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크게 망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한다. 그들이 잘못된 것을 심었기 때문에 잘못된 인생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심겨진 잘못은 작은 것이었는데 오랜 동안 자라나며 엄청나게 큰 불행의 열매가 열려 있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의 불공평함을 바라보면서 인생에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갖는다.

인생에 왜 불행이 생기는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뇌해 왔다. 그렇게 해서 철학과 사상과 종교들이 만들어졌고 위대한 철학자나 종교 교주들이 탄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갖가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고통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넓고 깊어지고 있다.
 

인본주의 가르침

불교는 인본주의의 철학과 종교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불교의 가르침은 매우 깊고 오묘한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불행은 욕심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므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명상하고 염불하고 고행하고 소박한 옷을 입고 소박한 음식을 먹는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도 탐욕과 번민과 고뇌가 없어지지 않는다. 물질적인 탐욕은 아닐지라도 명예와 칭찬과 존경에 대한 탐욕 등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인정받지 못할 때 질투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속으로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이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거룩한 종교인의 모습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이중적이 되면서 고뇌와 번민이 더욱 커질 수도 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창기와 세리와는 친구가 되어주셨으면서도, 종교인의 거룩한 겉모습을 한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보시면서는 회칠한 무덤이나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되게 비난하셨다.

불교는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수양과 훈련을 통해서 완전(부처)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에 대해 무지해서 과대평가하며 만들어진 잘못된 가르침이다. 불교는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서 어떤 수양을 통해서도 결코 탐욕과 죄성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자제하고 통제할 수는 있어도 한계에 도달하면 무너지며 좌절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것에 대해서 칭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이 만들어낸 인본주의 종교와 철학은 목표도 틀렸고 방법도 틀렸다. 애쓰고 수고하면서 절반 정도 성공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실패한 것이다.

친구가 보내준 허경영의 강연을 들어봤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도 역시 불교적 사상과 성경 구절 인용과 일반 상식과 자기 생각을 혼합해서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연설은 “소리 에너지가 우리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는데, 내용을 대충 간추리면 이렇다.

“비난하는 욕설이나 충격적인 소리를 들을 때 정신이 번쩍 나는데, 그 순간 소리가 빛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빛은 빛의 속도로 영혼, 정신, 마음을 거쳐서 몸으로 들어가며 먼저 피를 썩게 만든다. 죽은 피는 뼈로, 살로, 피부의 순서로 들어가서 노화시키며 기미도 만든다. 빛은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으로 들어가는데 우리가 나쁜 소리를 들을 때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머리카락의 어머니는 피부, 피부의 어머니는 살, 살의 어머니는 뼈… 영혼의 어머니는 빛이므로 이런 순서대로 10단계를 거친다. 성경에서도 먼저 빛이 있으라고 했다. 빛 다음에 물, 그리고 식물… 이런 식으로 생겨난 순서가 있다 ... 성경에서도 보면 남을 미워하는 자는 스스로 심판을 받고 남을 용서하는 자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

미워하고 비난하는 나쁜 소리가 우리 인생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나쁜 소리가 왜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근거 없는 이론으로 끼워 맞추기를 하면서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

그럼 나쁜 말이 우리 인생에 왜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할까?

성경은 인간이 영, 혼, 육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살전 5:23). 인간은 동물처럼 육적 존재이면서 천사처럼 영적 존재이기도 한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이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영적 세계와 교통하면서 인식하지 못할 지라도 큰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된다.

유대인은 하늘에 세 개의 층이 있다고 이해했다. 첫째 하늘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연구할 수 있는 하늘이다. 그곳에는 구름도 있고 해와 달과 별이 뜨기도 한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인간을 그곳으로 부르시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다녀오고 나서 경외감에 압도되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었다(고후 12:1-4). 성경에서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 삼층천에 대한 것이다.

둘째 하늘은 하나님을 반역하면서 셋째 하늘에서 쫓겨 난 타락한 천사들(사14:12-15)의 처소로서 사탄과 귀신들이 공중권세 잡은 곳(엡2:2)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없어져버릴 하늘이다(고후3:10,12).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 삼층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이층천에서 공중 권세잡은 악령들에게 영향받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면서 모두 오라고 초청하시지만, 그와 반대로 ‘거짓의 아비’라 불리우는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몰래 숨는다. 도둑이 자신의 존재를 감추어야 남의 집에 침입해서 도둑질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사탄도 우리 인생을 도둑질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감춘다.

사탄은 영적 존재지만 우리 인생에 임의로 들어올 수는 없고,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 틈을 타고 들어와서(엡4:27) 우리 인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벧전5:8). 사탄, 마귀, 귀신, 미혹의 영, 거짓의 영이라 불리우는 악한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 인생은 우리가 지은 죄보다 훨씬 더 크고 나쁜 결과를 맞게 된다.

지인은 부잣집에서 살면서도 우울증과 자살충동으로 매우 불행하다. 그녀는 자신이 우울하고 불행한 이유가 모두 시집식구들 때문이라고 탓한다. 자신은 서울대를 나오고 잘 살 자격이 있는데 시집식구들이 자기 인생을 망쳤다며 울분을 토로한다. 그래서 남편과 친구들에게 시집식구들을 비난하면서 온 종일을 보낸다.

