과 회중주의자들은 웨민고백 등 웨민총회의 모든 결실들을 공개적으로 무시했다.

이후 잉글랜드에 다시는 장로교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크롬웰과 회중교회 군대는 두 번이나 스코틀랜드를 군사적으로 점령했고,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크게 거의 압살하였다. 그때 회중교회의 최고의 신학자 존 오웬이 군목으로서 크롬웰 군대와 동행했다. 회중교회주의 청교도들의 신앙이 장로교회주의 청교도들의 신앙과 같은 내용이었다면 과연 그리했을까?

신학적으로 보나, 역사적인 열매로 보나 회중교회주의 청교도 운동은 칼빈과 개혁교회 신앙의 적이었다. 회중교회주의 청교도들이 영국의 칼빈과 개혁교회 신앙을 무력으로 말살시킨 후에 나타난 것이 <사보이선언>이다. 김 교수께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시고 1658년에 채택된 회중교회주의자들의 신앙고백서에 능동순종 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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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