남을 미워하고 비난하는 심령은 결코 평안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평안하지 못한 이유가 비난하는 자신에게 있지 않고 시집 식구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미워한다. 그냥 미워한다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행동과 표정과 말투를 왜곡하고 트집 잡으며 기어이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 되어야만 자신이 미워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비난하는 말을 자신의 귀로 계속 들으면서 미움은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입 밖으로 나쁜 말을 내뱉으며 가슴 속에 나쁜 씨앗이 심겨지고 자라났다. 더욱 우울하고 불행해지면서 비난의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죄의 틈을 타고 악한 영이 들어오면서 더더욱 우울하고 불행해졌다.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되고 미움과 비난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급기야는 자살충동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금강경을 외우며 마음의 평강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심령 깊은 곳에 심겨진 죄 때문에 결코 평안할 수는 없다. 자신은 전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심령 깊은 곳에서 죄를 인식하면서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고 사는 어쩔 수 없는 인생이다. 그러나 사탄에게 죄의 볼모로 묶이지 않기 위해서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분을 내어도 하루를 넘기지 말라고 말씀하신다(엡4:26-27). 분노를 멈추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사탄의 개입을 허락하고 결국 사탄에게 사로잡히는 인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죄의 틈을 타고 들어온 사탄은 우리의 삶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고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묶고 푸는 권세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만드시고 자연 법칙에 따라서 운행하시듯이, 영적 인간을 만드시고 영적 원리에 따라서 운행하신다. 하나님의 영적 원리는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데, ‘묶고 푸는 천국의 열쇠’가 한 예가 된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천국의 열쇠라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졌음을 알려준다. 천국의 열쇠는 우리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해준다(마16:19). 예를 들어 우리가 미움과 억울함을 묶고 용서와 축복을 풀어 하늘에 기도로 올려 보내면, 하늘에서도 묶고 풀어서 다시 땅으로 내려진다. 우리가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고 애쓸 때는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데, 악한 것들을 묶고 선한 것들을 풀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그것이 이 땅으로 다시 내려오면서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묶을 것은 미움이나 비난만이 아니다. 두려움과 불안, 염려와 근심, 낙심과 절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낙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며 공급하시며 치유하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언어로 드러난다.

한편에서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한, 다른 한편에서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하나님이 무심하시거나 무능력하심 때문이 아니다. 천국열쇠의 권세를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와 반대로 묶고 풀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일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연 법칙에 무지하거나 무시해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듯이, 영적 법칙에도 무지하거나 무시해서 내 마음대로 행한다면 인생은 실패를 거듭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영적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어려운 곳은 우리의 언어다. 언어는 우리의 내적 상태를 그대로 표현한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나쁜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의 말을 한다. 그런 언어는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의 복을 풀어 땅으로 다시 내려온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드렸던 감사와 기쁨의 언어가 땅에서 실체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렇게 선순환은 반복된다.

한편 나쁜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되고, 그것은 쉽게 부정적인 언어로 토해진다. 불평 불만의 언어는 하늘로 올라가며 하늘의 신령한 복을 묶어 버린다. 하늘에서 묶인 것이 땅으로 내려오며 현실이 되면 더욱 불만스럽고 화나는 삶이 된다. 내게 천국의 열쇠가 주어졌기 때문에 결국 내 인생을 결정짓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고 근육이 생기면 건강해진다는 정보를 갖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정보를 가졌어도 행하지 않으면 건강은 내 것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통해서 영적원리를 알게 되었어도 행하지 않으면 승리와 행복은 내 것이 되지 못한다.

몸에 근육이 필요하듯이 신앙에도 영적인 근육이 필요하다. 영적 근육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키워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말씀이라고 하셨다(롬10:17). 말씀이신 성경은 당시 각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 회당에서 읽어 줄 때 귀로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각자 성경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읽을 수도 있다. 믿음은 말씀을 읽을 때 생겨나고 확신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공급하신다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하나님이 아시고 갚아주신다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미워하지 않고 복수하지 않을 수 있다. 슬픈 일을 당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바로 믿을 때 우리는 바른 마음과 언어와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므로 어느 상황에서도 안심하고 감사할 수 있어서 생겨난 언어와 태도다.

세상에는 복 받은 인생들이 있고 저주받은 인생들이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저주하기 때문에 저주받은 인생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지 못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우리의 죄다. 어제도 오늘도 화내고 불평하고 근심했지만 괜찮다. 회개하고 다시 나아오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복되는 실패와 나약함을 비웃지 않으시고 영적전쟁에 분투하는 모습을 격려하시며 응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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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옥 선교사는 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 산호제바이블컬리지에서 신학, 산호제주립대대학원에서 소셜웤을 전공했다. 서울과 산호제에서 다년간 직장을 다녔고 산호제에서는 교회에서 전도사로도 일했다. 현재는 예수님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세상이 갖는 수많은 오해들에 대해 답변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도하고 있다.
저서 <예수신화?예수실화!>는 성경은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에서 기록된 역사서며, 예수님은 성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변증한다. <시대읽기>는 기독교를 왜곡하거나 혼합해서 파괴하려는 반기독교적 세상의 정체와 그것의 반인륜적인 역사를 폭로한다. 이들 내용을 요약하고 추가해서 <예수는 실화다>와 <성경적 시대읽기>를 다시 출간했다. 최근 출간된 <다시살다>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개인 이야기를 간증한다. 번역서로는 <당신은 괜찮습니까?>와 <회복프라소>가 있는데 성경적 회개와 용서와 예수 안에서의 치유와 회복을 주제로 한다. joookkim@hotmail.com